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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45화 (45/605)

45화. 도움

45화. 도움

울프 용병단이 웅성거렸다. 병기술이 좋고 실전경험이 많은 용병들은 소금광산과 노스폴드 시티로 보낸 터라 로드릭 성에 남은 용병들은 대부분 신출내기였다. 올해 막 15살이 된 앳된 용병도 그러했다.

“머, 머, 뭐죠? 마, 마, 마을 사람인가?”

“어디야! 어느 쪽이야!”

로벨은 주먹을 번쩍 들어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앙상한 숲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용병들도 덩달아 바람 소리에 집중했다.

“으아아악-!”

나무 사이로 단말마가 울렸다. 로벨은 용병 중 최고참인 코골이 바디에게 명령했다.

“전열을 갖추고 따라와. 위치를 계속 알리고.”

“위치는 어떻게...”

“노래해!”

로벨은 대수롭지 않게 명령하고 전투마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이랴!” 기사와 기사의 말은 그늘진 나무 사이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뒤에 남겨진 용병들은 멍청하게 서로를 보았다.

“노래... 할까요?”

“허, 참나. 용병생활 7년 차에 별짓을 다 하는군.”

코골이 바디는 투덜거리면서 무슨 노래를 불러야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지 고민했다.

@

로벨은 로드릭 성의 유일한 기수답게 첨병을 자처했다. 용감하지만 무모한 행동이었다. 큼직한 나무를 몇 개를 지나자 비명의 주인이 보였다.

로벨은 기다란 랜스가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게 신중히 랜스 레스터에 걸었다. 숲에서 말을 타는 것도 대단한 기술인데, 랜스까지 다루는 것은 기술을 넘어 기예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락거린 숲이고, 잡목이 우거지지 않은 봄철이라 가능했다.

“숙여!”

로벨은 로드릭 마을 청년을 향해 소리쳤다. 마을 청년은 뾰족한 랜스와 우람한 전투마를 보고 즉시 엎드렸다. 그러나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청년을 뒤쫓던 오크들도 비슷한 자세로 몸을 던진 것이다. 가슴 높이를 겨냥한 랜스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고, 로벨과 전투마는 뻘쭘하게 청년과 오크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

로벨은 급히 전투마를 세웠다. 아멧 속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랜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이래 최악의 수치였다.

로벨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2차 돌격하는 대신 그냥 전투마에서 내렸다. 무용해진 랜스를 팽개치고 오크 피를 잔뜩 마신 롱소드를 뽑았다.

오크들은 주섬주섬 일어나서 눈치를 보았다. 로벨의 번쩍이는 갑옷에 기가 죽은 듯 섣불리 덤비지 않았다. 사슬로 강화된 아밍 더블릿 위에 판금을 덧씌운 컴포지트 아머였다. 오크의 조잡한 무기로는 생채기 하나 내기도 힘들었다.

“뀌이익! 뀌익!”

“뀍!”

오크들은 뒷걸음치다가 거리가 생기자 몸을 휙- 돌려서 달아났다. 로벨은 섣불리 쫓지 않고 마을 청년을 우선 챙겼다.

“괜찮아?”

“여, 영주님!”

“펄프 대장은 어디 있지?”

“모, 모르겠습니다. 괴물이 나와서, 양조장, 양조장 데니를 죽이고, 다들 흩어졌습니다.”

오크의 기습에 놀라서 뿔뿔이 흩어졌다는 뜻이었다.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는 노련한 용병이니 그들을 믿고 응집했으면 차라리 안전했을 텐데, 피와 죽음과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킨 모양이다.

“어느 쪽이야?”

“저쪽... 아니, 저쪽입니다.”

오크들이 도망친 방향이었다. 로벨은 전투마에 다시 올라 말했다.

“노랫소리를 따라가. 울프 용병단이 보호해줄 거야.”

“노래요? 아, 예!”

“...그리고 아까 본 것은 잊어.”

“예? 뭘 잊으라고요?”

“...아냐. 못 봤으면 됐어.”

로벨은 롱소드를 고쳐 쥐고 오크들을 추격했다. 숲이 우거지기 시작해서 더 이상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을 청년의 고함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혹시 허공에 창질한 것 말씀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젠장.”

@

로벨은 말을 몰아 2분 만에 오크를 따라잡았다. 그런데 마을 청년을 쫓을 때와 달리 숫자가 크게 불어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오크만 아홉 마리, 헐벗은 나무들 뒤로 몇 마리가 더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로벨은 말머리를 돌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이 말라비틀어진 물푸레나무를 방패 삼아 저항 중이었다. 로벨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도와줄까?”

“My Lord!”

“영주님이 오셨다! 살았다!”

도와달라는 뜻이 분명했다.

로벨이 그랜드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챔피언이자 검술 학회의 공인을 받은 소드 마스터라 해도, 근육질의 오크 두 자릿수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벨에 대한 신뢰가 옛 신의 신앙 수준인 외팔이 더치와 과묵한 몬트는 만세를 부를 기세로 좋아했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롱소드를 단단히 잡았다.

“이것도 데자뷰인가?”

“하하... 아닐 겁니다.”

장소와 상황이 2년 전 조지 도트넘 자작과 싸울 때와 비슷했다. 차이점은 농민병과 비교가 안 되게 사나운 오크들이 적이란 것이다.

“뀌이이익!”

오크 중에도 지휘관이 있는지 명령을 내렸다. 오크 세 마리가 인간에게서 약탈한 무기를 꼬나 들고 다가왔다. 로벨은 걸음을 옮겨 크고 굵은 참나무를 등졌다. 다수와 싸울 때는 포위당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오크는 그러거나 말거나 칼끝이 휘어진 숏소드를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로벨은 두 팔을 안쪽으로 당겼다가 번개처럼 내찔렀다.

로벨의 롱소드는 오크의 싸구려 숏소드보다 길고,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값비싼 정향유로 매일매일 손질한 보람이 있어 오크의 목을 단번에 꿰뚫었다. 오크의 굵은 입술 사이로 침이 섞인 피거품이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로벨은 롱소드를 45도 비틀어 상처를 벌린 후 사뿐히 빼냈다. 쓰러지는 숏소드 오크 뒤로 벌목용 도끼와 대장간 망치를 가진 오크가 달려들었다. 로벨은 롱소드를 비스듬히 올려 도끼를 흘려보내고, 어퍼 뱀브레이스(Upper Vambrace: 상박 보호대)로 망치를 막았다. 상완골이 찌릿찌릿했다. 내일 아침이면 주먹만한 멍이 들 것이다. 그래도 부러지지 않았으니 성공이다. 롱소드의 손잡이를 내밀어 가드(Guard: 손목 보호대)의 뾰족한 끝으로 벌목도끼 오크의 눈알을 찔렀다. 인간보다 터프한 오크도 눈알이 터지면 침착하기 힘들었다. 오크는 얼굴을 감싸 쥐고 알아듣기 힘든 말로 울부짖었다.

“저리 가!”

로벨은 외눈박이가 된 오크의 배를 걷어차고, 재차 망치를 휘두르는 친구 오크의 안면을 폼멜(Pommel: 손잡이 끝에 달린 무게추)로 찍었다.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지만, 주먹과 달리 통짜 쇳덩어리였다. 코가 부러지고 윗입술이 터졌다. 로벨은 코 깨진 오크를 밀어내고 롱소드를 수평으로 휘둘러 목을 잘랐다. 이어서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외눈박이 오크의 머리도 쪼개주었다.

설명이 길었지만, 실제 행동은 숫자 셋을 천천히 셀 동안에 끝났다. 조금 과장해서, 눈 한번 깜박하는 사이 오크 세 마리를 쓰러트렸다.

“역시! 우리 기사 나리야!”

“흠!”

외팔이 더치가 사기 백배해서 가까이 온 오크의 머리를 핸드 액스와 바클러로 번갈아 후려쳤다. 과묵한 몬트도 빌(Bill: 창끝이 뾰족하지 않고 갈고리 모양인 창)을 좌우로 휘둘러 오크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창날 안쪽으로 억지로 파고들면 펄프 대장이 숏소드를 아무 곳에나 담가 주었다. 오크 셋을 해치웠지만, 펄프 대장은 어깨를 베이고, 외팔이 더치가 허벅지에 칼침을 맞았다.

펄프 대장은 겨드랑이를 축축하게 적시는 자신의 피에 진저리치고 물었다.

“영주님, 설마 혼자 오신 겁니까?”

“아니!”

“그럼 함께 온 잡놈들은 어디 있습니까요!”

“거 말이 좀 심하네!”

코골이 바디가 항의했다. 가래 낀 탁한 목소리가 오늘만큼은 짝사랑하는 여자의 목소리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펄프 대장 이하 분전 중인 용병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파비스 설치!”

코골이 바디가 의기양양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울프 용병단은 코골이의 지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활 가진 놈도 없는데 뭔 놈의 파비스야! 그냥 조준!”

신출내기 용병들은 흥분과 긴장이 반반씩 섞인 얼굴로 크로스보우를 견착했다. 투사무기가 없는 용병들은 백병전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오크들은 갑자기 불어난 인간 숫자에 당황해서 물러났다. 그 덕분에 포위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던 로벨은 한숨 돌리고 화살 범위 밖으로 피할 수 있었다.

“발사!”

로벨의 안전이 확보되자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5발의 쿼럴이 작은 공터를 가로질렀다.

“뀌익?”

그리고 놀랍게도 5발이 모두 빗나갔다. 크로스보우맨으로 훈련받은지 한 달이 채 안 된, 더욱이 실전이 처음인 신출내기들이었다.

“...기대도 안 했다.”

“에잇! 남자는 백병전이야! 돌격! 돌격 앞으로!”

로벨은 한숨을 쉬고 다시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래도 코골이 바디의 합류로 수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크들은 기세에서 밀리자 줄행랑을 쳤는데, 그 숫자가 셋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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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피해가 제법 컸다. 양조장 차남 데니를 포함해 마을 청년 세 사람이 살해당했다.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도 부상을 입었다. 녹슬고 더러운 오크의 무기는 독이나 마찬가지라 상태가 안 좋았다. 마녀 키르케는 약초를 바르고 버섯 끓인 물을 배터지게 마시게 했다. 외팔이 더치는 버섯물을 한 사발 비우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거 맛이 이상한데? 꼭 걸레 빤 물 같아.”

마녀는 움찔하더니 시선을 15도쯤 아래로 돌렸다.

“아, 아닙뎁염?”

“...발음이 왜 그런 거요? 왜 자꾸 눈을 피해! 이 사악한 마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이제 용서할 수 없다!”

외팔이 더치는 부상자답지 않게 펄펄 뛰었다. 마녀 키르케는 도망가며 장난이라고 소리쳤다. 한참 뒤에 펄프 대장도 똑같은 처방을 받는 것을 보고 겨우 진정했다. 한편, 로벨은 어린 집사의 도움을 받아 컴포지트 아머를 벗으며 심각하게 의논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야. 지휘체계도 있고. 무기도 인간이 쓰는 것이 많아.”

“그럼 저번 고블린 때랑 다른가요?”

“응. 아무래도.”

오크 무리가 아니라 오크 군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험할까요?”

“아마도.”

로벨은 망치에 맞은 상완갑을 풀며 인상을 찌푸렸다. 살갗이 저린 것이 벌써 멍이 생긴 모양이다.

“그럼 어쩌죠? 울프 용병단 불러올까요?”

로벨은 안장주머니에서 꺼내온 계약서와 계약금을 보여주었다. 어린 집사의 우울한 표정이 싹- 걷혔다.

“기사라면 신의를 우선해야죠. 암.”

로벨은 소리 없이 웃었다. 어린 집사도 외팔이만큼이나 알기 쉬운 성격이었다.

“우선 수비태세를 갖추자. 말이랑 양을 성 안으로 들이고 북쪽 경계를 강화해.”

“그걸로 충분할까요?”

“그리고 도움을 청해야지.”

로벨은 오른팔을 주무르며 펜과 종이를 꺼냈다. 인근의 영주들이 보유한 병사는 30명이 채 되지 않을 테니, 거리가 좀 멀어도 제대로 된 군대를 가진 페르젠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을 보내온 것은 로벨과 어린 집사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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