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0화 (50/605)

50화. 징수관

50화. 징수관

로벨은 고삐를 느슨하게 풀고 전투마가 내키는 대로 걷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래도 네일 공국산 젖소 20마리보다는 빨랐다.

“저 좀 보세요! 저도 기사에요!”

장난기 많은 마녀 키르케가 순한 젖소를 타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자세만 보면 훌륭한 랜스 차칭이었다. 외팔이 더치가 실소했다.

“기사는 개뿔! 소를 제물로 바치러 가는 마녀 같수다.”

“가랏, 로시난테! 저 외팔이 괴물을 박아버려랏!”

“...그새 이름을 지었수?”

로벨은 외팔이와 마녀를 외면하고 전투마의 굵은 갈기를 쓸어내렸다.

“너도 이름이 있으면 좋겠어?”

전투마는 사람의 말을 몰라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봄이 만발한 저녁 들판을 감상했다.

바람은 차갑지 않고 쾌적하며, 햇살은 무덥지 않고 포근했다. 산과 들은 초록빛으로 손을 흔들고, 해와 구름은 유난히 높은 곳에서 새침이 도망갔다. 풀밭에 누워서 풀잎의 속삭임을 들으며 낮잠 자기 좋은 날이었다.

“저기, 기사님?”

소떼를 모는 젊은 목동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로벨은 지그시 감은 눈을 뜨고 목동을 내려다보았다.

“곧 있으면 해가 저뭅니다. 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로벨은 인상을 찌푸리고-목동은 자기 때문에 화가 난 줄 알고 재빨리 물러났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겨운 나무와 익숙한 바위가 보였다.

“다 왔어.”

로벨은 손가락으로 구불구불한 흙길 저편을 가리켰다.

“저기가 내 영지야.”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60여 가구의 작은 마을 옆으로 울타리 공사가 끝난 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목동은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생각보다 넓고 깨끗해서 소들이 지내기 좋겠다는 행복함을 동시에 표출했다.

“정말 아름다운 영지군요.”

마녀 키르케와 외팔이 더치가 싸움을 멈추고 목동을 돌아보았다. 표정들이 복잡 미묘했다. 그래서 로벨은 진짜 화를 냈다.

“그 표정 뭐야? 내 영지가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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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지붕을 새로 얹은 축사에 먼 길을 걸어온 소떼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목동에게 은화 한 줌을 주었다.

“수고했어. 쉴 곳을 알아봐 줄게.”

“아뇨.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쉬겠습니다.”

로벨은 축사를 한번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이 지내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목동은 쑥스러운 얼굴로 설명했다.

“저 녀석들은 낯선 곳에 오면 불안해합니다. 제가 옆에 있어 줘야 합니다.”

로벨은 성실한 목동과 그런 목동을 소개해준 상인 길드장을 칭찬하고 말했다.

“그럼 저녁거리를 보내줄게.”

“아, 감사합니다!”

로벨은 외팔이 더치를 불러 마을에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 봄 추수가 막 끝난 터라 빵 한두 조각으로 역정을 내는 영지민은 없을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로시난테와 작별 인사하는 것을 기다려준 후 로드릭 성으로 향했다.

마녀 키르케는 기분이 좋은 듯 지팡이로 뒷짐 지고 콧노래를 불렀다. 노을 지는 언덕과 고요한 마을을 배경으로 사뿐사뿐 걷는 소녀의 모습이 정겹고 평화로웠다.

소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몸을 돌려 로벨을 보았다.

“그나저나 칼을 못 구해서 어떡해요?”

“칼 있잖아.”

로벨은 허리에 찬 칼집을 두드렸다. 노스폴드 시티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롱소드였다. 늑대의 왕이 부러트린 예전 롱소드보단 못 하지만 그럭저럭 쓸만했다.

“흐응. 마도의 수호자를 상대하기는 역부족일 거예요.”

로벨도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옛날이야기나 기사도 소설처럼 전설의 검이 뚝 떨어질 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지.”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언덕 위 성문을 지나자 어린 집사가 축 쳐서 마중 나왔다.

“영주님, 숲지기 차남 닥스가 뉴 로드릭 마을로 가져갈 농마 한 마리를 달래요. 묵은 땅을 갈아엎으려면 말이 필요하긴 할 텐데, 어쩌죠?”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컹컹거리며 뛰어오는 아야와 이야카를 안아주었다. 개를 닮은 늑대들은 주인이 좋아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지 말고 한 마리 더 사자.”

“농마 가격이 얼만데요?”

로벨은 전투마를 끌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소 사고 남은 돈이 있어.”

“에엥? 소 샀어요?”

“노스폴드 시티에 마침 소몰이꾼이 왔어. 나이도 어리고, 건강해서 좋아.”

“소몰이꾼이요?”

“...소가.”

로벨과 어린 집사는 실없는 소리를 나누면서 전투마 안장을 벗기고 여물과 물을 준비했다. 로드릭 영지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분이라 영주와 집사가 손수 씻기고 먹여주었다. 아야와 이야카와 마녀 키르케가 질투심에 으르렁거렸다. 로벨은 세 짐승(?)의 눈치가 보여 브러쉬의 털을 털어내고 말했다.

“저녁 먹자. 준비됐어?”

“영주님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보리빵이요.”

“그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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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로벨이 아침훈련을 끝내고 순무가 듬뿍 들어간 스튜로 아침식사를 시작할 때였다. 로드릭 마을 촌장이 찾아와 급히 알현을 요청했다.

“알현 행사는 오후인데?”

로벨이 한마디 하자 어린 집사가 열 배로 분개해서 국자를 휘둘렀다.

“영주님의 식사를 방해하다니! 아무리 촌장(Elder:영주가 임명한 기사 아래 신분.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선발한 촌장(Village Head)과 다르다. 동장과 이장의 차이 정도)이라도 무례해요! 펄프 대장이 있었으면...!”

“아참, 펄프 대장한테 연락 없어?”

“아직이요. 구울이 있는지 조사 중이겠죠. 그것보다 촌장을 좀 더 혼내야...!”

“그건 됐어.”

로벨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할 말이 있으며 하라는 손짓을 했다. 촌장은 고개를 숙이고 영주님의 식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빠르게 말했다.

“마을 광장에서 행상인 형제가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영주님께 받아야 할 돈이 있다면서, 영주님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어린 집사가 어이없다는 듯 따졌다.

“우리 영주님의 자랑 중 하나가 빚지지 않고 사는 것인데, 무슨 돈을 내놓으란 거예요? 그리고 영주님한테 볼일이 있으면 성으로 찾아오면 되지, 왜 마을에서 행패를 부려요?”

“그건 저도 잘...”

사실, 아침 일찍 성을 방문했는데, 아야와 이야카가 심술궂게 쫓아냈다. 로벨은 훈련 중이고, 마녀 키르케는 요리 중이라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로벨은 작은 그릇에 순무 한 조각을 담고 일어났다.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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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아야와 이야카를 데리고 성 아래 로드릭 마을로 향했다. 120명의 용병단을 이끄는 기사답지 않게 검소한 수행원이었다.

“영주님이다!”

“영주님이 오셨다!”

로벨 일행은 평소보다 적극적인 환대를 받았다. 촌장을 보내 아침식사를 방해할 만큼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이다.

로벨은 빈 그릇을 어린 집사에게 주고 인파를 가르며 광장으로 나아갔다. 마을 광장 한복판에서 대거를 휘두르는 크고 작은 행상인 형제가 있었다. 험악한 얼굴로 험악한 말을 쏟아내는데, 그 옆에 털이 풍성하게 자라 둥글둥글한 양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어서 긴장감이 다소 떨어졌다. 로벨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너희는... 구라 형제?”

“그람 형제입니다!”

노스폴드 시티 앞에서 전투마를 ‘찾아준’ 그람 형제였다.

로벨은 ‘그람... 그람...’ 두 번 중얼거리고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올렸다.

“내 마을에서 무슨 짓이지?”

겁이 많은 멀대는 찔끔했지만, 집착이 강한 땅딸보는 악을 쓰듯 말했다.

“저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살기 위해서 도리가 없습니다요. 제발 살려주십시오.”

“누가 죽인데?”

“세상이 저희 형제를 죽이려고 합니다!”

땅딸보는 엉엉 울면서 하소연했다.

지난 7년간 아끼고 아껴서 말과 마차를 장만했는데 오크에게 빼앗겼다. 노스폴드 시티에서 간신히 자금을 유통해 재기할 상품을 구했는데 헤르만 백작군에게 빼앗겼다. 결국, 남은 것은 세 자릿수의 빚뿐이었다. 가만있다가는 빚쟁이한테 맞아 죽거나 노예로 팔려갈 판이라 노스폴드 시티 밖으로 도망쳤다. 그 후 사흘간 굶주린 채 떠돌다가 로드릭 가문의 문장을 발견했다.

“기사님, 그날 약속하신 금화 한 닢을 주십시오.”

“금화?”

로벨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아?” 소리를 냈다. 오크 무리의 정보를 대가로 금화 한 닢을 주기로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다. 그렇다 해도 기사에게 돈을 요구하는 용기가 대단했다.

“그거 받으려고 온 거야?”

“그 돈이 아니면 굶어 죽습니다.”

로벨은 롱소드를 아래로 눌렀다. 그람 형제는 움찔해서 뒤를 살폈다. 로벨이 ‘저 겁대가리 상실한 놈들을 잡아라!’ 따위를 외치면 죽을힘을 다해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사 중의 기사로 추앙받는 명예로운 기사 로벨이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았다.

“집사, 금화를 던져줘.”

“10페닝이요?”

“응.”

어린 집사는 진심이냐는 듯 두 눈을 껌벅였다. 로벨은 작게 끄덕였다.

“저 친구들 덕분에 펄프 대장을 구할 수 있었어.”

“그건... 에휴...”

어린 집사는 바지 주머니에서 찌글찌글한 10페닝짜리 금화를 꺼내 던졌다. 그람 형제는 근 열흘 만에 돈을 구경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오오! 자비로운 기사님! 정말 감사합니다요!”

“기사님의 명예를 널리 알리겠습니다!”

로벨은 활짝 웃으며 롱소드를 뽑았다.

“이제 내 마을에서 흉기난동을 부린 대가를 치르자.”

그람 형제는 전직 행상인답게 눈치가 빨랐다. 화급히 몸을 돌려 도망쳤다. 하지만 두 발이 네 발보다 빠를 수 없었다.

“아야! 이야카! 잡아!”

“컹!”

늑대 남매는 아침에 못 깨문 것이 참 아쉬운 듯 맹렬히 뛰어갔다. 로벨은 롱소드를 늘어트리고 느긋하게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서 엉덩이에 구멍이 난 땅딸보와 멀대 형제를 체포했다. 어린 집사가 어이없어서 중얼거렸다.

“이 녀석들, 왜 이렇게 엉덩이를 좋아해?”

“컹! 컹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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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외팔이 더치를 데리고 감옥으로 찾아가서 채찍 50대와 벌금 10페닝 중 하나를 택하라고 윽박질렀다. 외팔이 더치의 근육에 반한 그람 형제는 꺼이꺼이 울며 금화를 상납했다. 결국 엉덩이로 피를 뿌린 것 말고 소득이 없었다. 그래도 로벨을 찾아온 것이 나쁘지 않았다. 로벨은 아침에 먹고 남은 순무 스튜를 나눠주고 제안했다.

“징수관이 되라굽쇼?”

“응.”

로벨은 어린 집사를 힐끔 보았다. 어린 집사가 헛기침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 영주님이 새로 하사받은 영지가 있는데, 거리가 좀 있어서 관리가 힘들어요. ‘조만간’ 기사 하나를 영주 대리로 보내겠지만, 그때까지 새 영지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해요. 물론! 급료를 줄 거예요.”

그람 형제는 서로를 한번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야 좋지만, 저희를 어떻게 믿고...”

“상인이니까 숫자에 밝지?”

“손해는 안 보고 장사했습니다요.”

“기사의 말을 훔칠 정도니까 배짱도 좋지?”

“저어... 훔치려던 것이 아니고...”

“뭐, 뭐에욧? 전투마를 훔치려고 했다고요? 그럼 손모가지부터 자르고 이야기해야죠!”

어린 집사가 숨겨진 일화를 듣고 방방 뛰었다. 로벨은 점잖게 제지한 후 말했다.

“새 영지는 터가 안 좋아서 용감한 사람이 필요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안 좋은지...”

“구울이 나와.”

“따뜻한 식사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람 형제는 즉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꺼내서 까슬까슬한 수염을 다듬고, 아야와 이야카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하울링 했다. 그람 형제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었다. 로벨은 높고 낮은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내 용병단이 주둔 중이야. 세금을 운송할 때 호위해줄 거야.”

“그렇다면...”

“세금 떼먹고 도망치지만 않으면 안전을 보장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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