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광소
47화. 광소
볼트 헤르만 백작은 올해 50살이 넘은 노(老)기사였다. 일선에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젊은 시절 몸 관리를 잘한 탓인지 후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정정했다.
“본인이 볼트 헤르만이오.”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은 화가 나서 헤르만 백작의 막사로 쳐들어갔지만, 막상 막사 안에서는 성질을 부리지 못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로 꽁꽁 싸맨 수행기사가 다섯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로벨이 롱소드가 아니라 그 무엇을 마스터해도 승산이 없었다.
헤르만 백작은 주먹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 참, 정말 올 줄은 몰랐소. 남작은 페르젠 백작의 사람이라 협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오.”
협력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협력을 요청했다. 즉, 약탈을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북부의 영주들을 돕기 위해 왔는데, 군사도, 식량도 내어주지 않아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에릭 공작도 어쩌지 못할 핑계였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평가를 떠올렸다. 집사의 말대로 음흉하고 음험한 작자였다.
“오크의 위험이 나날이 커지고 있소. 하루라도 빨리 소탕하기 위해 협조하겠소.”
오크와 싸우는데 집중하라는 뜻이고, 그 일만 협력하겠다는 뜻이다. 로벨치고는, 아니, 말 위에서 창칼 휘두르는 것 말고 관심이 없는 보통의 기사치고도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기사보다 정치가에 가까운 헤르만 백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오크 무리를 발견하는 즉시 출진할 것이니 그때까지 쉬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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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백작은 출진하지 않았다.
로벨이 합류한 이후로 몇 차례나 오크의 습격이 보고되었으나, 헤르만 백작은 추격은커녕 조사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로벨은 몹시, 정말 몹시 화가 났다. 로벨의 심기가 불편한 만큼 울프 용병단의 생활도 불편했다. 로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용히 밥을 먹고, 조용히 술을 마시고, 조용히 잠을 잤다.
로벨은 거인의 발 외곽에서 수도사처럼 정좌하고 숲을 노려보았다. 오크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는 자세였다. 앳된 용병은 그런 로벨의 눈치를 살피며 투덜거렸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온 거죠?”
“몰라서 물어? 삥 뜯으러 왔잖아.”
천박하지만 정확한 평가였다.
과묵한 몬트가 쿼럴의 촉을 숫돌로 갈며 말했다.
“오래 못 가.”
“뭐가요? 제 목숨이요?”
과묵한 몬트는 날카롭게 날이 선 쿼럴은 햇빛에 비춰보고 전통에 넣었다. 아직도 갈아야 할 쿼럴이 19개나 있었다.
“늑대와 승냥이는 함께 살지 못해.”
“엥? 우리랑 승냥이요?”
과묵한 몬트는 관용적인 표현이 잘못 쓰였음을 깨닫고 정정했다.
“...잉어와 오크 말이야.”
다음날. 과묵한 몬트의 예언대로 일이 터졌다. 헤르만 백작군의 수색부대, 정확히는 약탈부대가 오크와 조우해 과반수가 죽거나 사로잡혔다. 사실, 죽은 병사나 사로잡힌 병사나 오크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한가지라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오크가 몸값을 요구할 리 없으니까.
“서른 마리! 서른 마리가 넘었습니다!”
살아 돌아온 용병이 처절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무기는 도망치면서 내다 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갑옷은 피에 젖어서 본래 붉은색이라 해도 믿어줄 정도였다. 헤르만 백작의 주름이 굵어졌다.
“오크의 본대가 나타났군.”
헤르만 백작의 기사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우리 위치가 탄로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봐야 30마리 아니오.”
“30마리가 전부라고 확신할 수 있소?”
“우선 수색대를 불러들여야 합니다!”
로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크의 숫자, 위치, 무장상태 등을 알지 못하니,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기프 베일 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로벨 경, 오크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시오.”
“...적의 숫자가 이제야 궁금하시오?”
로벨의 조롱에 기프 베일 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로벨은 머리가 텅 빈 수행기사들을 무시하고 헤르만 백작에게 조언했다.
“아군의 위치가 탄로 났소. 약탈 보낸 병사들을 모아 노스폴드 시티 남쪽으로 이동해야 하오.”
유독 호전적인 기사가 칼자루를 쥐고 항의했다.
“오크 따위를 피해서 도망치란 말이오?”
“오크가 휘두른 칼도 맞으면 아프오.”
로벨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했지만, 헤르만 백작의 수행기사들은 격렬하게 반박했다. ‘인간은 위대하고 우리군은 더욱 위대하니 오크 따위는 100마리가 덤벼도 문제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칼솜씨는 어떤지 몰라도 전술적인 능력은 로드릭 마을 꼬마대장보다 못했다.
“그만! 그만하라! 로벨 경도 그쯤 하시오! 경의 조언대로 병력을 소집하겠소.”
“시간이 없소. 서둘러야 하오.”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소. 우선 복귀명령을 내리도록 하겠소.”
로벨은 하나부터 열까지 마뜩치 않았다. 몇 마디 더 충고했으나, 외부인, 그것도 페르젠 백작파의 말을 따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야영지로 돌아와 과묵한 몬트를 불렀다.
“처음부터 오크와 싸울 생각이 없었어.”
“저도 그리 보았습니다.”
로벨은 롱소드의 폼멜을 만지작거렸다. 로벨의 측근인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라면, 로벨이 피를 뿌릴 작정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누구의 피일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노스폴드 시티로 가서 도움을 요청해.”
과묵한 몬트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와주겠습니까?”
“안 되면 울프 용병단만이라도 빼내 와.”
계약위반이 될 수 있지만, 오크를 퇴치한다면 무마 가능할 것이다. 과묵한 몬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야영지를 빠져나갔다. 로벨은 남은 용병들을 한 곳에 모으고 전투를 준비했다.
‘오늘밤, 늦어도 내일 중에 공격할 거야.’
로벨의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해가 저물자 300마리의 오크가 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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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겁 없이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온 오크의 목을 찌르고, 발로 걷어차 다시 뽑았다. 그리고 피를 뿜으며 나자빠지는 오크의 뒤를 따라 막사 밖으로 나왔다.
초병이 당했는지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나팔과 북 대신 처절한 비명이 습격을 알리고 있었다.
“울프 용병단! 울프 용병단!”
“여, 여기입니다!”
헤르만 백작군의 야영지가 엉망이 되었다. 헤르만 백작도 나름대로 전투태세를 갖추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 자릿수의 오크를 막을 수준은 아니었다.
“영주님! 오크 숫자가 너무 많아요!”
로벨도 오크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100마리, 아무리 많아도 150마리 정도라 생각했다. 그 이상이면 보급 때문에 장기간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인간의 기준으로 오판했다. 식인을 하고, 날것을 취급하는 오크에게 보급은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거인의 발 공터를 채운 발소리는 예상한 것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저 많은 놈들이 어디 숨어있었던 거야?”
“헤르만 백작의 막사로 가자!”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거인의 발 중앙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발가벗은 오크 한 마리가 기습했으나, 울프 용병단의 일제사격으로 바늘꽂이가 되어 쓰러졌다.
로벨은 오크의 이마 한가운데 박힌 쿼럴을 뽑아 앳된 용병에게 던져주었다.
“실력이 늘었네?”
“에헤헤, 감사합니... 꾸륵...”
앳된 용병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입술 사이로 소리 대신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두 눈이 공포와 의심으로 물들었다. 로벨은 앳된 용병 어깨너머로 숏보우를 겨냥한 오크들을 보았다.
“...제길!”
로벨은 화살 맞은 앳된 용병을 눕히고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오크들은 섬세하지 못한 손가락으로 새 화살을 장전했지만, 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로벨이 시위와 함께 오크의 목을 베었다.
로벨을 따라 돌진한 울프 용병단이 좌우의 오크를 상대했다. 로벨은 정면으로 치고 올라갔다. 우물 뚜껑을 방패삼은 오크를 어깨로 밀쳐 쓰러트리고, 허리 뒤에서 대거를 뽑아 목을 찔렀다. 그리고 앞으로 구르며 글레이브를 치켜든 오크 아랫배에 롱소드를 박아주었다.
“제길. 제길. 제길...!”
로벨은 바이저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핏물을 닦다가 잘 안 되자 위로 올렸다. 전장의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헤르만 백작이 도망칩니다!”
“뭐?”
로벨은 용병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전투현장 속에서 대여섯 필의 말이 떠나고 있었다. 마침 가까이 있는 화톳불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헤르만 백작과 수행기사들이었다.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로벨은 잇소리를 냈다. 물론 겁이 날만 했다. 인간과 싸울 때는 항복 후 몸값을 내고 풀려날 수 있지만, 몬스터를 상대로는 거래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기사라면 저래서 안 돼!’
로벨은 버려진 헤르만 백작군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십여 명이 남아 있었다. 로벨은 땅에 떨어진 횃불을 주어서 머리 위로 흔들었다.
“이쪽으로 모여! 이쪽이야!”
로벨의 뜻을 따라 울프 용병단도 무기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쪽이다!”
“살고 싶으며 여기로 와라!”
한 사람의 외침은 힘이 없지만, 두 사람, 네 사람, 열 사람이 되자 점차 힘이 되었다. 로벨은 숨을 헐떡이는 용병들로 대열 짰다.
“어깨를 모아! 바짝 붙어! 방패를 높이 들고 옆 사람을 지켜!”
인간이 한 곳에 모이자 오크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크의 앙상한 화살이 간간이 날아왔다. 울프 용병단은 크로스보우의 등자를 밟고 장전해서 응사했다.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믿고 선두에서 화살을 쳐냈다. 화살과 화살이 엇갈리고, 창과 창이 부딪치고, 그 아래로 핏물이 실개천이 되어 흘렀다.
“기사 나리, 모이라고 해서 모이긴 했는데, 무슨 뾰족한 수가 있습니까?”
“...아니.”
“그럴 줄 알았수다. 젠장! 기사란 것들은 하나같이 뇌가 텅텅 비어 가지고...”
“이 자식아! 말조심해!”
“다 같이 죽을 마당에 조심할 게 뭐 있냐?”
“뭐, 혼자 죽는 것보단 낫네.”
헤르만 백작군과 울프 용병단은 소속을 넘어서 유대감을 쌓았다.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로벨은 피 때문에 미끌미끌한 롱소드를 고쳐 잡고 말했다.
“어쩌면 지원군이 올 거야.”
“어디 믿는 구석이 있나 봅니다?”
“응. 그러니까 좀 더 버텨.”
로벨은 용병들을 격려했다. 어느덧 주위가 고요해졌다. 비명도, 고함도, 욕설도 잦아들고, 오크 특유의 숨소리와 화톳불 타는 소리만 남았다. 100명이 넘는 헤르만 백작군이 로벨이 끌어모은 10여 명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로벨과 생존한 용병들 주위로 오크가 포위를 좁혀왔다. 숫자가 꽤 줄었지만, 그래도 200마리 이상 남아있었다.
‘정말 괜히 왔나?’
로벨은 어린 집사의 만류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어린 집사 말대로 사서 고생 중이었다.
‘애꾸눈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
애꾸눈 볼포스가 지원 온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설령 온다고 해도 노스폴드 시티의 울프 용병단은 50명뿐이었다. 오크 군대를 물리치기는 역부족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일 뿐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크하하하하핫!”
오크 무리 뒤에서 쩔렁쩔렁한 광소(狂笑)가 흘러나왔다. 오크의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웃음도 아니었다.
“인간치고 대단한 놈이 하나 있다 했더니만, 그게 바로 너였군!”
로벨은 귀를 의심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쉬이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윽...”
오른쪽 팔뚝이 욱신거렸다. 오크에게 맞은 멍 때문만은 아니었다.
키 작은 오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수백 년 묵은 나무가 두 발로 걷는 느낌이었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횃불로는 가슴 높이까지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위의 어둠 속에서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오랜만이다.”
로벨은 롱소드를 조금 떨구었다.
“늑대의 왕... 리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