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2화 (42/605)

42화. 칭찬

42화. 칭찬

로벨은 깨끗이 씻고, 배불리 먹고, 늘어지게 잠을 잤다. 페르젠 백작의 파도성에서도, 하몬 남작의 유령성에서도 긴장을 풀지 못해 피로가 쌓였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벨은 12시간을 꼬박 자고 배가 고파서 눈을 떴다.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의 길이가 점심이 막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예의상 기지개를 켜고, 덤으로 하품도 조금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끈과 허리띠를 찾았다.

그동안 방치한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만큼 길어졌다. 크게 거슬리지는 않지만, 조만간 손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린 집사가 선물한 머리끈으로 머리카락을 바짝 모아 묶고, 소드 벨트를 둘렀다.

갑옷을 입었을 때는 허리 갑옷의 굴곡을 이용해 위쪽에 차지만, 평복일 때는 골반 가까이 착용했다. 그 미묘한 차이로 칼끝이 땅에 끌릴 때가 있어 습관처럼 롱소드의 손잡이를 아래로 눌렀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로벨이 수시로 위협하는 것처럼 보았다.

소드 벨트의 남은 끈을 매듭지어 묶고, 우플랑드 밑단을 잡아당겨 곱게 펴고, 쇼오스를 허벅지까지 올려 입었다. 쇼오스가 흘러내리지 않게 가터 링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로벨은 굵은 허벅지 탓인지 딱히 고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슴 가죽으로 된 고급신발을 신고, 깃털 장식이 빠진 캐벌리어 모자(Cavalier hat: 챙이 넓은 일상모자)를 썼다. 포클랜드 시티의 뽐내기 좋아하는 귀족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샤프론(Chaperon: 터번처럼 감는 모자)을 애용하지만, 로벨은 아침마다 머리 손질하기가 귀찮아서 사두고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격식 있는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정도가 되자 자신 있게 침실을 나섰다.

방문을 닫고 1층 홀을 내려다보니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와 뒹굴고 있었다.

“앗! 기사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털투성이가 된 마녀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날 때부터 털투성이였던 늑대들이 “컹컹!” 짖었다.

로벨은 손바닥을 한번 보이고 계단을 빙 돌아 성 밖으로 나갔다. 정오의 눈부신 햇살이 시야를 가렸다. 손그늘로 햇빛을 차단하자 간신히 성 앞마당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연병장에서는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 중이고, 그 옆 마구간에서는 허풍쟁이 제이콥이 말구유통에 앉아 신입 울프 용병단 두 사람과 잡담을 나눴다. 성벽 위의 초병은 창에 기대서서 하품을 쩍쩍하고, 그 아래쪽 성문에서는 문지기가 양젖을 가져온 아낙을 상대로 집적거렸다. 어느 성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광경이지만, 로벨의 성에서는 2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My Lord?”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로벨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두 사람의 심각한 대화에 로벨도 끼게 되었다.

“노스폴드 시장의 초대장입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고용 이야기를 떠올리고 물었다.

“왜 이리 급해?”

“이틀 전 깁스 자작이 오크 무리에게 습격받았습니다.”

“노스폴드 시티에서 하루밖에 안 떨어진 곳이에요. 급할 만하죠.”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올리고 초대장을 쭉 훑어보았다. 노스폴드 시장을 겸직하는 웨던 남작의 사교모임 초대였다. 좋은 차가 생겨서 대접하고 싶다는 퍽 정석적인 내용이었다.

“가만? 초대에 응하면 사교계 데뷔네요?”

“사교적인 목적이 아닌 것 같소만.”

“사교 모임이 사교만 하는 경우는 원래 없어요. 야합이고 단합이죠.”

로벨은 자신의 명예를 찬양하는 미사여구를 건너뛰고 장소와 날짜를 확인했다. 이틀 뒤 노스폴드 시티 교외의 웨던 남작 저택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로벨은 초대장을 접어서 뒷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만나자.”

“만나서요?”

“얘기를 들어야지.”

@

로벨은 지난 8일간 밀린 책무를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집사에게 행정업무를 위임하고, 펄프 대장을 불러서 로드릭 성에 남은 울프 용병단 60명을 사열하고, 아야와 이야카를 대동해서 로드릭 마을로 시찰 나갔다. 어린 집사가 2층 집무실에서 소리쳤다.

“아아앗! 영주님! 어디 가요!”

“영주가 할 일이야.”

“영주님이 할 일은 여기 있다고요!”

어린 집사는 춘경지 수익, 소금광산 수익, 상반기 인두세, 토지세, 재산세, 기타 시설 세금이 제대로 들어왔나 확인하고, 성채 관리비, 품위 유지비, 울프 용병단 운영비 등의 예산을 집행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지민의 불만을 접수하고, 범죄를 처벌하고, 소송도 처리했다. 본디 영주와 행정관이 할 일인데, 칼부림밖에 모르는 바보 영주 탓에 전부 어린 집사의 일이 되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도망치듯 언덕길을 내려갔다. 어린 집사가 악을 썼지만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컹!”

“역시 그렇구나.”

“푸르릉!”

로벨은 말과 늑대와 대화하다 영지민이 나타나자 시치미 뚝 떼고 근엄한 영주님이 되었다.

“일하러 가?”

“여, 영주님?!”

괭이를 지고 가던 농부가 로벨을 보고 화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반응이 격한 것을 보아 작년 가을에 정착한 강철성 출신이 분명했다. 로벨은 안장 머리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물었다.

“촌장은 어디 있어?”

“초, 촌장님은, 아니, 촌장은 새로 개간한 추경지에 있습니다요.”

“아, 가을 농사를 시작할 때가 됐구나.”

로벨은 어린 집사만큼이나 부지런한 촌장을 두 번쯤 칭찬하고 다시 말했다.

“너도 그리로 가지?”

“예, 예.”

“그럼 같이 가자.”

로벨은 말머리를 추경지 방향으로 돌렸다. 아야와 이야카는 새로 합류한 농부가 마음에 안 드는지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릉거렸다. 죄 없는 영지민은 하늘처럼 높은 영주님과 악마처럼 못되게 구는 늑대 사이에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로벨이 농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우리 늑대는 안 물어.”

이야카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농부의 엉덩이를 물었다. 이빨이 날카로워서 장난으로 물어도 꽤 아팠다. 농부는 비명을 지르며 말보다 빨리 도망쳤다. 이야카는 목을 쭉 빼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

이럴 때 혼내는 것은 마녀 키르케인데, 하필 마녀가 곁에 없었다. 로벨은 어떻게 훈계해야 할지 몰라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지 마.”

“컹컹! 컹!”

아야와 이야카는 껑충껑충 뛰며 좋아했다. 로벨이 말하면 칭찬으로 들리는 듯했다.

“칭찬하는 거 아니야.”

“컹! 컹!

“...에휴.”

로벨은 어린 집사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에게 잔소리하며 로드릭 마을 남쪽의 추경지를 방문했다. 작년 봄에 농사지어 올해 추경지로 돌린 땅과 새로 개간한 땅을 합치니 면적이 상당했다. 크게 가물지만 않으면 영지민 500명이 겨울을 나는데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영주님이 시찰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촌장이 서둘러 찾아왔다.

“My Lord, 먼 곳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촌장도 건강해서 다행이야.”

로벨은 늑대 남매가 늙은 촌장도 물까 봐 전투마에서 내렸다. 그러나 촌장은 성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서인지 적대하지 않았다.

“어때?”

촌장은 로벨의 화법에 익숙해서 금방 대답했다.

“영주님께서 빌려주신 농마 덕분에 수월하게 농사준비가 끝났습니다. 양들도 건강하고, 목초지의 풀도 잘 자라고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다만...”

로벨도 촌장의 화법에 익숙했다. 촌장은 항상 좋은 일을 말한 뒤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다만?”

“북쪽 숲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버섯을 캘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음식을 할 장작이 떨어진 집도 있습니다.”

숲과 영지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로벨은 수염을 만지는 척하다가 말했다.

“촌장도 소문을 들었을 거야.”

“몬스터 말입니까?”

“응. 우리 숲에도 고블린이 나왔잖아.”

촌장은 영주님의 걱정을 알고 주름을 조금 폈다.

“그러나 땔감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다니고, 깊은 곳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로벨은 쟁기를 끄는 농마와 농마 앞에서 장난치는 꼬마와 꼬마를 끄집어내서 쥐어박는 농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팔이 더치를 보내줄게.”

아무래도 영지민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촌장은 로벨의 배려에 굽은 허리를 더욱 구부렸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긴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정오에 기상한 것치고는 많은 일을 했다. 로벨은 전투마의 안장을 벗기고 성 안에서 좀 뛰어놀도록 풀어주었다. 그리고 펄프 대장을 찾아 내일 아침 일찍 외팔이 더치를 늙은 촌장에게 보내라고 명령했다. 펄프 대장이 불안한 듯 되물었다.

“외팔이 혼자 말입니까?”

로벨은 눈을 깜박인 후 정정했다.

“두 명 정도 같이 보내.”

펄프 대장은 비로소 안심하고 떠나갔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눈 밑이 퀭한 어린 집사가 마중 나왔다.

“영주님, 우리도 징수관을 고용하는 게 어때요?”

“왜? 펄프 대장이 있잖아?”

“용병단 관리한다고 징수관 일을 안 해요.”

아무래도 징수내역이 안 맞는 모양이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하며 숫자에 밝은 인재가 흔치 않으니 가까운 시일에 징수관을 구하기는 힘들 것이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늑대 남매한테 해주는 거지만 어린 집사도 싫어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배시시 웃다가 말했다.

“아참. 노스폴드 시티로 갈 준비하세요.”

“왜? 그냥 가면 되잖아?”

“그냥이라니요! 도시 놈들한테 얕잡아 보이면 안 돼요!”

“그래봐야 평민들인데...”

“그리고 단순한 친목모임이 아니잖아요? 울프 용병단의 가치를 매기려고 할 텐데, 마냥 겸손하게 나가서 안 되죠.”

로벨은 안 그래도 겸손하고 사이가 안 좋은 용병들을 얼마나 더 멀게 하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이것도 전쟁이라고요. 총력을 다해야 해요.”

@

다음날. 로벨은 어린 집사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여서 로드릭 성과 북쪽 숲을 지킬 최소인원을 제외한 50명을 완전무장시켰다. 크고 무거운 헬멧을 쓰게 하고, 전장에서 사용하는 파비스를 짊어지게 했다. 무기와 갑옷이 통일되지 않아서 들쑥날쑥하지만, 그래서 베테랑 용병단 같았다. 아니, 애당초 무장이 통일된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다. 끽해야 색깔이나 장식을 통일하는 수준이니까.

“파비스에 로드릭 가문의 문장을 새기면 어떨까요?”

“우리집 문장에 화살이 꽂히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아, 그것도 그렇군요.”

로벨도 컴포지트 아머를 착용하고 나왔다. 부상 이후 오랜만에 입은 갑옷이라 조금 어색했다. 하루 정도 입고 구르면 금방 적응하겠지만.

어린 집사는 어디 전쟁이라도 하러 갈 듯 흉흉한 기사와 용병들을 둘러보고 만족했다.

“이쯤이면 도시 놈들도 기가 죽을 거예요. 아야랑 이야카도 갑옷을 입히면 좋겠는데...”

“컹!”

아야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것을 보면 꼭 사람 같은데, 혼날 때는 기가 막히게 늑대 흉내를 내었다.

“그럼 아침 먹고 출발하죠.”

허풍쟁이 제이콥이 49명의 용병을 대신해 따졌다.

“아침 먹고 무장해도 되었잖소!”

“배부르면 게을러지는 법! 잔말 말고 따르세요!”

울프 용병단은 투덜거렸지만, 로벨도 갑옷을 입고 아침을 먹었기에 크게 따지지 못했다. 마녀 키르케가 문뜩 의문을 가졌다.

“근데 사교 모임에 갑옷을 입고 가나?”

그 의문을 좀 더 일찍 떠올렸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