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교도
37화. 이교도
화기애애한 연회장이 험악한 결투장으로 바뀌었다. 악사들은 연주를 멈췄고, 시종과 시녀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피 냄새를 직감한 기사들이 둥글게 모여 피할 곳 없는 결투 장소를 마련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오른쪽 아래로 늘어트리고 왼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볼트 경은 롱소드를 머리 위로 올리고 자연히 반대방향으로 이동했다.
거리를 재고, 빈틈을 찾기 위해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다.
로벨이 취한 자세는 우측 하단세. 상대방이 오른손잡이일 때 방어하기 용이한 수비 자세였다. 반면, 볼트 경은 일격필살을 노리는 상단세였다. 갑옷을 입었을 때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술로 상대방을 압박할 수 있지만, 평복차림에서는 상당히 무모한 자세였다. 그 유명한 로벨 로드릭을 상대로는 이 정도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봐야...’
로벨은 볼트 경의 자세와 성향을 파악한 후 대뜸 한 걸음 다가갔다. 볼트 경은 갑작스러운 접근에 깜짝 놀라 선제공격을 강행했다. 상단세에서 곧장 취할 수 있는 공격은 한정되어 있었다. 맹렬한 수직베기.
로벨은 예상한 공격이라 두 번째 걸음을 옆으로 옮겨서 종이 한 장, 아니, 넉넉히 한 뼘 정도 여유를 두고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아래로 늘어트린 롱소드를 볼트 경의 롱소드와 엇갈리게 쳐올렸다. 써겅- 쇠붙이가 살을 가르는 소리가 서늘했다. 볼트 경의 오른팔이 일자로 길게 그어졌다.
“크으윽!”
볼트 경은 허둥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로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뎌 간격을 유지하고 쳐올린 칼날을 내리그었다. 이번에는 가슴을 길게 베었다. 찢어진 옷섶 사이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안 보는 척하면서 열심히 훔쳐보는 귀부인들이 자극적인 비명을 질렀다.
오늘의 챔피언이자 네일 공국의 명망 높은 기사인 코인 경이 검붉은 수염을 긁적이며 결투를 분석했다.
“봐주고 있군.”
“봐준다고?”
볼트 경의 동료 기사가 물었다.
“첫 공격도, 방금 전 이어진 공격도 멱을 딸 수 있었소. 큼직하게 베면서도 교묘하게 급소를 피하고 있소.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기어이 추태를 보겠다는 뜻인지 모르겠군. 칼솜씨가 대단한 것은 분명하나 성격이 참 지랄 맞소.”
네일 공국 출신답게 표현이 과격했다. 에르나 왕국의 깍쟁이만큼 아니어도, 나름대로 품위와 교양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포비아 왕국 기사들은 헛기침하고 슬그머니 거리를 두었다.
그 사이에도 로벨의 칼질은 계속되었다. 발악하듯 휘두르는 수평베기를 튕겨내고 허벅지에 두 마디 정도 찔렀다가 빼냈다. 주저앉은 채로 휘젓는 롱소드를 장작 패듯 후려쳐서 떨구고 어깻죽지에 한 마디 정도 칼집을 새겨 넣었다. 일방적이고, 압도적이며, 잔혹한 결투였다. 살인과 폭력을 생업으로 삼는 기사들조차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닭 잡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귀부인들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이마를 짚고 쓰러지는 레이디도 더러 있었다. 평소 빈혈기가 있었나 보다.
사실, 이런 무자비한 폭행은 로벨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깔끔하게 목을 치면 치지, 보란 듯이 괴롭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을 한번 보고, 레이디 소피아를 보았다. 결투 중에 한눈을 판다고 탓할 사람은 없었다. 이미 승부는 갈렸으니까.
로벨은 롱소드를 머리 위로 올리고 누군가 나서기를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무도 안 나서면 무안해진다. 5초, 아니, 10초만 기다리고, 정말 안 말리면 자비를 베푸는 척하며 살려주...
“안 돼! 하지 마세요! 하지 마!”
로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디 소피아가 용감하게 뛰쳐나와 볼트 경을 보호했다. 철부지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제법 강단이 있었다. 어쩌면 철부지 아가씨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지 말란다고 “예” 하고 물러날 수 없으니 한마디 했다.
“무슨 짓이오? 신성한 결투 중이요.”
“이게 무슨 결투에요! 이건 그냥 괴롭힘이잖아요! 잔인한 사람! 당신은 잔인한 사람이에요!”
로벨은 롱소드를 내리고 페르젠 백작을 보았다. 성의 주인이고, 결투의 입회인이니 백작의 뜻을 따르겠다는 표시였다. 페르젠 백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소피, 물러나거라.”
“아뇨! 그럴 수 없어요!”
“그 누구도 결투를 막아서 안 된다.”
“그건, 그건 안 되어요. 이 사람은... 나의... 나의...”
로벨은 연회장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어린 집사가 있었다. 레이디 소피아를 떠민 것이 어린 집사였다. 로벨의 의도를 눈치채고 레이디 소피아를 설득해 내보낸 모양이다.
로벨은 이쯤 하면 충분하다 판단하고 롱소드를 내렸다.
“좋소. 서 볼트의 용기와 레이디 소피아의 진심을 알았...”
“이 사람이 애아빠라고요!”
“......”
“...응?”
로벨이 의도한 것과 조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잘 풀렸다. 페르젠 백작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너, 너 이 녀석... 지금 뭐라고...”
“저 임신했어요! 이 사람이 아빠에요!”
이제 토너먼트 우승 따위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레이디 소피아는 치맛자락을 꼭 쥐고 반복해서 소리쳤다. 기사와 귀부인은 깜짝 놀라 수군거렸고,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수십 년 간 전장을 누벼온 페르젠 백작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로벨은 롱소드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밀어 넣었다. 출혈이 심해 헐떡이는 볼트 경과 그런 볼트 경 때문에 정신이 없는 레이디 소피아를 번갈아 보았다. 연애경험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애당초 무슨 말을 해도 곱게 들리지 않겠지만.
“아... 음... 이쁜 사랑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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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이상하게 마무리되었다. 페르젠 백작은 말없이 자리를 떴고, 의식을 잃은 볼트 경은 동료들에게 업혀 실려 나갔다. 시종과 시녀들이 허둥거리며 뒷정리하는 사이, 로벨과 어린 집사는 조용히 홀을 빠져나왔다. 어린 집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레이디 소피아가 안 나오면 어쩌려고 했어요?”
“꼭 죽여야 결투가 끝나는 것은 아니잖아. 자비를 베푸는 거로 마무리했을 거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요?”
“며칠 골골거리겠지만, 죽지 않아.”
로벨은 말고삐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난 레이디 소피아가 나올 줄 알았어.”
“어떻게요?”
“토너먼트에서 볼트 경이 낙마하니까 레이디 소피아가 기절할 것처럼 놀랐어. 그냥 마음이 있는 것치고 반응이 격하잖아. 그리고 춤을 출 때 확신했어.”
“무엇을요?”
“다른 곳에 비해 배가 나왔어. 임신한 게 아닐까 생각했지.”
“...그럼 임산부 앞에서 피의 잔치를 벌인 거예요?”
“그게 왜? 멋지잖아?”
로벨과 어린 집사는 달빛에 의지해 울프 용병단 야영지를 찾아갔다. 마녀 키르케, 아야와 이야카, 애꾸눈 볼포스 및 용병들은 연회장에서 흘러나온 고기와 술로 야참을 즐기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연회장보다 한결 분위기가 좋았다.
“우앙앙! 기사님이다앙!”
마녀 키르케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맞아주었다. 어린 집사가 진심으로 질색했다.
“나이도 잡술 만큼 잡순 마녀가 귀여운 척이라니!”
“나이 안 많거덩요? 17살이거덩요?”
“하, 하지마요! 기분 더러워요! 저 마녀 왜 저래요?”
애꾸눈 볼포스가 빈 술병을 올리며 말했다.
“영주님이 안 오신다고 삐져서 나발 불었소.”
“고작 한 병 가지고 저리 망가져요?”
“한 병? 무슨 소리요? 여기 있는 술병 전부 마녀가 마셨소.”
로벨과 어린 집사는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 숫자를 세어보았다. 얼추 열두 병정도 되었다.
“혈관에 포도즙이 흐르겠는데...”
로벨은 말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마녀 키르케를 슬쩍 피하고 애꾸눈 볼포스에게 다가갔다.
“동이 트면 로드릭 성으로 출발할 거야. 미리 준비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피 냄새가 납니다.”
“별일 아니야.”
로벨의 말과 달리 사실 별일이었다.
페르젠 백작의 위신이 땅으로 떨어지고, 이후 반(反) 페르젠 백작파, 즉 헤르만 백작파의 정치적 공격을 받게 된다. 결국 페르젠 백작은 둘째 딸 소피아를 가신인 볼트 경과 혼인시킨다. 그리고 로벨 로드릭에게 사과의 편지와 함께 값비싼 동방비단을 선물한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쾌재를 부르며 비단을 팔아치우고, 최고로 좋은 젖소를 스무 마리 사들이는데, 이건 좀 나중의 일이다. 지금 당장은 로벨 로드릭의 평판이 관심사였다. 무자비한 결투사라는 평판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맺어주는 낭만주의자란 평판이 동시에 생겨났다. 어느 쪽이든 세인들을 열광 케하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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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침 해가 머리를 빼꼼히 내미는 것을 확인하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잔뼈가 굵은 용병들은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출발준비를 끝냈다. 유일하게 알아서 못하는 사람은 숙취에 시달리는 마녀 키르케 한 명뿐이었다.
“주, 죽을 거 같아요...”
“그러게 작작 퍼마셔야죠!”
“이런 날이 아니면 언제 또 와인을 마셔보겠어요.”
로벨은 한숨을 쉬고 마녀에게 손짓했다. 마녀 키르케는 좀비처럼 비틀비틀 걸어왔다. 로벨은 손가락 하나로 돌려세운 후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전투마 안장에 올렸다.
“어? 어라? 기사님? 기사님?”
마녀 키르케는 전투마 목을 꼭 붙들고 로벨을 내려다보았다. 로벨은 고삐를 잡고 말했다.
“여자와 아이를 지키는 것이 기사야.”
“헤에... 전 여자인가요, 아이인가요?”
어린 집사가 안장 앞뒤로 짐을 올리며 투덜거렸다.
“노인이죠. 노인. 노약자를 지키는 것이 기사도잖아요.”
마녀는 안장 위에서 발길질했고, 어린 집사는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로벨은 두 사람을 떨어트린 후 애꾸눈 볼포스에게 출발을 명령했다. 사람만큼이나 배가 부른 아야와 이야카가 어기적거리며 앞장섰다.
“배 터지게 고기 먹고 칼부림만 하다가 돌아가네요.”
“응. 재미있는데, 피곤해.”
성문을 지키는 기사가 말을 끌고 가는 로벨을 기이하게 보았다. 기사가 걸어 다니는 것은 불명예까진 아니어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예의를 아는지라 정중하게 인사했다.
“로벨 로드릭 남작, 영지로 돌아가시오?”
로벨도 천성이 기사인지라 말을 끄는 것이 부끄러워 시선을 조금 돌렸다.
“그렇소. 성을 오래 비울 수 없으니...”
기사는 밤새 자란 수염을 한번 긁적이고 조심스레 충고했다.
“경 정도되는 기사한테 쓸데없는 참견일지 모르나, 우정으로 고하니 나무라지 말고 들어주시오. 최근 사트로 후작령에서 이상한 조짐이 있다고 하오.”
“이상한 조짐? 도발이오?”
로벨이 눈빛이 사나워졌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일을 벌이는지...
“아니오. 군사행동은 아니오. 그게, 흠.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이단 신앙과 관련된 듯하외다.”
로벨 일행의 얼굴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조지 도트넘 백작의 일이 떠올랐다.
“본인도 풍문으로만 들어서 잘은 알지 못하나, 산 자가 살지 못하고, 죽은 자가 죽지 못한다고 하외다. 아무튼 이교도와 얽혀서 좋은 일이 없지 않소. 남작의 성은 사트로 후작령과 가까우니 각별히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