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무쇠
49화. 무쇠
로벨은 거인의 발에 모인 병력을 이끌고 노스폴드 시티로 향했다. 웨던 남작을 비롯한 도시민은 성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로벨과 병사들을 보고 환호했다.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뭐라는 거야?”
“우리가 이겼다! 오크를 물리쳤다!”
로벨은 웨던 남작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시티가드와 짐말을 반납했다. 웨던 남작 주변의 행상인들은 무사히 돌아온 짐말을 보고 기뻐했다. 웨던 남작의 말인 줄 알았는데, 노스폴드 시티에 발이 묶인 행상인들한테 빌린 말이었다. 행상인이 행상인을 약탈한 헤르만 백작군을 구해준 셈이다.
“과연 그랜드 챔피언과 울프 용병단이오. 수백 마리의 오크를 하룻밤에 격퇴하다니.”
로벨은 겸양을 표시했다. 사실 로벨의 공보다 애꾸눈 볼포스의 공이 컸다.
로벨과 웨던 남작은 나란히 성문을 통과했다. 계획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성문에서 웨던 남작의 저택까지 도시를 관통하는 개선식이 되었다.
좌판이 치워진 널찍한 도로 위로 꽃잎과 색종이가 뿌려졌다. 2층, 3층 건물 위에서 시민들이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떠돌이 출신이 많은 울프 용병단은 물론이고, 노스폴드 출신의 시티가드도 감격해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휘이이익! 멋지다!”
“로벨 로드릭 만세! 울프 용병단 만세!”
“노스폴드 시티 만세!”
웨던 남작은 뻣뻣한 로벨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라고 눈짓했지만, 로벨은 바이저를 내려쓰고 외면했다. 웨던 남작과 노스폴드 시민들은 근엄한 기사, 혹은 쌀쌀맞은 기사라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냥 부끄러워하는 중이었다. 아멧을 강제로 벗기면 귓불까지 빨개져 있을 것이다.
웨던 남작은 로벨을 대신해 손을 흔들며 물었다.
“헤르만 백작은 어찌 되었소?”
“전투 중에 도망쳤소.”
“허허, 그런데도 승리했단 말이오? 그 백작 꼴이 우습게 되었군. 솔직히 말해서 통쾌하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젠 백작도 성군은 아니지만, 헤르만 백작은 기사의 기본 자질조차 의심스러웠다. 이번 일로 페르젠 백작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웨던 남작은 행렬 끝에 의기소침하게 따라오는 헤르만 백작군 잔당을 힐끔 보고 말했다.
“저자들은 헤르만 백작의 부하가 아니오?”
로벨은 바이저의 눈구멍 너머로 웨던 남작을 보았다. 불쾌함이 엿보였다.
“이제 내 부하들이오. 신입 울프 용병단이지.”
전(前) 헤르만 백작군을 보호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웨던 남작은 노스폴드 시티의 영웅이자 무패행진을 이어가는 그랜드 챔피언의 뜻을 존중해서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밤 조촐하게 승전축하 연회를 열까 하오. 참석해 주시겠소?”
로벨은 늑대의 왕에게 얻어맞은 옆구리를 만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대는 감사하나, 피로가 극심해서 어렵겠소. 본인 대신 애꾸... 아니, 임시 용병대장 볼포스를 보내리다.”
귀족의 연회라면 평민인 애꾸눈 볼포스를 보낼 수 없지만, 자유도시의 연회라 거부감이 크지 않았다. 50명-전사자가 나와 43명-의 용병을 지휘하는 용병대장이면 도시의 길드장보다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럼 남작께서는?”
로벨은 손등 위에 떨어진 팬지 꽃잎을 보며 말했다.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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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신입 울프 용병단을 데리고 로드릭 성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몇 달 만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새 거인의 발 전투소식이 알려졌는지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 등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모였다.
로벨은 롱소드가 사라진 허전한 소드 벨트를 풀며 안심시켰다.
“난 괜찮아.”
“얼굴이 아주 안 괜찮은데요?”
“난 ‘아주’ 괜찮아.”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펄프 대장에게 신입 울프 용병의 치료 및 편제를 맡기고 어린 집사만 침실로 불렀다. 어린 집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아니.”
로벨은 어린 집사의 도움을 받아 컴포지트 아머의 판금을 분리하고 아밍 더블릿을 벗었다. 북쪽 숲에서 오크에게 맞은 팔뚝에는 주먹만한 피멍이 들었고, 거인의 발에서 늑대의 왕에게 맞은 옆구리는 시뻘겋게 부어있었다. 그 외에도 화살에 맞은 곳, 창칼에 찔린 곳, 뛰고 구르면서 돌부리에 채인 곳 등등이 멍들었다. 갑옷을 입었다고 충격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갑옷이 아니었으면 12번쯤 죽었을 것이다.
“우와! 알록달록하네요! 오크 300마리를 혼자 상대했어요?”
“그놈이 있었어.”
“그놈이 누군데요?”
“늑대의 왕.‘
“거인처럼 크고 세다는 괴물이요?‘
“응.”
어린 집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조금 밝아졌다.
“아...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셨으니까, 이긴 거죠?”
“아니.”
“그럼 졌어요?”
어린 집사는 로벨이 지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쯤 되물었다. 로벨은 짜증이 나서 말을 끊었다.
“아무튼! 이번 일이 심상치 않아. 늑대의 왕, 몬스터, 악마추종자가 모두 연관이 있을 거야. 키르케가 말한 마도의 수호자란 집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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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새옹지마라, 오크, 늑대의 왕, 헤르만 백작 등등 안 좋은 일이 지나가자 좋은 일이 하나둘 찾아왔다.
봄 추수가 끝날 무렵, 페르젠 백작의 젊은 기사가 찾아와 지난 연회의 무례를 사과하고 동방비단 한 포와 후추 한 상자를 선물했다. 어린 집사는 물개처럼 손뼉 치며 좋아했다.
“와아! 와! 와! 이게 다 얼마야?”
“아아... 예뻐요...”
물욕이 거의 없는 마녀 키르케조차도 감탄할 정도였으니, 물욕이 차고 넘치는 펄프 대장, 외팔이 더치 등의 용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로벨은 어린아이 속살처럼 부드러운 실크와 바짝 마른 껍질 속에서 매콤한 향기를 내는 후추를 번갈아 만져보고 미소 지었다. 어린 집사는 연거푸 감탄하다고 돌연히 한숨을 푸욱- 쉬었다.
“페르젠 백작은 정말 부자네요. 하긴, 페르젠 시티를 오가는 상인들한테 관세를 1%만 걷어도 그 돈이...”
그 돈이 정확히 계산되지 않아서 손가락 꼽는 시늉 좀 하고 그만두었다.
“이걸로 영주님 옷을 지을까요?”
“아니.”
로벨은 딱 잘라 말했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여자의 삶에 관심이 없는 로벨이었다. 잘 만들어진 무기, 갑옷, 안장이라면 모를까, 화려한 옷과 보석, 향신료 따위에는 욕심내지 않았다.
“후추로 무기를 사고, 비단으로 소를 사자. 이 정도면 상등품을 구할 수 있을 거야.”
로벨은 천성이 기사고, 천직이 영주였다.
“음... 그래도...”
어린 집사가 후추알을 굴리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졌다. 포클랜드 시티의 귀족들이 좋아하는 후추의 맛이 궁금했다. 마녀 키르케와 펄트 대장 일행도 간절해 보였다. 로벨은 고생이 많은 가솔들을 위해 한발 양보했다.
“그래도 성의가 있으니까, 맛은 볼까?”
“예? 예예! 좋아요!”
“우리 기사님이 최고예요!”
“험험! 창고에서 염장고기를... 아니, 양 한 마리 잡는 것이 어떻습니까?”
“영주님의 양은 절대 안 돼요!”
어린 집사가 결사반대했지만, 여론에 밀려 결국 새끼 양 한 마리를 잡았다.
어린 집사는 얼마짜리 사치냐면 구시렁거렸지만, 마녀 키르케가 후춧가루 듬뿍 뿌린 넓적다리를 쥐여주자 조용해졌다.
로드릭 성의 작은 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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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에게 선물을 보낸 것은 페르젠 백작만이 아니었다.
로벨의 주군이자 볼탄 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오크의 남하를 막은 공적을 치하하며 하사품을 보내왔다. 비록 종이 몇 장이지만, 그 가치는 동방비단과 후추보다 작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깜짝 놀랐다.
“마크 하몬 남작의 영지를 하사한다고요?”
로벨은 혹시나 해서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서기관의 호화스러운 문장 사이로 분명하게 영지를 하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후계가 없어서 양도가 가능한 모양이야.”
“근데 거기 성도 없고, 주민도 없잖아요?”
“성은 우리가 불 질렀으니까 없지...”
“아무튼요. 그거 받아봐야 쓰지도 못하잖아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머리를 맞대고 하몬 남작령을 어찌할지 의논했다. 일단 공짜니까 거절하지는 않기로 했다.
“영지민 중에 자원자를 받아서 우선 보내고, 집이 없는 자유민을 천천히 모으면 되지 않을까요?”
“자원자가 있을까? 구울이 나오는 곳인데?”
“하몬 남작의 땅은 비옥해요. 토지세를 조금 깎아주고, 울프 용병단을 딸려 보내면 자원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로벨은 미심쩍지만 일단 진행해보기로 했다. 촌장을 불러와 사정을 이야기하고 자원자를 모으라 지시했다. 예상 밖으로 100명 가까운 자원자가 나왔다. 로벨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내, 내 통치가 별로인가봐...”
“그럴 리가요? 이 사람들이! 여기 땅은 어쩌고 하몬 남작령으로 가려는 거야!”
다행히(?) 로벨이 싫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는 차남과 삼남이 많았다.
로벨이 춘, 추경지를 개간했지만, 내년이면 휴경지가 된다. 올해 새로 개간한다 해도 첫해의 수확량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그에 비해 하몬 남작의 땅은 검증된 옥토였다. 세월이 지나도 자신의 땅을 가지기 힘든 차남 이하의 사내들에게는 도전할만한 일이었다.
“펄프 대장, 새로 합류한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먼저 출발해. 농민들은 준비되는 대로 보낼게.”
“Yes, My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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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의 일이 많아졌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늙은 촌장에게 하몬 마을, 아니, 뉴(new) 로드릭 마을로 보낼 물자를 준비시키고, 마녀 키르케와 외팔이 더치를 대동해서 노스폴드 시티를 찾아갔다.
노스폴드 시티는 전쟁이 끝나자 다시 냄새나고 지저분한 도시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행상인이 다시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로벨 남작님!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세요!”
그동안의 일로 친분이 쌓인 상인 길드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직업이 직업이라 허리춤에 우선 관심을 보였다. 로벨은 평복차림에 대거 한 자루만 차고 왔다. 그래서 한결 부드럽게 대할 수 있었다.
“시장님이 시민을 대표해 감사를 표시했지만, 개인적으로 다시 감사드립니다. 오크를 물리치고 우리 도시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알겠어.”
로벨은 겸양하지 않고 감사를 받았다. 상인 길드장은 기사다운 반응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철갑을 두르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팔 물건이 있어.”
“햇보리입니까? 수확이 빠르군요.”
“아니, 올해 보리는 안 팔아. 대신 이걸 가져왔어.”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외팔이 더치가 가져온 비단과 후추를 보여주었다. 상인 길드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보기 드문 상등품군요. 이만한 품질은 아이란드 왕국 상인이 아니면 구할 수 없을 텐데요.”
포비아 왕국은 아이란드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기사를 상대로 한 적절한 견제구였다. 로벨은 정직하게 받아쳤다.
“페르젠 백작이 보낸 거야.”
볼탄 반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력자가 거론되자 상인 길드장은 찍소리 못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최측근이자 페르젠 시티의 주인인 백작을 의심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크흠. 그래서 품질이 좋군요. 파실 겁니까?”
“응.”
“길이와 무게를 재고 값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상인 길드장은 조합원을 불러 자와 저울을 준비시켰다. 로벨은 감정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두 번째 용건을 밝혔다.
“소를 몇 마리 사고 싶은데.”
“소라면, 우리 도시보다 인근 영주를 찾아가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품종이 좋은 소를 찾아. 에르나 왕국산이나 네일 공국산.”
“그렇다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로벨은 허전한 왼쪽 허리를 쓸어내렸다.
“아주 좋은 칼이 필요해.”
기사가 찾는 칼이 주방칼일 리 없었다. 상인 길드장은 대장장이 길드를 염두에 두고 되물었다.
“칼이요?”
로벨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쇠도 자를 수 있는 칼. 어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