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초대
34화. 초대
겨울은 생산보다 생활이고, 생활보다 생존이었다. 여름과 가을 동안 비축한 자원을 아끼고 아껴서, 참고, 견디고, 버텨야 했다. 그렇게 죽느냐 사느냐하는 질박한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새로운 한해를 살아갈 자격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쪽지시험으로 수시로 떨어트리죠. 전쟁, 질병, 재해, 사고, 노환... 에휴, 산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에요.”
“쪽지시험?”
“시립 학교(Municipal School)에서 불시에 치르는 시험이요. 그런 게 있다고 해요. 아무튼! 고비를 넘으면 또 고비가 있고, 고비와 고비 사이에는 고난과 불행이 숨어있으니 360일 쉬운 날이 하나도 없어요!”
로벨은 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통달한 듯한 어린 집사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어린 집사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고난과 불행도 있지만, 성취와 행복도 있었다. 가령, 추경지를 개간하는 농부들의 환한 미소와 축사 지붕을 올리는 청년들의 시원한 웃음처럼 말이다.
로벨은 전투마를 세우고 지붕 공사 중인 청년들을 격려했다.
“저녁에 술 한 잔씩 해.”
“오오오! 술을 내려주시는 겁니까?”
“아니. 너희들 집에 있는 거 마시라고.”
“......”
인구가 늘어난 만큼 노동력도 늘어났다. 춘경지 농사와 추경지 개간, 그리고 축사 증축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다. 추경지가 확장되면 작년 가을에 정착한 영지민에게 나눠주고, 올 봄 보리수확 판매금과 머를 브릭이 보내올 소금 판매금으로 젖소를 사기로 했다. 소로 우유를 짜면 영지내에서 대부분 소비되는 양젖과 달리 새로운 판매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고기와 가죽도 확보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였다.
경사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봄바람을 타고 결혼한 부부가 두 쌍이나 되고, 새로 태어난 신생아가 다섯이나 있었다.
결혼세로 두툼한 양모 담요와 머리통만한 양젖 치즈를 받았는데, 어린 집사는 영주님의 양에서 나온 것을 영주님에게 세금으로 내는 게 어디 있냐고 꼬장부리다가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에게 끌려 나갔다. 여하튼, 어린 집사가 삐진 것만 빼고 겹경사였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울타리 공사가 한창인 목초지를 빙 돌아서 여인네들이 씨를 뿌리는 춘경지로 향했다. 주름 잡힌 노파가 주근깨 가득한 소녀에게 파종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소박한 손과 앙증맞은 손이 씨앗을 흩뿌렸다.
“영주님이 하신 일이 모두 옳았던 것 같아요.”
어린 집사가 로벨의 경영방침을 칭찬했다. 로벨은 떨떠름하게 칭찬을 받았다.
“으응? 고마워?”
“인구가 늘어나면, 그만큼 걷을 세금과 부릴 노동력이 늘어나죠! 춘경지를 베풀어준 것도, 양떼를 나눠준 것도 몇 년 앞을 내다본 투자였지요? 역시 우리 영주님!”
“아, 그런가?”
로벨은 어린 집사의 말을 곱씹다가 ‘맞아! 그런 거야!’라며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한 1년 정도 늦은 감탄이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를 발견한 여인네들은 머리에 쓴 두건을 벗고 정중히 인사했다. 로벨은 고개를 까딱이고 농사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놈들 동작 봐라? 빠릿빠릿하게 안 움직이냐!”
“거, 대장! 쉬엄쉬엄 좀 합시다!”
“쉬엄쉬엄하다 엉덩이에 화살 맞을래? 파비스 분리해!”
성안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펄프 대장은 신입 용병을 받아 120명으로 증가한 울프 용병단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이들 중 50명은 소금광산으로 보내고, 50명은 노스폴드 시티를 중심으로 상단호위, 사냥, 몬스터 퇴치 등의 용병사업을 할 것이다. 펄프 대장이 실력이 좋은 놈만 소금광산으로 보낼 거라고 선언해서 용병들은 죽기 살기로 훈련했다. 아무래도 편하고 안전한 소금광산 쪽이 인기 있었다.
크고 작은 활을 어깨 맨 아처들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신속하게 파비스를 설치했다. 방패 다리를 펴고, 받침대를 끼우고, 크로스보우의 버트(Butt: 손잡이 끝부분)로 두드려서 말뚝 박았다. 높이 5.5피트, 폭 2.5피트의 나무 방벽이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틈만 남기고 일렬로 세워졌다. 작은 성이 뚝딱 만들어지는 느낌이었다.
“조준!”
애꾸눈 볼포스가 고급 진 아바레스트를 견착하고 소리쳤다. 용병들도 각자 무기를 꺼내들었다. 롱보우, 숏보우, 크로스보우, 아바레스트 등등 제각각이었다.
“발사!”
파팡! 피잉- 철컥-!
역시나 길고 짧은 투사체가 날아갔다. 과녁을 맞히는 화살도 있고, 성벽에 꽂히는 화살도 있고, 땅바닥에 떨어진 쿼럴도 있었다.
“제이콥!”
“아냐! 아냐! 나 아니라고!”
“그럼 늙다리 잭슨이네.”
“크흠! 오늘따라 잘 안 맞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어린 집사에게 고삐를 넘겼다. 로벨이 복귀한 것을 본 펄프 대장은 10분 간 휴식을 명령하고 다가왔다. 연병장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어때?”
해가 바뀌어도 머리와 꼬리가 없는 질문은 여전했다. 펄프 대장은 콧수염을 쓰윽- 밀고 말했다.
“용병생활 33년 만에 최악입니다!”
로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영지수익의 절반을 먹어치우는 용병단이 최악이라니, 아주 슬픈 일이었다. 펄프 대장은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소대장은 항상 올해가 최악이라고 말하는 법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나쁘지 않습니다. 어느 용병단하고 붙어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무엇보다 영주님에 대한 신뢰가 대단합니다. 최강의 기사가 이끄는 용병단이란 자부심이 실력향상에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
“숫자가 좀 더 되면 3열 사격(3줄로 서서 사격-장전-사격을 교대로 하는 사격술)이나 조수사격(한 명은 사격만하고, 한 명은 장전만하는 2인 1조 사격술)도 할 수 있겠는데, 그게 조금 아쉽습니다. 우선 되는대로 훈련시켜 보겠습니다.”
“그래.”
로벨은 높낮이가 제각각 다른 ‘그래’를 세 번 하고, 성(Citadel)을 지나 성(keep)으로 들어갔다. 마침 메인 홀에 마녀 키르케가 나와 있었다.
“기사님! 아이참, 조금만 일찍 오시지. 방금 손님이 다녀갔어요.”
“손님?”
“페... 페... 뭐지? 페잘? 펜잘? 그런 기사님이 보낸 사람이었어요.”
로벨은 그런 이름이 있나 머릿속 인명사전을 뒤져보았다. 전투마를 치우고 따라온 어린 집사가 한숨을 섞어 정정해주었다.
“페르젠 백작이겠죠.”
“아! 맞아요!”
“저 마녀는 왜 이름을 못 외우지?”
“그래도 편지는 보관할 줄 알죠. 여기요.”
로벨은 페르젠 백작가문의 인장을 확인하고 손톱으로 뜯었다. 로벨이 편지를 읽는 동안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얼굴에 ‘호기심’이라 써놓고 기웃거렸다. 긴 내용은 아닌지 금방 읽었다. 그러나 뭐가 부족한지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막 질문하려던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기운이 빠져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로벨은 두 번째 정독을 끝내고 편지를 어린 집사에게 주었다. 키가 비슷한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나란히 편지지를 잡고 읽었다. 수려한 문장과 멋들어진 글씨를 보아 천생 무골인 페르젠 백작이 직접 쓴 편지는 아닌 듯한데, 그 내용만큼은 페르젠 백작다웠다.
“토너먼트 초대장이잖아요? 이런 걸 왜 영주님한테 보낸 거죠?”
“그랜드 챔피언에 대한 예우 아닐까요?”
“그런 무례한 짓을 한다고요?”
토너먼트 시합은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위험천만한 스포츠였다. 요즘은 일대일 주스트(Joust)가 주류라 그나마 사상자가 적지만-없지는 않다- 과거 단체전인 밀리(Melee)가 성행할 때는 사망자가 ‘반드시’ 발생할 정도였다. 심지어 한 시합에서 100명이 넘는 기사가 사망한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그런 위험한 스포츠인 만큼 참가를 요구하는 일은 암묵적으로 지양되었다. 승낙하면 죽을 수 있고, 거절하면 겁쟁이가 되기 때문에, 어지간히 앙심이 있는 게 아닌 이상 토너먼트에 나오라고 초대, 혹은 도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딱히 초대하지 않아도 젊은 기사는 명예를, 가난한 기사는 일확천금을 얻을 기회로 여겨서 참가자가 부족한 일은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로벨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선수가 아니라 손님으로 초대야.”
주빈(主賓, Ehrengast)이란 단어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어린 집사가 감탄하고, 마녀 키르케가 한참 뒤에 따라 감탄했다.
로벨 로드릭의 이름으로 개최되는 첫 토너먼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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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몇 안 되는 로벨의 옷을 꺼내서 상하의 색깔을 맞추었다. 그 유명한 페르젠 백작의 주빈으로 초대되었으니, 귀족으로서 대단한 영광이었다.
“영주님을 어지간히 좋게 봤나 봐요?”
“그런가?”
“하긴, 가만 생각하면 영주님 덕을 톡톡히 보았죠. 후계자 전쟁 때는 팔콘 요새를 거저 점령했고, 사트로 후작가와 전쟁 때는 강철성을 날로 주워 먹었으니, 양심이 있으면 보답을 해야죠. 암요. 암.”
“그런가?”
로벨의 여행준비가 끝날 때쯤 울프 용병단의 출진준비도 마무리되었다. 애꾸눈 볼포스를 비롯한 최정예 울프 10명이었다. 정예기준은 대단히 주관적인데, 값비싼 아바레스트를 소지했거나, 고급스러운 브리간디(Brigandine: 철판을 이어붙인 갑옷)를 입은 용병으로 선발했다.
“영주님의 호위병이 이 정도 위엄은 있어야죠!”
“어이구! 가난한 용병은 위엄 없어서 어디 살겠나.”
싸구려(?) 하이드 아머를 입은 용병이 투덜거렸다. 어린 집사는 도리어 호통쳤다.
“급료 받으면 놀고 먹는데 다 쓰는 게 누군데요? 돈 모아서 갑옷이나 챙겨 입어요!”
“돈을 모으라고?”
“용병짓 하면서?”
“푸흡! 풉! 푸하하하!”
울프 용병단은 재미난 농담이란 듯 껄껄 웃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용병들에게 저금이나 투자 같은 것은 농담거리였다. 꼭 죽을 처지가 아니더라도, 용병업계의 문화가 그러했다.
“하여간 하루살이 인생들이란...!”
어린 집사는 학을 떼고 돌아섰다.
로벨이 컴포지트 아머로 반(半) 무장하고 나왔다. 하루살이 인생도 고용주는 받드는 법이라 입을 꾹 다물었다.
로벨은 전투마에 올라 영주 대리인 펄프 대장에게 명령했다.
“내가 늦어도 예정대로 회색산에 용병을 보내. 소금운반에 호위 병력이 필요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북쪽 숲을 잘 살펴봐. 겨울잠에서 깬 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아 나올 때가 많아. 영지민이 숲에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하고.”
“그리 하겠습니다.”
로벨은 몇 가지 더 당부한 후 성문으로 전투마를 몰았다.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애꾸눈 볼포스, 아야와 이야카, 그리고 9명의 ‘위엄 있는’ 용병이 뒤따랐다. 어린 집사가 뒤로 걸으며 성문이 안 보일 때까지 잔소리했다.
“페르젠 시티까지 이틀 거리에요. 토너먼트와 우승축하 연회 치르면 8일 정도 걸려요! 그 기간을 못 참고 딴짓하면 가만 안 둬요! 술 창고에 술통 훔쳐 먹으면 전원 감봉이에요! 숲에서 사냥하지 마요! 숲지기가 다 알려주기로 했어요! 영지민들 바쁘니까 방해하지 마요! 그리고 또...”
펄프 대장은 귀를 틀어막고 중얼거렸다.
“저 잔소리 안 듣는 것이 휴가로군.”
“내가 이래서 소금광산 가려잖소.”
외팔이 더치가 진지하게 동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