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유령성
39화. 유령성
하몬 남작이 다스리는 하몬 마을은 인구 450명의 작은 농촌이었다. 역사와 전통을 보면 로드릭 마을보다 한참 못하지만, 전대 영주들의 경영능력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땅이 좀 더 비옥해서인지 로드릭 마을보다 빠르게 발전하였다. 제삼자 볼 때는 도토리 키재기였지만, 도토리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것도 옛날이죠. 지금은 우리 영지가 2배, 아니, 3배는 더 부자일 걸요? 어디 소금광산도 없는 게 까불어!”
어린 집사가 영지경영 책임자로서 자부심을 보였다. 그 자부심은 황량한 휴경지를 지나 하몬 마을에 도달하는 순간 사라졌다. 하몬 마을이 로드릭 마을보다 번화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럼 비교할 의미가 없잖아?”
“폐가? 아니, 폐촌이라고 해야겠죠?”
하몬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라 부르기 힘든 지경이었다. 큰불이 나서 외곽의 집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화마의 손길을 피한 곳도 성난 소떼가 휩쓸고 지나간 듯 난장판이었다.
로벨은 부러진 나무 삽과 뒤집힌 수레를 피해 기둥뿌리만 남기고 전소(全燒)한 집을 한 바퀴 돌았다. 도적떼가 쓸고 지나간 것보다 처참했다.
애꾸눈 볼포스와 용병들도 돈이 될 만한 것이 있나 잿더미를 뒤적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쳇! 귀리 한 줌 없수다. 죄다 주워갔나보오.”
“그것보다... 시체가 없어.”
“어? 그러네? 시체도 주워갔나?”
“아니면 ‘우어어...’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거나.”
로벨은 언덕배기에 세워진 영주의 성(Castle)을 바라보았다. 영지민이 살아있다면 저 성에 모여 있을 것이다.
“저기로 가자.”
로벨이 결정하자 애꾸눈 볼포스가 용병 2명을 지정해 정찰 보내고 남은 7명을 두 패로 나눠 로벨을 앞뒤로 호위했다. 애꾸눈은 전쟁터에서만 구른 보통 용병과 달리 귀족을 보필하는데 능숙했다. 로벨은 정찰병이 여유 있게 성을 살필 수 있도록 느릿느릿 말을 몰았다.
언덕 위로 성문이 보일 때쯤, 정찰나간 용병들이 털레털레 돌아왔다. 그 긴장감 없는 태도에 애꾸눈 볼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무슨 일이야?”
“텄수다. 개미새끼 한 마리 없구만.”
“성이 비었다고?”
생각이 없는 용병들은 심드렁했지만, 로벨과 어린 집사는 자못 심각했다. 전시도 아닌데 장원 하나가 통째로 증발했다. 보통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 보자.”
로벨은 전투마의 속도를 올렸다.
마크 하몬 남작의 성은 성문과 성탑을 석재로 짓고 성벽을 목재로 연결한 독특한 형태였다. 로드릭 성보단 견고해 보이지만, 그래도 가난한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진짜 아무도 없네요?”
성문은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만큼 열려있으며, 지키는 사람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으스스한데...”
“그냥 지나가면 안 될까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불안감을 표시했다. 로벨은 “안 돼!”라고 딱 잘라 말하고 전투마에서 내려 성문을 통과했다.
성 안도 성 아랫마을하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건초 부스러기, 쇠스랑, 횃불, 옷가지, 신발 등의 집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지만, 살아있는 생물은 보이지 않았다.
“유령의 성 같아요.”
“유령도 안 살 것 같수다.”
로벨은 잡소리를 못하게 수색을 명령했다. 그러나 애써 찾아 헤맬 필요 없었다.
쿵-!
로벨 일행은 깜짝 놀라 뒤를 보았다. 방금 지나친 성문 위에서 크고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와씨! 깜짝아! 저건 또 뭐야?”
“사람... 같은데?”
머리 하나, 몸통 하나, 팔다리 두 개가 분명 사람이었다. 그러나 16피트 높이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사람치고 지나치게 멀쩡했다. 로벨 일행은 멍청하게 돕는다 치고 다가가지 않았다. ‘그것’이 고개를 드는 순간 자신의 조심성을 칭찬할 수 있었다.
“구울이다!”
계단의 사용법을 모르는 구울이 아작 난 다리로 걸어왔다. 발목이 비틀려서 정강이뼈로 걷는데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로벨은 롱소드를 뽑아 구울을 가리켰다.
“조준!”
울프 용병단은 명령을 받자 당황한 와중에도 아바레스트를 견착했다. 머리와 달리 몸은 성실했다.
“발사!”
파파팡-!
시위를 떠난 쿼럴이 구울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최대 20kN 위력의 쿼럴이 동시에 꽂히자 연약한 구울은 붕 떠서 나자빠졌다. 어디 안 좋은 곳이 상했는지 움찔움찔할 뿐 일어나지 못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아래로 내리고 구울을 관찰했다. 복장을 보아 마크 하몬 남작 밑에서 일하는 하인 같았다.
“행상인의 말이 맞았군.”
성과 마을이 구울의 습격을 받은 모양이다. 울프 용병단은 아직도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구울을 구경하며 서로에게 쿼럴 회수를 떠밀었다. “나다 싶으면 뽑아와라”, “너다 싶으면?” 하지만 잠시 뒤, 쿼럴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쿵!
시선이 일제히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마구간 앞으로 구울 하나가 더 떨어졌다. 로벨 이하 울프 용병단은 “끄어어...” 소리 내며 꿈틀거리는 구울을 한번 보고, 위쪽을 한번 보았다. 성문과 성벽 위에서 구울이 꾸역꾸역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서 여장(女墻)을 넘어 성 아래로 철푸덕- 철푸덕- 떨어졌다. 착지동작이 안 좋아 목이 120도쯤 돌아가거나 팔다리가 괴기스럽게 꺾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구울의 성이잖아!”
울프 용병단은 윈드라스와 크레인퀸(Cranequin)을 꺼내 시위를 감았다. 손과 발로 바삐 핸들을 감으면서도 한가한 입을 놀렸다.
“저것들은 왜 성벽 위에 숨어있는 거야?”
“그보다 계단 쓸 줄 모르나? 계단이 생소한 발명품인 줄 몰랐는데?”
“시끄러! 이쪽으로 온다! 조준! 조준!”
숙련된 아바레스터들답게 20여초 만에 장전을 끝내고 견착했다. 로벨은 롱소드로 제일 걸음이 빠른 하녀 구울을 가리켰다.
“쏴!”
파파팡-! 팡-!
하녀 구울은 체중이 가벼운 탓에 앞서 맞은 구울보다 멀리 날아갔다. 호쾌하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지만, 그 감정에 집중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요리사‘였던’ 구울이 식칼을 휘젓고, 마구간지기‘였던’ 구울이 쇠스랑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반응이 늦는 구울 특성상 뜀박질은 못 하지만, 마크 하몬 남작의 작은 성을 가로지르기는 충분히 빠른 걸음이었다.
로벨은 갑옷을 안 입은 것을 후회하며 롱소드를 길게 내찔렀다. 칼끝이 요리사 구울의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요리사 구울도 식칼을 휘둘렀지만, 롱소드보다 길이가 짧아 애처롭게 허공만 갈랐다. 로벨은 허벅지 근육을 수축시키고 체중을 실어 구울의 입속을 꿰뚫었다. 마크 하몬 남작 일가족을 위해 매일매일 맛있는 빵과 고기를 구웠을 요리사 구울은 걸쭉한 핏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애꾸눈 볼포스는 아바레스트를 한 발 더 쏘고, 재장전할 시간과 거리가 안 나오자 헌팅 나이프를 뽑아 휘둘렀다. 다른 용병들도 비슷하게 백병전 무기를 꺼내들었다. 워 해머, 워 피크, 핸드 액스, 메이스 등등. 점잖은 모임에서 꺼냈다가는 경멸의 시선을 받을 흉악스러운 무기들인데, 구울의 공포 앞에서는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용병들은 머리통을 깨트리고, 정강이를 부러트리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피 냄새를 맡았는지 구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성벽 위, 성탑 안, 심지어 성안의 오물을 버리는 배출구에서도 구울이 기어 나왔다. 로벨 일행은 아차하는 사이 포위당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헌팅 나이프의 핏물을 뿌리며 소리쳤다.
“영주님! 이대로 안 됩니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뒤로 물리고 롱소드를 8자 모양으로 휘저었다. 마구간지기 구울의 쇠스랑을 쳐내고 무릎을 잘라 넘어트렸다. 그리고 눈여겨본 장소를 가리켰다.
“성(Keep)안으로 피해!”
애꾸눈 볼포스는 주위를 둘러싼 구울들을 흘겨보고 ‘어떻게?’ 라는 의문을 표시했다. 로벨은 몸으로 해답을 주었다. 두 걸음 만에 최대속도를 내어 전력을 다한 찌르기를 날렸다. 레더 아머를 입은 경비병 구울의 가슴을 뚫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경비병 구울은 뒤로 밀리면서도 손을 휘저었지만 리치가 짧아 닿지 않았다.
로벨은 구울을 방패 삼아 구울 한가운데로 파고든 다음 롱소드를 잡아당겼다. 반동으로 칼날이 쑥 뽑혔다. 그리고 관성에 따라 두어 걸음 더 물러나는 경비병 구울의 팔을 잡아 왼쪽으로 끌어당겼다. 경비병 구울은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아가씨처럼 빙그르 돌아 로벨과 등을 맞대었다. 로벨은 등 돌린 구울에게 왼쪽을 맡기고 오른쪽으로 길을 뚫었다. 서로 짜고 해도 합을 맞추기 힘든 오묘한 동작을 롱소드 한 자루로 가뿐히 해냈다.
칼밥 좀 먹었다고 자부하는 용병들은 할 말을 잃었다. 구울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용기, 갑옷 입은 구울을 곰인형처럼 밀고 당기고 돌리는 솜씨, 지금 막 공중으로 치솟은 중년 집사 구울의 목은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었다.
“저게 사람이냐?”
“저 정도일 줄이야...”
“뭣들해요! 영주님을 따라가요!”
어린 집사가 넋 놓은 용병들을 닦달했다. 용병들은 간신히 정신 차리고 로벨이 뚫은 길을 확장하며 따라갔다. 워 해머와 메이스가 번쩍일 때마다 피와 뇌수가 솟구쳤다.
성(Castle)문과 마찬가지로 성(Keep)문도 열려있었다. 로벨은 열심히 일한 손을 대신해 발로 문짝을 걷어찼다. 퀴퀴한 냄새가 확 밀려왔다. 로벨은 성 안에 위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옆으로 물러서 일행을 들여보냈다. 발 빠른 아야와 이야카가 냉큼 뛰어들고,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후다닥 들어가고, 이어서 용병들이 우르르 쏟아지듯 성문을 통과했다.
로벨은 전원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재빨리 성문을 닫았다. 구울 한 마리가 문짝 틈새로 머리를 들이밀었지만 애꾸눈 볼포스가 어느새 장전한 아바레스트를 겨냥해 이마 정중앙에 쿼럴을 박아주었다. 기우뚱하며 넘어가는 구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성문이 굳게 닫혔다.
쿵! 쿵쿵!
구울이 몸으로 성문을 두드렸다. 용병들은 무기를 팽개치고 달려와 성문이 열리지 않게 몸으로 밀고 빗장을 찾아 걸었다.
미련이 많은 구울들이 포기하지 않고 성문을 두드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성 안팎이 고요해졌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기운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 살았다!”
“살긴 살았는데... 우리 갇힌 거 아니야?”
“아, 몰라. 저 냄새 나는 것들 안 보이니까 행복하다.”
여유가 생기자 농담이 나왔다. 로벨은 로드릭 성 만큼이나 어두컴컴한 하몬 성 메인 홀을 둘러보았다.
창문은 세로로 좁고 길어서 고양이보다 사이즈가 큰 동물은 통과할 수 없었다. 구울이 못 들어오는 것은 좋은데, 로벨 일행도 나갈 수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로벨의 걱정을 눈치채고 조언했다.
“주방에 쪽문이 있을 겁니다. 혹은 2층 발코니를 통해서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
“해가 지고 있습니다. 오늘밤은 성에서 쉬고, 내일 아침 탈출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 제안에서 하나만 반대했다.
“탈출이 아니야. 소탕이야.”
“예?”
“구울을 소탕해야 해.”
로벨의 말에 어린 집사를 포함한 모두가 불만을 표시했다.
“구울이 사악한 괴물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마을에도 피해가 올지 모르니까.”
로벨이 진지하게 말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하몬 마을에서 로드릭 마을까지 도보로 5~6시간 거리였다.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강 건너 불처럼 멀지도 않았다. 구울을 풀어놓으면 못 찾아갈 거리가 아니었다.
“구울 숫자가 얼마나 되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하몬 마을 인구만큼 되지 않을까요?”
“그게 몇이오?”
“450명 정도?”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