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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43화 (43/605)

43화. 오크

43화. 오크

노스폴드 시티는 페르젠 시티나 프란시스 시티 같은 영주의 도시가 아니라, 국왕의 특허장을 가진 자유도시였다. 어느 세력에도 귀속되지 않으며, 관세 또한 부과받지 않았다.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도시라 욕심을 내는 귀족이 많았으나, 욕심은 욕심일 뿐, 국왕의 권위에 도전할 작정이 아닌 이상 노스폴드 시티를 공격하거나 점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몬스터라면 사정이 달랐다.

“오크나 고블린이 국왕폐하의 권위를 존중할 거라 생각하지 않소.”

“본인도 그리 생각하오.”

“자, 저쪽으로 갑시다.”

로벨은 웨던 가문의 당주이자 노스폴드 시티의 시장인 마이클 웨던 남작을 통해 노스폴드 시티의 유력인사들을 소개받았다. 수공업 길드장, 양조업 길드장, 여인숙 길드장, 낯이 익은 상인 길드장도 있었다.

“그런데, 로벨 남작님, 크흠! 근방에 마상시합이라도 있으신지요?”

상인 길드장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지난 보리 거래의 복수가 분명했다. 로벨은 귓불까지 빨개졌다. 비단옷이 나풀거리고, 보석장식이 반짝거리는 우아한 사교장에 전쟁이라도 할 듯 쇳덩이를 입고 나타났으니 여러모로 이목을 끌었다. 점잖은 신사들은 고개를 돌려 웃음을 삼켰고, 호기심 많은 숙녀들은 곁눈질로 훔쳐보며 키득거렸다. 로벨은 자신이 생각해도 가당치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위험한 시절이니까.”

“옳은 말이오.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소.”

배려가 넘치는, 혹은 아쉬운 것이 많은 웨던 남작이 로벨을 감싸주었다. 로벨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같은 노빌리티(Nobility)라 젠틀맨(Gentleman)보단 가깝게 느껴졌다.

로벨은 갑옷을 입혀 보낸 어린 집사를 타박하고, 건방진 평민들이 원하는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내 용병단을 자랑하려고.”

로벨은 엄지손가락으로 테라스 너머의 정원을 가리켰다. 웨던 남작의 정원이 결코 작지 않은데, 50명이나 되는 완전무장한 용병단이 들어서자 시장통처럼 북적거렸다. 로벨의 우스꽝스러운 차림에도 대놓고 웃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저 친구들이 최근 이름을 떨치는 울프 용병단이군요.”

“잉그비아 왕국의 까마귀 용병단을 물리치고, 볼탄 반도 남부의 도적떼를 소탕했다지요?”

“오오, 확실히 용맹해 보입니다.”

노스폴드 시티의 유력인사들이 울프 용병단의 위용을 칭찬했다. 웨던 남작은 쌉싸름한 홍차를 직접 따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소. 우리 도시에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시티가드가 있으나, 안타깝게도 실전경험이 전무하오. 건달패거리와 몽둥이 싸움한 것이 최고의 무용담이오. 오크와 고블린을 상대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하오.”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내 용병들은 수차례 전투를 치른 정예들이오.”

로벨이 자신하자 여러 인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웨던 남작이 확인차 물었다.

“용병단을 이끌고 온 것은 우리의 요청을 들어주겠다는 뜻이오?”

로벨은 상스럽지 않게, 그러나 결코 고귀할 수 없는 단어로 대답했다.

“가격이 맞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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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던 남작은 고지식한(?) 시골 기사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직접 거래했다.

대다수 귀족은 아무리 부르주아 계급이라도 ‘고작’ 평민을 대등하게 대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도 자격지심이 있어 가진 지식과 재산에 비해 귀족을 어려워했다. 그런 풍토를 생각할 때, 귀족이면서 자유도시의 시장이 된 웨던 남작은 특이한 케이스였다.

“100일은 너무 길지 않소? 30일 단위로 계약합시다.”

“번거롭지 않겠소?”

“솔직하게 말해서 이번 몬스터 사태가 100일이나 지속될 것 같지 않소. 로벨 경도 50명이나 되는 병사를 장기간 묶어둘 수 없잖소?”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하고 담백한 협상이었다. 그 결과 로벨은 울프 용병단 50인이 향후 30일 동안 노스폴드 시티의 수비를 책임지는데 합의했다.

로벨은 계약서와 계약금 3,500페닝을 받고 일어났다. 파티는 끝나지 않았지만, 파티에 어울리는 차림이 아니라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웨던 남작 역시 로벨과 계약한 목적이었을 뿐 사교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로벨이 육중한 갑옷으로 철컥, 소리를 내자 정치, 경제, 날씨 따위를 논의하는 척하면서 훔쳐보던 장인과 상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로벨은 이목이 집중되자 당황해서 공개적으로 인사했다.

“아, 음, 만나서 반가웠어. 참 좋은 모임이야. 종종 초대해줘.”

그리고 울프 용병단을 보기 위해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웨던 남작 이하 노스폴드 시티의 신사숙녀들은 로벨을 정말 초대해도 될지 심각하게 의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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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됐어.”

로벨은 계약 내용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울프 용병단은 예상한 내용이라 금방 이해했다.

“그럼 30일 동안 지내면 됩니까?”

“30일이 될지 300일이 될지 모르는 거지.”

“흐흐... 도시여자도 나쁘지 않으니까.”

로벨은 손을 저어 잡소리를 걷어내고 말했다.

“주 임무는 몬스터로부터 도시방어야. 시티가드가 사용하는 숙영지에서 생활하면 될 거야. 애꾸눈 볼포스를 임시 대장으로 임명할 테니까, 자세한 것은 웨던 남작과 조율해서 해결해.”

애꾸눈 볼포스라면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문제가 없었다. 애꾸눈은 오히려 로벨을 걱정했다.

“로드릭 성의 수비는 괜찮습니까?”

총원 120명 중 소금광산에 55명, 노스폴드 시티에 50명을 파견해서, 정작 본거지인 로드릭 성에는 13명만 남았다.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등을 합쳐도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5명이었잖아.”

“옛날이라 해도...”

불과 2년 전이다. 로벨은 유사시 영지민을 징집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전투마에 올랐다.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당황해서 말했다.

“지금 바로 가십니까?”

“왜?”

“그게... 하하... 좀 웃기지만, 영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는 느낌입니다.”

로벨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응. 좀 웃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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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시끌벅적한 용병단을 도시에 남겨두고 전투마 한 필과 함께 복귀했다. 그래도 빈손은 아니었다. 안장주머니에 계약서와 3,500페닝이 있었다.

‘집사가 좋아하겠지.’

로벨은 안장에 매달린 금화주머니를 툭 치고 흐뭇하게 웃었다. 용병사업이 리스크가 크긴 해도 돈이 되었다. ‘나 혹시 사업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하고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바람을 타고 피 냄새와 나무 타는 냄새가 전해졌다. 직업특성상 익숙한 냄새들이었다.

‘노상강도?’

로벨은 전투마의 옆구리를 때려서 속도를 높였다. 나지막한 둔덕을 넘자 꺼질 듯 말듯 불이 붙은 나무수레와 웅덩이를 이룬 핏자국이 보였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서 수레로 다가갔다.

‘아니야. 강도가 아니야.’

수레 짐칸에 곡물자루와 채소자루가 그대로 있었다. 큰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상인을 약탈할 만큼 굶주린 강도가 놔두고 갈 물건도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피 덩이였다. 출혈량을 보아 사망한 것이 분명한데, 시체가 없었다. 강도가 측은지심이 많아 매장해주었을 리 만무했다.

로벨은 핏자국을 따라 조금 이동했다. 부드러운 흙길이 나오자 발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보다 크고 넓적하며 발가락이 하나 모자랐다. 발가락이 모자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신발을 안 신었다는 뜻이다. 약간의 지식과 지역 뉴스를 더하면 어렵지 않게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건 몬스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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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전 깁스 자작이 오크 무리에게 습격 받았다. 정확한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기사와 기사의 수행원을 공격할 정도면 오크 숫자가 두 자릿수를 넘을 것이다. 노스폴드 시티가 괜히 울프 용병단을 고용한 것이 아니었다.

로벨은 서둘러 전투마에 올랐다. 피가 마르지 않은 것을 보아 습격당한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시체를 가져간 것은 먹기 위해서지만, 불을 지른 것은 왜일까? 예감이 안 좋았다.

핑-!

안 좋은 예감은 항상 잘 맞았다. 로벨은 아멧을 챙길 틈이 없어 왼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갑옷을 입혀 보낸 어린 집사를 칭찬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간사한 법이다.

팅- 티틱-!

삐뚤삐뚤하고 너덜너덜한 조잡한 화살이 컴포지트 아머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코앞에서 쏜 아바레스트도 뚫지 못하는 판금갑옷인데, 오크가 만든 조잡한 숏보우에 뚫릴 리 없었다. 그러나 전투마의 입장은 달랐다.

“히이잉-!”

화살 한 대가 전투마 엉덩이에 꽂혔다. 전쟁용으로 훈련된 말이지만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투마는 앞발을 번쩍 들고 울부짖은 후 쏜살같이 도망갔다. 주인을 태우고 도망가면 참 좋았을 텐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삐를 놓은 참이라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또야!’

로벨은 안장에서 떨어지는 짧은 체공 중에 분통을 터트렸다.

‘이래서 투구를 써야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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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로벨은 꼬리뼈에서 척추를 타고 후두엽으로 전해지는 충격에 숨이 턱 막혔지만, 기사의 의지력으로, 혹은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몸을 굴려 일어났다. 키 작은 관목 사이로 적의에 찬 짐승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키는 성인 남자보다 작지만, 팔다리가 굵고 승모근과 삼각근이 발달해서 차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송곳니가 기형적으로 커서 입술 밖으로 삐져나오고, 콧구멍이 훤히 보일 만큼 코가 들렸다. 워낙 특징적인 외모라 난생처음 보았음에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크!”

로벨은 롱소드를 뽑아 양손으로 잡았다. 탐색할 시간도, 견제할 여유도 없었다.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굽혀서 충격에 대비했다. 첫 격돌은 격렬했다.

쾅!

오크가 휘두른 도끼를 폴드런으로 튕겨내고, 빈 공간에 칼날을 그었다. 오크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지만, 생물인 이상 목을 자르면 죽으리라 믿었다. 사람처럼 붉은 피가 솟구쳤다.

로벨은 목이 잘린 오크의 왼편으로 왼발을 옮겨 오크 무리의 동선을 차단했다. 그리고 녹슨 곡괭이를 휘젓는 두 번째 오크를 향해 롱소드를 뻗었다.

“내게 더 길어!”

오크가 가진 무기 중 롱소드보다 긴 무기는 없었다. 로벨은 오크 가슴에 칼날을 박고 오른쪽으로 당겼다. 가슴에 구멍 난 오크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옆걸음쳤다. 뒷걸음치는 편이 좋을 텐데, 머리가 나빠서인지 순순히 옆으로 끌려왔다. 그렇게 전투불능 오크들로 좌우를 차단하고 정면에 집중했다. 포위당하지만 않으면 풀 세팅한 기사가 죽을 일은 없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오크가 억센 힘을 믿고 돌진했으나, 일국의 그랜드 챔피언을 무릎 꿇리기에는 부족했다. 로벨은 반걸음 물러났다가 한걸음 크게 내딛는 것으로 간격을 속였다. 세 번째 오크는 머리 위로 치켜든 도축용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머리통이 날아갔다. 네 번째 오크는 운이 좋아 로벨 옆구리를 부러진 낫으로 찌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큰 의미는 없었다. 깡! 관리가 안 된 녹슨 낫은 허망하게 부러졌다.

“뀌익?”

오크는 로벨의 갑옷과 두 동강 난 낫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 촌구석에서 온 오크인지 갑옷 입은 기사를 처음 본 모양이다. 로벨은 오른팔을 높이 들어 팔꿈치로 오크의 정수리를 찍었다. 카우터(Cowter: 팔꿈치 보호대)의 스파이크는 어지간한 나이프보다 위력적이었다. 오크는 콧구멍으로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로벨은 피범벅이 된 롱소드를 양손으로 파지하고 남은 오크들을 노려보았다. 숨이 가빴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았다. 실전에서는 허세도 실력이었다.

“뀌익! 뀌익!”

“뀌이익!”

오크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쳤다. 즐거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크어인가?’

로벨은 롱소드를 가슴 앞에 세웠다. 기사의 예를 표하는 동작이지만, 지금은 칼날에 묻은 피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오크들은 몇 마디 더 떠들다가 몸을 돌려 줄행랑쳤다. 쇳덩이를 입은 기사와 싸워서 안 된다는 좋은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로벨은 롱소드를 검집에 밀어 넣고, 혹시 모를 저격에 대비해 허리에 묶어둔 아멧을 머리에 썼다. 그리고 도망간 전투마를 어찌 찾을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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