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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38화 (38/605)

38화. 구울

38화. 구울

로벨 일행은 볼탄 반도 서부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완연한 봄 날씨라 바닷바람을 맞아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로벨은 전투마 갈기에 얼굴을 파묻고 “피융... 푸후... 피유웅...” 소리 내며 자는 마녀 키르케를 돌아보고 어이가 없어 웃었다.

애꾸눈 볼포스와 정예 용병들은 2열 횡대를 유지하면서도 느슨한 태도로 행군했다. 고향의 아내 이야기, 자식 이야기, 친구 이야기, 자신이 죽인 적군 이야기, 짐승 이야기, 몬스터 이야기, 돈 번 이야기, 돈 쓴 이야기, 돈 벌 뻔한 이야기 등등을 쫑알쫑알 이어갔다. 대부분 용병 특유의 과장과 허세였지만 어린 집사가 혹할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도 있었다.

해가 정수리를 지나 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었다. 로벨은 점심을 먹을 겸 휴식을 명령했다. 용병들은 마른자리를 찾아 짐을 풀었다. 하지만 무기를 내려놓지는 못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해안길을 따라 내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애꾸눈이 수신호 하자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은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쿼럴을 꺼내 아바레스트 몸체에 올렸다. 그리고 무릎 위, 혹은 겨드랑이 아래에 방아쇠를 위치시켰다. 로벨이나 애꾸눈 볼포스가 명령하면 즉시 벌집으로 만들 것이다.

덜컹. 덜컥. 덜컹. 덜컥...

상대편이 점점 가까워졌다. 노새가 끄는 짐수레 한 대와 도보로 걷는 사내 둘이었다. 초로한 노인과 갓 성인이 된 15, 6살 앳된 청년이라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저쪽이 로벨과 울프 용병단을 보고 겁먹었다.

로벨은 용병들에게 대기명령을 내리고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는 누구지?”

노인은 펑퍼짐한 우플랑드에 착 달라붙는 쇼오스를 입은 로벨을 보고 안심했다. 저 복장은 귀족이란 뜻이고, 귀족은 ‘명예’ 때문에 도적질하지 않았다. 기분을 상하면 ‘살인’은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기이하게 살인은 불명예가 아니었다.

“저희는 행상인입니다, 나으리.”

“상인?”

로벨은 짐수레를 힐끔 보았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젊은 아낙과 곡물자루 몇 개가 실려있을 뿐, 상품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노인은 로벨의 의심을 눈치채고 해명했다.

“사트로 시티에서 아마포와 기름을 가지고 페르젠 시티로 가는 중이었는데, 사고를 당했습니다.”

“도적이야?”

“아닙니다. 몬스터입니다.”

검은 숲 깊은 곳도 아니고, 동방의 미개척지도 아닌, 볼탄 반도 한복판에서 몬스터와 조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우리 숲에서도 고블린이 출몰했지.’

로벨은 잦은 전쟁 때문에 치안이 나빠졌나 보다하고 단순히 생각했다.

노인은 별생각 없어 보이는 로벨의 눈치를 살피고 말했다.

“저어, 나으리, 북쪽으로 가시는 중입니까?”

“응.”

“그렇다면 하몬 마을이란 곳을 피해가십시오.”

어린 집사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하몬 마을? 마크 하몬 남작령이요? 우리 영지랑 가까운 곳이네요. 그곳에 몬스터가 나타났나요? 고블린? 트롤? 설마 오우거는 아니죠?”

노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평범한 몬스터가 아닙니다.”

“몬스터가 평범하지 않으니까 몬스터인데, 몬스터이면서 평범하지 않은 몬스터라니, 어떻게 생긴 몬스터길래 평범하지 않은 몬스터가 몬스터라 불리지요?”

노인은 자꾸 반복되는 몬스터 소리에 질겁해서 손을 저었다.

“그러니까 그런 괴물이 아니오라...”

“우아악! 구울이다!”

그 ‘평범하지 않은 몬스터’의 정체를 울프 용병단이 밝혔다. 호기심 많은 용병이 짐수레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아낙이라 생각했는데, 지긋이 상태가 좋은 구울이었다.

“우어어어어... 우우우...”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볼살 움푹 들어가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졌다. 용병을 보고 반응은 하는데, 손발이 한 덩이로 묶여있어서 꿈틀거리는 수준이었다.

“제길! 조준!”

울프 용병단은 일제히 아바레스트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앳된 청년이 온몸을 던져 앞을 막았다.

“쏘지 마요! 우리 어머니입니다! 쏘지 마세요!”

“저게 무슨 엄마야! 엄마는 고사하고 사람도 아니야!”

“옛 신! 옛 신의 사제님이 도와주실 거에요! 축복받은 물로 씻기면 낫는다고 했어요!”

옛 신이 거론되자 권위에 약한 용병들은 아바레스트를 조금 내렸다. 애꾸눈 볼포스조차 난감해했다.

“그런 거야?”

“나, 나도 몰라.”

로벨은 노인을 뒤로 하고 짐수레로 다가갔다. 구울이 된 아낙은 신선한 고기냄새에 포박된 상태로 발작했다. 로벨은 꼼꼼하게 잘 묶었다고 생각한 후 허리 뒤에서 대거를 뽑아 목을 찔렀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반응은 3초쯤 뒤에 나왔다.

“어, 엄마! 엄마아!”

로벨은 한 걸음 물러났다. 청년은 허겁지겁 달려와 ‘두 번’ 죽은 구울을 안았다. 죽지 않는 자, 언데드(Undead)라 해도 경추를 끊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면 본래대로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흔들고 주물러도 꼼짝하지 않았다. 어미 잃은 청년이 두 눈에 살기를 띠고 로벨을 노려보았다.

“이, 이 살인자...!”

로벨은 끈적끈적한 피가 묻는 대거를 살피면서 말했다.

“구울은 이미 죽은 시체야. 성수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해.”

“아니야! 아니라고!”

청년은 용감하게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로벨이 손 쓸 필요도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 손잡이로 후려쳐서 때려눕히고 머리에 쿼럴을 겨냥했다.

“이놈! 무엄하다!”

그리고 로벨의 눈치를 보았다. 로벨의 성격상 이만한 일로 죽이라 명령할 리 없었다.

“잠깐. 쏘지 마.”

역시나 로벨은 로벨이었다.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의 어깨를 밀치고 청년의 뒷덜미를 잡아 노인에게 떠밀었다. 노인은 허망한 얼굴로 청년을 끌어안았다.

“애야, 괜찮다. 애야.”

죽은 여자가 어머니란 것을 보아, 노인과 청년은 조손, 혹은 외조손인 듯했다. 로벨은 미안한 감정을 담아 설명했다.

“구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좋지 않아. 옛 신의 사제를 찾아갔다가는 이교도로 몰려 사형당할 수 있어.”

“허, 허나, 옛 신의 사제가 구할 수 있다고...”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거짓말이야. 구울은 죽어서 움직이는 시체야.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음...”

로벨은 페르젠 백작의 기사가 말한 풍문을 떠올렸다. ‘산 자가 살지 못하고, 죽은 자가 죽지 못한다라...’ 아무래도 구울의 이야기였다.

“장례를 치른다면 돕겠어. 사람이 많으면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노인은 대놓고 엉엉 울기 시작한 청년을 다독이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마우나 고향 땅에 데려가겠습니다. 지아비 옆에 묻어주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로벨은 10페닝 금화를 구울 옆에 놓았다. 저승길 노잣돈치고 많지만, 노인과 청년이 고향으로 내려갈 여비로는 적당할 듯했다. 청년은 끝내 돈을 받지 않았으나, 노인은 공손하게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노새를 재촉해 남쪽으로 떠나갔다.

어린 집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 철부지 아가씨를 혼내듯이 말했다.

“씀씀이가 헤퍼요.”

“가진 게 10페닝 뿐이라... 미안.”

“금화도 금화지만, 저런 못 배운 놈들한테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어요. 보세요. 고마워하기는커녕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잖아요.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몰매 맞아 죽을 것을 구해줬더니만...”

“그만. 지난 일이야.”

로벨은 행상인에게서 몸을 돌리고 북쪽을 바라보았다.

“하몬 마을이랬지?”

어린 집사와 애꾸눈 볼포스가 동시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응.”

“뭐, 뭐가 응이에요!”

“응.”

로벨은 이 소란 중에도 말갈기에 침을 묻히며 자는 마녀 키르케를 깨웠다. 로벨은 구울이 점령한 하몬 마을에 들리기로 결심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녀 키르케의 지식이 필요했다. 어린 집사가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세상에! 이제 구울까지 상대해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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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몬 마을은 로드릭 마을에서 대략 한나절-15마일 정도- 떨어진 마크 하몬 남작의 영지였다. 로드닉 영지와 쌍벽을 이룰 만큼 가난한 영지였는데, 연이어 벌어진 후계자 전쟁과 사트로 후작가 전쟁으로 크게 피해를 보아 더더욱 상황이 안 좋았다.

“구울은 저주이자 질병이예요.”

마녀 키르케가 말 위에서 쫓겨나 두 발로 걸으며 강의했다. 로벨은 갈기를 떡 지게 한 침을 닦으며 되물었다.

“질병하고 저주하고 뭐가 달라?”

“저주는 정신적인 현상이고, 질병은 물질적인 현상이죠. 구울화(-化)는 저주로 생기는데, 질병처럼 퍼져나가요.”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옛날 이야기를 보면 저주에 걸려서 골골거리다가 죽기도 하잖아요?”

“그건 정신이 육체를 좀 먹은 거예요. 무서운 것을 보면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것처럼 정신이 몸을 아프게 하는 거죠. 저주가 만능 살인기술인 줄 아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저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차라리 감기를 옮겨서 죽이는 것이 효과적이죠.”

“흐음. 마녀가 설명하니까 설득력이 아주 높군요.”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 아무튼! 몸이 건강한 사람은 병에 잘 걸리지 않듯,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저주에 잘 걸리지 않아요. 어찌어찌 저주를 걸어도 금방 뿌리치죠.”

“그래서 구울하고 무슨 상관이야?”

“구울을 만드는 것은 일종의 저주에요. 하지만 부정(Negative)만 주입한다고 구울이 되지는 않아요.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육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정신의 힘이 매우 약해요. 인지의 힘만으로 괴물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죠. 물리적인 조치가 있었을 거예요.”

“그것이 질병이다?”

로벨은 조지 백작의 일을 떠올렸다. 해가 바뀌었다고 잊을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단 신앙...”

“이단 신앙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아마도 마법사일거에요.”

“너처럼?”

“어헛! 전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는 선량한 드루이드에요! 사악한 흑마법 따위 배우지 않아요!”

“머리가 나빠서 못 배운 게 아니고요?”

어린 집사가 비꼬자 숙취가 사라져 생생한 마녀 키르케는 맹렬한 기세로 어린 집사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폭력 앞에 장사 없는 법이라 꼿꼿한 신념을 가진 집사도 꺾이고 말았다.

“항복! 항복! 아파요! 아프다고옷! 이익!”

로벨은 최측근의 싸움을 못 본척하고 늑대의 왕과 뱀파이어의 왕이 한 말을 되새겼다.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누군가 인간 세상의 질서를 흔들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되었다.

한편, 애꾸눈 볼포스는 꼬집기, 할퀴기, 깨물기 등 극악의 기술을 사용하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번갈아 보고 한숨 쉬었다.

“어느 공작의 측근들은 수십 명의 기사를 동원해서 권력 싸움하는데... 우리 남작님의 측근들은...”

“뭐, 그래서 우리 기사 나리가 좋은 거 아니우?”

울프 용병단은 피식-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바닷가를 떠나 이름 모를 언덕을 넘고 이름 없는 숲을 지났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시간이 되어서 마침내 마크 하몬 남작령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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