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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48화 (48/605)

48화. 미소

48화. 미소

로벨은 오크 200마리와 늑대의 왕 1마리(?) 중 어느 쪽이 더 부담되는지 가늠해 보았다. 놀랍게도 늑대의 왕 하나가 더 골칫거리였다.

“저 덩치는 뭐야?”

“인간 아냐? 인간이 왜 오크랑 있지?”

로벨 이외에는 늑대의 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울프 용병단도 신출내기들이라 회색산의 일을 알지 못했다.

“저자는...”

로벨이 위험을 경고하려고 했는데, 오크들이 창과 방패로 땅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딱히 경고가 필요 없었다. 늑대의 왕은 가장 소란스러운 오크의 머리를 움켜잡고 번쩍 들었다. 텃밭에서 잡초를 뽑듯 자연스러웠다.

“난 말하는데 끼어드는 놈을 안 좋아해.”

오크는 잡초와 달라 저항했다. 늑대의 왕의 손가락을 붙잡고 두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오크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한 발버둥일 텐데, 늑대의 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오크의 머리를 잡아 올린 채 로벨을 보았다.

“크하하핫!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나도 몰랐어.”

오크의 몸부림이 거세지고, 거세지다가, 뿌드득! 소리와 함께 잠잠해졌다. 늑대의 왕이 악력으로 머리통을 부순 것이다. 인간들은 늑대의 왕의 정체를 몰라도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다.

“주, 죽은 거야?”

“완전 괴물이잖아!”

늑대의 왕은 축 처진 오크를 좌우로 흔들었다. 혓바닥이 한 뼘쯤 나오고 눈알이 빠져서 대롱거렸다. 괴기스러운 저주 인형 같았다.

“다시 만나면 분명 다를 것이라 말했지.”

“그럴 상황이 아닌데...”

로벨은 그냥도 싸우고 싶지 않은데, 오크 무리 속에서 더더욱 싸우고 싶지 않았다. 로벨은 시간을 끌기 위해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가 뭐야?”

“너희가 네 발 달린 짐승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이유지.”

“...먹으려고?”

“또는 재미있으니까.”

로벨은 롱소드를 꽉 쥐고 따지듯 반문했다.

“인간을 재미삼아 죽인다고?”

늑대의 왕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반박했다.

“사슴이 왜 우리를 재미삼아 죽이냐고 화내면 무어라 대답할 것이냐.”

“...미안?”

“...솔직하군.”

늑대의 왕은 등 뒤에서 츠바이핸더를 꺼냈다. 보통 사람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무거운 거병인데, 늑대의 왕이 손에 쥐자 평균 사이즈의 롱소드로 보였다.

“우리 사이에 잡말은 필요 없지. 자, 싸우자!”

로벨은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냐고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러나 늑대의 왕이 태산 같은 기세로 달려오니 물을 틈이 없었다.

“자리를 지켜!”

로벨은 울프 용병단과 헤르만 백작군에게 명령하고 마주 달려나갔다. 저 덩치의 돌진을 제자리에서 받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의 왕은 자신과 같은 과(科)로 오해하고 뿌듯했다.

“크하핫! 그래! 그래야지!”

늑대의 왕의 츠바이핸더가 밤공기를 갈랐다. 인간이 열을 감지할 수 있다면, 칼날의 궤적을 따라 열풍이 몰아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부우웅-! 거인의 발이 요동쳤다.

로벨은 무지막지한 참격에 맞서는 대신 슬라이딩으로 빠져나갔다. 땅에 고인 핏물 덕분에 잘 미끄러졌다.

“재빠르군!”

로벨은 땅을 짚어 속도를 줄이고,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아 늑대의 왕 옆구리에 찌르기를 넣었다. 울프 용병단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로벨은 치명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깡-! 칼날이 튕겨 나왔다. 늑대의 왕은 지금까지 상대한 그 누구보다 크고 강하고 단단했다.

로벨은 회색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면대결하지 않았다. 옆으로 돌면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저 괴물도 괴물이지만, 우리 기사 나리도 장난이 아닌데?”

“괜히 그랜드 챔피언이 아니야!”

용병들은 거듭 감탄하며 결투를 지켜보았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과 집에 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었다. 제삼자가 볼 때는 분명 로벨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유리한 것은 늑대의 왕이었다.

로벨은 치명타를 주지 못하고 지쳐갔다. 44파운드의 갑옷을 입은 채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체력 단련한 로벨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늑대의 왕의 공격은 한방 한방이 위력적이었다.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육체적인 피로에 정신적인 피로가 더해갔다. 외줄 타기 하듯 아슬아슬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다.

로벨은 늑대의 왕이 풍차처럼 돌리는 츠바이핸더를 피하지 못하고 롱소드로 막았다.

콰앙!

칼과 칼이 부딪쳤는데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로벨의 롱소드가 두 동강 나고, 로벨의 몸이 새우처럼 꺾여서 날아갔다.

“커허헉-!”

로벨은 땅바닥을 두 바퀴 반 구른 후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숨을 내뱉는 데는 성공했지만, 들이마시는데 지대한 어려움을 겪었다. 폐가 오그라들었는지 호흡이 곤란했다. 롱소드가 부러진 것을 알지 못하고 롱소드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려고 했다. 허공을 짚고 다시 쓰러졌다.

“영주님을 지켜라!”

“괴물을 막아!”

울프 용병단 3인이 길고 짧은 무기를 앞세워 달려갔다. 충성, 우정, 의리, 혹은 로벨이 쓰러지면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만용이고 끔찍한 발악이었다. 늑대의 왕은 츠바이핸더를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려 울프 용병단을 쓸어버렸다. 용병 두 명이 허리가 잘려 날아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이이이익!”

마지막 남은 한 명은 츠바이핸더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클리버(Cleaver: 직사각형 모양 단검)로 발등을 찍었다. 그러나 로벨이 수차례 시도한 바와 같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

“용기가 가상하군!”

늑대의 왕은 푸짐한 미소를 짓고 무릎으로 용병의 얼굴을 차올렸다. 용병이 뒤로 넘어가자 발을 높이 들어 발꿈치로 얼굴을 밟았다. 로벨을 따라온 마지막 울프 용병은 머리가 터져 죽었다. 울프 용병단 3인이 희생해서 고작 5, 6초의 시간을 벌었다. 그래도 로벨이 정신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로벨은 숨을 한껏 들이마신 후, 거인의 발이 쩔렁쩔렁 울리는 고함과 함께 부러진 롱소드를 던졌다.

“이 개자식아!”

로벨의 19년 인생에서 가장 험악한 욕설이었다.

늑대의 왕은 껄껄 웃으며 롱소드를 쳐내고 투척 후 비틀거리는 로벨에게 달려들었다. 로벨은 맞상대하는 대신 오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뛰었다. 오크들의 당황한 얼굴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랜드 챔피언! 싸움을 피하지 마라!”

늑대의 왕이 바짝 쫓아왔다. 로벨은 오크의 벽 앞에서 몸을 뒤를 눕혔다. 늑대의 왕이 휘두른 츠바이핸더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의 아니게 희생양이 된 오크들은 뭉텅이로 썰려나갔다.

로벨은 뒤로 넘어가며 하늘로 치솟은 오크의 목을 보았다. 달빛 사이로 붉은 피를 뿌리는 머리통이 퍽 기이했다.

로벨은 아멧이 땅에 닿자마자 옆으로 굴렀다. 늑대의 왕의 츠바이핸더가 로벨이 누운 땅을 때렸다. 늑대의 왕이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더 추태를 부릴 작정이냐! 기사라면 당당히 싸우고 패배를 받아들여라!”

로벨은 오크 시체 속에서 글레이브를 주워 늑대의 왕을 겨냥했다.

“죽지 않는 자가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 우습지 않아?”

“죽고 사는 것은 승부의 결과일 뿐. 중요한 것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과정이다.”

“그래. 네가 이겼어. 그러니까 그만 하자.”

“승자에게는 전리품이 있어야 하는 법. 그대의 목을 받아가겠다.”

“...젠장.”

늑대의 왕은 츠바이핸더를 어깨에 걸치고 다가왔다. 로벨은 부실한 글레이브를 고쳐 잡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계산해 보았다. 그런데 로벨의 계산은 항상 잘 맞지 않았다.

두두두두두...

늑대의 왕이 걸음을 멈췄다. 땅이 흔들리고 숲이 들썩였다. 두 발 달린 짐승들 때문에 잠을 못 이루던 새들이 큰 소리로 울며 둥지를 떠나갔다. 로벨은 직업상, 늑대의 왕은 경험상 익숙한 징조였다.

“기마대?”

숲 속에서 말들이 뛰쳐나왔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오베리아 산 전투마 위에는 안대를 한 아바레스터가 타고 있었다.

“저리 비켜라!”

애꾸눈은 오크들을 짓밟고 거인의 발 공터로 뛰어들었다. 어둠, 속도, 흔들림의 악조건 속에서도 정확히 늑대의 왕을 노렸다.

파앙-!

늑대의 왕 관자놀이로 철제 쿼럴이 쏘아졌다. 늑대의 왕은 가소롭다는 듯 왼손으로 쿼럴을 쳐냈다. 진짜 늑대도 흉내 내지 못할 반사신경이었다.

“또 훼방꾼인가!”

그런데 훼방꾼이 좀 많았다. 애꾸눈 볼포스 뒤로 십여 필이 말이 더 나타났다. 오크들을 짓밟으며 늑대의 왕을 향해 쿼럴을 쏘았다. 늑대의 왕은 괴성을 지르며 쿼럴을 쳐냈다. 피해는 못 줘도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그 사이 애꾸눈 볼포스가 로벨 곁에 도달했다.

“My Lord! 어서 타십시오!”

“그 말은...”

“잠시 빌렸습니다!”

로벨의 전투마였다. 전투마는 로벨을 보고 콧김을 쉬익- 쉬익- 내뿜었다. 로벨은 애꾸눈의 손을 잡고 안장 뒤에 올랐다.

“저 녀석들은...?”

“울프 용병단입니다!”

“말은 어디서 났어?”

“웨던 남작에게 빌렸습니다! 자세한 것은 자리를 피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울프 용병단은 살아남은 헤르만 백작군을 태운 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기습을 당한 오크들은 광분해서 무기를 쳐들고 울프 용병단을 뒤쫓았다. 숲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니 자칫 위험했다.

하지만 애꾸눈 볼포스는 헤르만 백작보다 10배는 더 치밀했다. 로벨은 숲길을 지나치며 좌우에 몸을 낮춘 병사들을 보았다. 애꾸눈 볼포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통과해서 헌팅 나이프를 뽑으며 소리쳤다.

“지금이다! 쏴라!”

수풀 속에 숨어있던 울프 용병단 40명과 노스폴드 시티가드 20명이 일제히 사격했다. 화살, 쿼럴, 투창, 돌멩이 등등 투사할 수 있는 무기가 총동원되었다. 무방비하게 쫓아오던 오크들은 기습 공격에 와르르 무너졌다.

“돌진해라!”

“와아아아아!”

인간과 오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벨은 극심한 피로에 애꾸눈 등에 이마를 붙였다.

“My Lord?”

로벨은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달빛도, 별빛도, 횃불도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숲 속에 늑대의 왕이 있었다.

‘안 돼...’

용병과 시티가드는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없다. 저 괴물이 참전하는 순간 전황은 순식간에 바뀔 것이다. 그러나 늑대의 왕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로벨을 향해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1대 1이다.’

로벨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비긴 거로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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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환한 아침이었다. 로벨은 반사적으로 가슴과 허리를 더듬었다. 다행히 갑옷이 그대로 있었다. 간밤에 전투가 길어져서 로벨을 꼼꼼히 챙기지 못한 모양이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 깨셨습니까?”

애꾸눈 볼포스가 피곤한 얼굴로 인사했다. 로벨은 담요를 치우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거인의 발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울프 용병단, 노스폴드 시티가드, 그리고 헤르만 백작군의 잔존병력이 뒤섞여서 폐허가 된 야영지를 헤집고 다녔다. 숨이 붙어있는 오크를 사살하고, 값나가는 전리품을 챙겼다.

“어떻게 됐지?”

애꾸눈은 피가 묻은 안대를 만지다가 미소 지었다. 젊은 시절 여자 꽤나 울렸을 미소였다.

“울프 용병단 7명 전사, 4명 부상, 시티가드 6명 전사, 5명 부상입니다. 오크 62마리를 사살했습니다. 운 좋게 살아남은 놈들은 북쪽으로 도주 중입니다.”

로벨은 숫자가 많이 나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애꾸눈 볼포스는 한 줄로 요약해주었다.

“우리의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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