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4화 (44/605)

44화. 불안

44화. 불안

볼탄 반도 사람은 봄과 가을을 좋아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봄과 가을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의견이 조금 갈린다. 먹거리만 보면 가을이 더 풍요롭지만, 그 속에는 황량한 겨울이 담겨있었다. 반면 봄은 풍성한 여름과 풍족한 가을의 전주곡이었다. 정말 풍족할지는 옛 신과 영주만이 알겠지만... 아무튼 봄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로벨은 전투마를 찾아 노스폴드 시티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성문 가까운 곳에서 2인조 행상인과 씨름하는 낯익은 말을 발견했다.

“야! 꽉 잡아! 날뛰지 못하게 하라고!”

“자, 잡고 있어!”

로벨은 뭘 하려는 건지 잠시 두고 보았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피부 트러블이 많았는지 얼굴이 울퉁불퉁한 땅딸보가 전투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 썼다.

“이놈의 말이 왜 이리 말을 안 들어?”

“푸히힝! 히힝!”

그 옆에 키는 크지만 잘 먹지 못해 삐쩍 마른 멀대가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혀, 형! 이거 기사의 말이야. 여기 봐. 귀족의 인장이 있잖아. 그냥 놔 두자. 응?”

“야, 임마! 미쳤냐? 이놈은 오베리아 산 전투마야. 제값에 팔면 1천 페닝은 거뜬히 나온다고!”

“그치만...”

“이번 장사도 공쳤는데 이놈이라도 건져야지. 인장? 그깟꺼 인두로 지지면 돼! 그럼 누구 말인지 누가 알아?”

“내가.”

마지막 말은 2인조의 대사가 아니었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걸치고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기, 기사다!”

“아니, 그게 아니라, 기사 나리...?”

로벨은 크고 작은 행상인 형제를 번갈아 보았다. 허리에 대거를 한 자루씩 차고 있지만, 그 정도야 각박한 볼탄 반도 인심에서 최소한의 호신수단이고, 그 외에 무기나 방어구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전문적인 도적은 아니었다. 로벨은 우연히 전투마를 발견했고, 잠깐 욕심내었다고 이해해주기로 했다.

“내 말이야.”

여기서 “어이구! 몰랐습니다! 어서 가져가십시오!” 라고 했다면 상당히 좋게 끝났을 텐데, 땅딸보의 욕심이 좀 과했다.

“나, 나리의 말이란 즈, 증거가 있습니까요? 이놈은 우, 우리가 키운 말입니다!”

로벨은 입술을 둥글게 모아 오! 소리를 내었다. 행상인치고 용감했다. 그러나 똑똑하진 않았다.

“증거?”

로벨은 몸으로 증거를 보여주었다. 주먹을 가볍게 말아쥐고 땅딸보의 얼굴을 빠르게 어루만졌다. 말 그대로 가볍고 재빠른 잽(Jab)이었다.

“으헉!”

땅딸보는 얼굴을 감싸고 쓰러졌다. 피가 왈칵 쏟아지는 것이 엄살이 아니었다. 가벼운 잽이라도 강철 컨틀렛이 씌워져 있으면 사정이 달랐다.

로벨은 피 묻은 손을 한번 털고 롱소드를 천천히 뽑았다. 스르릉- 칼날이 칼집을 스치는 소리가 솜털을 곤두세웠다. 코가 주저앉은 땅딸보는 비로소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이고! 기사 나리!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회까닥 돌았나 봅니다! 살려주십시오!”

로벨은 롱소드를 늘어트리고 잠깐 고민했다. 오랜 관습법에 따르면 말도둑은 즉결처분이었다. 이곳이 로드릭 영지라면, 혹은 말을 훔치는 광경을 목격했다면, 로벨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목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자유도시였고, 행상인은 도망친 말을 찾았을 뿐이었다. 죽여도 되는지 알쏭달쏭했다. 로벨은 고심 끝에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다.

“...팔 하나만 자를까?”

“아이고오오! 나으리이이!”

행상인 형제가 생각할 때는 적당하지 않은 모양이다. 땅딸보는 로벨의 발등 앞에 납작 엎드려 애원했고, 멀대는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 펄프 대장이라면 코웃음치고 걷어찼겠지만, 마음 약한 로벨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아, 알았어. 저리 가. 내 갑옷에 피 묻히지 마.”

로벨은 행상인을 내버려두고 전투마를 살폈다. 전투마는 주인을 알아보고 콧김을 뿜으며 애교부렸다. 로벨은 혼자 도망친 전투마가 괘씸했지만, 주인이 찾아왔다고 “푸릉! 푸르릉!” 하면서 얼굴을 부비적거리니 화낼 기분이 들지 않았다.

로벨은 안장주머니를 열어 금화와 계약서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화살 맞은 엉덩이를 살펴보았다. 오크의 조잡한 화살이라 깊이 박히지 않았다. 촉을 빼내기 위해 칼로 후벼 파거나 불로 지질 필요 없이 약만 바르면 될 듯했다.

로벨은 전투마를 다독이며 아직도 무릎 꿇고 있는 행상인 형제를 돌아보았다.

“뭐해?”

“머, 뭐하다니요?”

“안 가?”

용서해준다는 뜻이었다. 행상인 형제는 서로를 한번 보고 마음이 바뀔세라 잽싸게 돌아섰다. 로벨은 피식- 웃고 전투마에 오르다가 문뜩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흠칫! 행상인 형제의 몸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전설 속의 고르곤이 있다면 그러할까. 로벨은 고삐를 느슨하게 풀고 말했다.

“너희들은 어디서 온 상인들이지?”

“부, 북쪽에서 왔습니다요.”

“북쪽 어디?”

“맥캐런 영지에서 가, 가죽과 기름을 사서 노스폴드 시티로 가져옵니다요. 7, 7년째 장사 중입니다. 수공업 길드에서 신원을 보장해 줄 겁니다. 지, 진짜입니다!”

멀대가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로벨이 도적으로 의심한다고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로벨이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 빈손이야?”

행상인이라면 조랑말이나 당나귀, 하다못해 수레나 지게를 가지고 다니는 법인데, 이들은 복장만 떠돌이 행상인이지 짐이 없었다. 더욱이 북쪽이라고 하니 걸리는 것이 많았다.

“오, 오크 때문입니다!”

@

로벨은 볼탄 반도 북부 지리에 밝은 행상인 형제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땅딸보와 멀대는 지은 죄가 있어서, 혹은 로벨이 약속한 금화 한 닢이 탐이 나서 성실하게 정보를 토해냈다.

“저희는 그람 형제입니다. 친형제는 아니굽쇼. 그람 마을에서 형제처럼 자랐습니다요.”

그람 형제는 중간중간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고, 어머니는 성에서 일하다가 도둑으로 몰려 맞아 죽고, 가뭄에 굶어 죽었다.

로벨은 하품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볼탄 반도, 아니, 유라피아 대륙에 흔해 빠진 것이 고아와 과부였으니 새삼스럽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로벨도 고아와 과부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로벨은 그람 형제가 늘어놓은 이야기 중 오크 이야기만 추려냈다.

“맥캐런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어?”

“북부대로를 타고 올라가면 이틀 거리입니다.”

“언제 습격받았다고?”

“아흐레 전입니다요.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내려왔지요.”

로벨은 오크가 출몰한 맥캐런 마을, 깁스 마을, 노스폴드 시티를 연결해 보았다. 시간과 거리가 맞아 떨어졌다. 오크들은 산발적으로 출몰하는 것이 아니라 남하하고 있었다.

‘하루에 10마일씩 내려오는 건가?’

통상 행군속도치고 조금 느리지만, 보급과 거점 개념이 없다면, 그리고 수시로 약탈을 일삼는다면 그럴 만했다.

‘오크가 나타난 것이 우연히 아니야.’

로벨은 노스폴드 시티의 성벽을 돌아보았다. 깁스 자작이 습격받은 것이 닷새 전, 노스폴드 시티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다. 로벨의 짐작대로라면 이 근방에 대규모 오크 무리가 깔렸을 것이다. 로벨을 공격한 오크들은 정찰병, 혹은 오크식 보급병이라 봐야 했다.

“성이 위험해.”

“예, 예?”

“구랄 형제라고 했지? 노스폴드 시티의 웨던 남작을 찾아서 오크 부대가 가까이 있다고 전해.”

“저, 그람 형제인데...”

“로벨 로드릭 남작이 보냈다고 하면 될 거야. 시간 없어. 서둘러.”

로벨은 다급한 나머지 약속한 금화를 주는 것을 잊었다. 전투마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전투마는 언제 엉덩이에 화살 맞고 도망쳤냐는 듯 용감무쌍하게 질주했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돈 주고 가셔야죠!”

“그, 그만해, 형! 일단 살았잖아.”

로벨은 뒤통수를 간질이는 소리에도 꿋꿋하게 박차를 가했다.

@

로벨은 노스폴드 시티보다 로드릭 마을을 걱정했다. 노스폴드 시티는 성벽도 있고, 성탑도 있고, 30명의 시티가드와 50명의 울프 용병단이 있지만, 로드릭 마을에는 외팔이 더치를 비롯한 10여 명의 병사가 전부였다.

“이럇! 이럇!”

성이 가까워지자 속도를 캔터(Canter:시속 약 20km)에서 갤럽(Gallop:시속 약 60km, 전력질주)으로 속도를 올렸다. 창을 들고 기마 돌격하는 속도였다. 찬 기운이 남은 봄바람이 코와 귓불을 따갑게 했다.

“어? 영주님이다!”

“와아! 영주님! 영주님!”

로드릭 마을의 꼬마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외지인이 본다면 영주를 좋아하는 기이한 꼬마들이라 여겼을 것이다. 로벨은 꼬마들을 보았지만 손발이 바빠 응답하지 못했다. 꼬마들은 열심히 따라왔으나 두 발은 네 발을 이기지 못해 금방 나가떨어졌다.

로벨은 휴경지가 된 작년 추경지를 가로질러 로드릭 성이 있는 언덕을 단숨에 올라갔다.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전투마가 땀범벅이 되어 헐떡거렸다.

“워! 워워!”

로벨이 말을 세우자 앳된 얼굴의 용병이 다가와 말고삐를 잡았다. 로벨은 고맙다고 말하기에 앞서 질문부터 던졌다.

“펄프 대장은?”

“외팔이와 함께 북쪽 숲으로 갔습니다.”

“숲?”

“예. 영주님께서 시킨 일이 있다고...”

로벨은 몸을 돌려 언덕 저 아래의 숲을 내려다보았다.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구랑 갔지?”

“펄프 대장, 외팔이 더치, 과묵한 몬트 세 사람입니다.”

로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린 집사가 성 안으로 물통을 옮기다가 로벨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아야와 이야카를 쫓아다녔고, 코골이 바디 이하 용병들이 낄낄거리며 마스코트들을 구경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마음 한 켠의 불안감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로벨은 앳된 용병에게 명령했다.

“성 안에 남은 병력 모두 집합시켜.”

“지금 바로 말입니까?”

“지금 바로!”

로벨은 숨을 헐떡이는 전투마를 진정시키며 어린 집사를 불렀다.

“내 창을 가져와!”

@

로벨은 울프 용병단 7명과 늑대 2마리를 이끌고 북쪽 숲으로 향했다. 로드릭 마을주민 10여 명과 울프 용병단 3명이 간 곳이다.

“대체 무슨 일이래?”

“난들 귀족나리의 생각을 알겠소?”

로벨은 랜스 자루를 뒤로 돌려 잡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로드릭 마을의 이름 없는 북쪽 숲은 전형적인 혼합림이었다. 외곽 쪽은 키 작은 양수만 듬성듬성하고, 깊이 들어가야 고목이 있었다. 촌장은 깊은 곳에 안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쓸 만한 나무를 구하려면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로벨의 우려대로 숲 외곽에서는 펄프 대장 일행을 찾을 수 없었다.

“후우.”

로벨은 전투마를 세우고 잠깐 고민했다. 무작정 숲에 들어갔다가는 엇갈릴 가능성이 있었다.

“펄프 대장이 떠난 지 얼마나 됐어?”

“점심 전에 출발했으니까, 한나절이 지났습니다.”

로벨은 다시 생각했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아무 낌새가 없다면 별일 없을 가능성이 컸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아무 일 없이 장작을 가지고 돌아올 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버섯이나 벌꿀을 따와서 저녁에 별미를 맛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린 집사가 양손 가득히 꿀을 묻히고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말라고 타박할 것이다. 하지만 안 좋은 예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으아아아악! 사람 살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