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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46화 (46/605)

46화. 비열함

46화. 비열함

“하아... 하아...”

로벨은 체력단련을 건너뛰고, 검술연습만으로 ‘간단히’ 아침훈련을 끝냈다. 몸 상태가 나쁘거나, 일정이 바빠서가 아니었다. 성 안에 사람이 많아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울프 용병단과 마을 청년들을 내보내기 전에는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 없을 듯했다.

로벨은 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끈적끈적해진 롱소드의 그립도 닦았다. 그러다 문뜩 이 빠진 칼날을 보았다.

“정말 많이 상했네...”

숫돌로 갈고, 기름도 칠하는데, 예전 같은 예기가 나지 않았다. 검의 수명이 끝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긴, 뼈와 갑옷을 그렇게 때려댔으니 지금껏 버틴 것이 용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수평으로 눕히고 크로스보우를 조준하듯 칼날의 굴곡을 살폈다. 알게 모르게 흠집이 많았다. 스톤헤드 요새의 대장장이 말대로 아예 녹여서 새로 만드는 편이 좋을 듯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검집에 밀어 넣고 새로운 애병을 장만할 방법을 고심했다. 고급 진 손맛에 적응해서 아무 무기나 쓰지는 못할 듯했다. 그때 훈련장으로 누가 들어왔다.

“영주님! 영주님! 빨리 나와 보세요!”

울프 용병단과 영지민을 통틀어 600명이 넘는 휘하 사람들 중에서도 이처럼 경쾌하고 경박하고 경계심 없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왜?”

“군대가 왔어요! 군대! 100명이 넘어요!”

어린 집사가 성 밖을 가리켰다.

“페르젠 백작군이 벌써 왔다고?”

“페르젠 백작이 아니에요!”

로벨은 어린 집사 손에 끌려서 성 밖으로 나갔다.

로드릭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성문 앞 언덕길에 어깨에 붕대를 감은 펄프 대장과 일전에 로벨이 쓰던 목발을 짚은 외팔이 더치를 비롯해 울프 용병단이 전원 모여 있었다. 성의 주인이 나왔는데 인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로벨은 소심하게 삐치는 대신 먼저 인사하는 대인배의 풍모를 보였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뭣? 넌 저걸 보고도 좋은 아침 소리가 나... 오지요! 좋은 아침이구 말구요, 영주님!”

울프 용병단은 뒤늦게 로벨의 등장을 알고 인사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제일 앞으로 나가 대체 뭘 보느라 정신 놓고 있는지 확인했다.

척! 척! 척! 척!

로드릭 마을 앞으로 어린 집사가 말한 ‘군대’가 행군하고 있었다. 세 자릿수의 인원이 뱀처럼 꾸물꾸물 움직이고, 우마가 끄는 수레들이 덜컹거리며 따라갔다. 하늘 높이 솟은 창날이 아침 햇살에 번쩍번쩍 빛을 뿌렸다.

로벨은 반사광에 눈을 찌푸리고 깃수를 찾았다. 가장 높이 들린 깃발에 역동적으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로벨 등은 수산물과 인연이 없어 잘 모르지만, 경험 많은 낚시꾼이라면 잉어라고 말할 것이다.

로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볼탄 반도의 수백 개가 넘는 가문 중에서, 저만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가문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런 대가문 중 물고기 문장을 쓰는 가문이라면...

“헤르만 백작?”

“호수성의 주인 말입니까?”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봉신으로 페르젠 백작과 쌍벽을 이루는 권력자였다.

“헤르만 백작이 여기 왜 와요?”

“글쎄.”

“으으... 불안한데요?”

그리고 페르젠 백작의 정적이기도 했다. 페르젠 백작의 사위가 될 뻔한 로벨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로벨은 롱소드를 소드 벨트에 걸고 소드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그때 헤르만 백작군 행렬에서 기수 한 명이 이탈해 로드릭 성으로 달려왔다. 펄프 대장은 멀쩡한 오른손을 위로 들었다. 신출내기 울프들은 크로스보우 몸체에 쿼럴을 올리고 견착했다. 이 거리에서 맞힐 거라 기대하지 않지만, 경고 정도는 될 것이다. 헤르만 백작의 기사는 울프 용병단의 뾰족한 경고를 받아들여 30야드 밖에서 멈춰 섰다.

“로벨 로드릭 경! 본인은 볼트 헤르만 백작님을 수행하는 기프 베일이라하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소리쳤다.

“기프 베일 경! 우리 영지에는 무슨 일이오?”

“헤르만 백작님의 전언을 가지고 왔소! 무기를 거둬주시오!”

로벨은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울프 용병단은 안도하며 크로스보우를 내렸다.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울프 용병단이라도 100명이 넘는 군대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기프 베일 경은 천천히 성문으로 다가왔다.

“로벨 로드릭 남작이오?”

“그렇소.”

“하핫! 명성 높은 그랜드 챔피언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용건은?”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를 누르며 말을 잘랐다. 기프 베일 경은 까칠한 반응에 머쓱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느 영주라도 자신의 땅에 군대가 들어오면 경계할 것이다. 기프 베일 경은 이해심을 발휘해서, 혹은 울프 용병단의 험악한 인상을 존중해서 곧장 목적을 밝혔다.

“우리 헤르만 백작군은 북방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사악한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 출병했소. 경을 비롯한 이곳 영주들에게 위해를 가할 의도는 없소.”

로벨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어린 집사는 로벨이 순진무구해서 평복으로 도시에 보내면 하루 만에 사기당할 거라 굳게 믿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기프 베일 경은 헬름에 눌린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이곳 지리에 밝은 안내인과 군사작전을 위한 보급품이 필요하오.”

병사와 식량을 내놓으란 뜻이었다.

로벨은 나지도 않는 수염을 다듬는 척하며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을 힐끔 보았다. 어린 집사는 고개를 가로젓고, 펄프 대장은 작게 끄덕였다.

헤르만 백작의 군대라 해도 근본은 용병들이었다. 굶주리면 언제든지 도적이 될 수 있었다. 영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도, 식량을 주는 것도 옳은 방책이었다.

“저 군사는 헤르만 백작이 직접 지휘 중이오?”

“그렇소.”

“그렇다면 백작의 뜻을 존중해 나와 내 군사들도 참전하겠소.”

어린 집사가 얼굴근육을 총동원해서 반대의견을 표시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펄프 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오! 무명이 자자한 그랜드 챔피언이 함께한다면 우리군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이오!”

“과찬이오. 준비를 마치는 대로 합류하겠소. 집결지를 알려주시오.”

“노스폴드 시티 북서쪽 거인의 발이오. 모레 아침까지 주둔하니, 늦어도 제3시까지는 합류해야 하오.”

기프 베일 경은 흉갑에 주먹을 붙여 경의를 표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어린 집사가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왜?”

“왜요? 왜라니요? 그냥 ‘미안하다’ 한마디 하면 될 일을 왜 자처해서 고생해요? 오크 따위 잡아봐야 돈도 안 나오잖아요? 그리고 헤르만 백작이라고요! 저 백작이 얼마나 음흉한데요? 페르젠 백작도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살 떨리는데...”

로벨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말했다.

“좋게 생각해. 오크들은 우리한테도 위험이잖아? 100명이나 되는 군대가 생겼으니까 함께 물리치는 거지.”

“그 군대를 보낸 의도가 의심스럽다고요.”

@

로벨은 부상당한 펄프 대장을 대신해 과묵한 몬트를 대장 삼고 수행원 5명을 선별했다. 나름대로 전투수당이 나오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꼼꼼하게 정비해서 갖춰 입었다. 오크에게 망치질 당한 오른쪽 팔뚝이 조금 쓰라릴 뿐 나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갑옷 매듭을 최종 확인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네요.”

“어제 그제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어린 집사는 입술을 삐쭉이고 신신당부했다.

“싸움은 헤르만 백작 용병들한테 맡기고, 영주님은 뒤에서 구경만 하세요. 돈도 안 되는 일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어요.”

“나도 싸우는 거 안 좋아해.”

“어디서 거짓부렁을...”

로벨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린 집사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나저나 헤르만 백작이 착한 일을 할 것 같지 않은데요. 우는 아이의 뺨을 때려서 사탕을 빼앗을 작자라던데...”

“그도 기사잖아.”

로벨은 무턱대고 의심하지 좀 말라고 타박하고 메인 홀을 지나 성 밖으로 나갔다. 과묵한 몬트 이하 5인 용병이 무장하고 대기 중이었다. 펄프 대장이 마구간에서 전투마를 끌고 나왔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나 알잖아.”

“아무리 대단한 기사도 재수가 없으면 돌부리에 채여 죽을 수 있습니다.”

펄프 대장은 상처가 쓰라린지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영주님, 영주님은 칼부림하는 120명의 잡놈들과 땅 파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500명의 무지렁이를 책임지고 계십니다.”

로벨은 전투마에 올라 아멧과 랜스를 받았다. 그리고 정수리에 흰머리가 성성한 펄프 대장을 내려다보았다. 로벨의 글 선생이자 어린 집사의 조부였던 늙은 집사가 떠올랐다.

“너희는 잡놈이 아니야. 내 영지민도 무지렁이가 아니고. 하지만 충고는 새겨들을게.”

마녀 키르케는 주인을 따라가려는 아야와 이야카를 꼭 붙들고 말했다.

“저 심심하니까 빨리 다녀오세요!”

로벨은 성문 밖으로 전투마를 몰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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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아침 산책이라도 나온 듯 한가한 기분으로 흙길을 걸었다. 로드릭 마을과 노스폴드 시티 사이의 길은 수시로 지나다니는 길이라 지난 전쟁 때처럼 출병이란 느낌이 없었다. 혹은 쉬지 않고 쫑알거리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음...”

로벨은 과묵한 몬트와 신출내기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과묵한 몬트는 별명대로 말이 많지 않았다. 2년 넘게 함께하면서 세 마디 이상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하고는 죽이 좀 맞는 것 같은데, 그 외에는 딱히 친하게 지내는 동료도 없었다.

“조용합니다.”

그런 과묵한 몬트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로벨은 생각을 읽힌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역시 그렇지?”

과묵한 몬트는 뭔 소리냐는 듯 로벨을 올려다보고 다시 말했다.

“이 시기면 행상인이 자주 보여야 합니다. 헌데 반나절이 지나도록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로벨은 과묵한 몬트의 긴 대사에 우선 놀라고, 이어서 내용에 다시 놀랐다.

“오크 때문일까?”

“헤르만 백작 같습니다.”

로벨은 헤르만 백작과 행상인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로벨은 명예로운 기사였기 때문이다.

노스폴드 시티 북서쪽. ‘거인의 발’이라 불리는 숲속 공터에 도착하는 순간 과묵한 몬트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으하하핫! 월척이야! 월척!”

“오호, 그거 우리 백작님이 좋아하는 표현이잖아?”

“크흐흐흐흑! 그만 웃겨!”

아침부터 술에 취한 용병들이 왁자지껄 웃고 떠들었다.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용병들 발아래에는 용병일에 필요하지 않은 값비싼 물건들, 그러니까 면포, 도자기, 기름, 와인통 등이 쌓여 있었다. 저 물건들이 어디서 났을지 일목요연했다.

“이놈들이...”

로벨의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헤르만 백작은 노스폴드 시티를 오가는 행상인을 약탈하고 있었다. 때마침 로벨 일행을 발견한 기프 베일 경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오! 로벨 남작! 마침 잘 오셨소! 지금 막 수색대가 성과를 올리고...”

“이게 무슨 짓이오.”

로벨이 노기를 띠자 기프 베일 경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무엇이 말이오?”

“저자들은 병사가 아니라 도적이오? 자유도시의 상인을 약탈하다니!”

“약탈이 아니라 징발이오. 전시에는 당연한 일이잖소?”

전시물자 징발은 불법이 아니었다. 로벨도 전쟁 중에 필요하다면 식량과 자재를 징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다. 몬스터 토벌을 빌미로 정적인 페르젠 백작파 지역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는 속셈이 너무 빤히 보였다. 치졸하고, 치사하고, 비열했다.

“볼트 헤르만 백작은 어디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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