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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33화 (33/605)

33화. 관세

33화. 관세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었다.

얼어붙은 땅은 주는 것 하나 없이 가져가기만 하고, 차디찬 하늘은 쓸모가 없는 눈송이만 뿌려놓았다. 헐벗은 초목은 숨을 죽여 웅크리고, 굶주린 짐승은 적막한 황야에서 소리 없이 쓰러졌다. 치열한 여름날과 풍요로운 가을밤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 춥다. 아, 춥다. 아, 춥다.”

어린 집사가 물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이음새에 살얼음이 껴서 망치로 때려야 했다. 얼지 말라고 밀짚을 두껍게 깔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물통 안에 물은 대포알로 써도 될 만큼 꽁꽁 얼어있었다.

어린 집사는 혹시나 해서 망치로 두드려보았지만 통짜 얼음이라 깨질 조짐조차 없었다.

“할 수 없네.”

어린 집사는 물통을 뒤로 잡고 질질 끌며 성안으로 향했다.

로벨은 집무실 벽난로 앞에서 갑옷을 손질 중이었다.

사슬갑옷은 모래통에 넣어 굴리는 것으로 대부분의 녹과 이물질을 제거할 수 있지만, 판금갑옷은 그러지 못해 기름과 헝겊으로 일일이 닦아내야 했다. 사슬갑옷에 비해 가볍고, 단단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단점이 있었다.

로벨이 오른쪽 각반을 다 닦고 잠깐 숨을 돌릴 때, 어린 집사가 방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으아! 추워요! 너무 춥다고요!”

로벨은 예의가 없다고 한마디 하려다가 새빨개진 귓불과 손등을 보고 그냥 벽난로에 장작을 넣었다.

“이리 와.”

어린 집사는 사양하지 않고 쪼르르 달려와 불가에 웅크리고 앉았다. 먼저 와 자리 잡고 있던 이야카가 못마땅하게 힐끔 보고 몸을 반대로 돌렸다.

영주와 집사와 늑대가 말없이 불을 쬐며 소일거리를 했다. 창밖에 사리 눈 내리는 소리, 벽난로의 장작이 갈라지는 소리, 늑대의 곤한 숨소리, 로벨의 갑옷 닦는 소리가 나른하게 감돌았다.

어린 집사는 이야카의 부드러운 꼬리를 주물럭거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로벨은 윤이 나는 플레이트(앞부분)를 내려놓고 백 플레이트(뒷부분)를 줍다가 문뜩 배고프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오전 내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쾅!

“이익! 다들 여기 있었군요!”

“컹! 컹!”

마녀 키르케와 늑대 아야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로벨은 노크 좀 하라고 잔소리할까 하다가 역시나 그만두었다. 잔뜩 골이 난 것이 말한다고 들을 폼이 아니었다.

마녀 키르케는 이야카를 끌어안고 침 흘리며 자는 어린 집사를 두드려 깨웠다.

“물 가져오라니까! 여기서! 잠을 자면 어떡해욧!”

어린 집사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변명했다.

“무, 물이 얼어가지고... 녹여서 가져가려고...”

“물이 아니라 개념이 녹았네! 굶기 싫으면 일어나요! 밥이 저절로 되는 줄 알아요?”

“컹컹! 컹!”

무엇 때문인지 성난 아야도 고이 자는 이야카의 귀를 물어뜯으며 짜증을 발산했다. 이야카는 ‘깨갱!’ 소리를 내며 꼬리를 말고 누이의 눈치 보았다.

‘사람이나 늑대나...’

로벨은 손질이 끝난 갑옷을 차곡차곡 정리한 후 망토를 챙겼다. 마녀 키르케는 어린 집사의 볼을 꼬집다가 로벨이 외출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기사님? 어디 가세요? 점심 먹을 시간인데요?”

“한 바퀴 돌고 올게. 먼저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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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힘든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았다. 특히 따뜻한 오베리아 지방에서 온 전투마에게 볼탄 반도 북부의 겨울은 지나치게 추웠다. 옷을 입히고, 신발도 신겼지만, 영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안녕?”

로벨이 마구간으로 들어오자 전투마가 ‘푸르릉!’ 소리를 내며 환영했다. 로벨은 전투마의 볼을 두드리고 잘 빗겨서 반질반질한 몸통과 깨끗히 씻긴 엉덩이를 살폈다. 다행히 병나거나 아파 보이지 않았다.

“가만있는 게 더 힘들지?”

로벨은 마구간 구석에 쌓인 안장 중 승마용으로 만들어진 작은 안장을 꺼냈다. 오동나무 재질에 가죽과 금속을 최소한으로 사용한 안장이라 전투용 안장보다 가벼웠다. 머리가 좋은 전투마는 산책하러 나가는 것을 알고 콧김을 뿜으며 좋아했다.

로벨은 손수 안장을 올리고 등자를 조절했다. 꼭 로벨이 아니더라도 십수 년의 종자 생활을 겪은 기사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좋아. 몸 좀 풀자.”

로벨은 등자를 밟고 망토를 뒤로 젖히며 안장에 올랐다. 망토 자락이 말 엉덩이를 덮으며 품위 있게 자리 잡았다.

로벨은 말고삐를 늘어트리고 알아서 움직이게 내버려두었다. 신이 난 말은 앞다리를 높이 들고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작년과 사뭇 달라진 풍경이었다. 우선 성문 앞에 경비서는 용병이 있었다.

“남작님, 시찰 나가십니까?”

“응.”

“펄프 대장을 불러올깝쇼?”

“아니.”

로벨은 손을 흔들어주고 천천히 성 앞 언덕길을 내려갔다.

눈 덮인 로드릭 마을은 잡목이 우거진 여름날과 달랐다. 굴뚝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와 길 잃은 겨울새의 지저귐 외에는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깨지기 쉬운 유리잔 같기도 하고, 창고 깊숙한 곳에 놓인 그림 같기도 했다.

다그닥. 다그닥. 닥. 닥. 다그닥.

로벨은 눈을 쓸어낸 마른 길을 따라 그림 속 풍경에 들어갔다. 멀리서 볼 때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생기가 감돌았다.

허름한 나무창문 뒤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오고, 수탉과 암탉들이 홰를 치며 싸우고, 털이 홀라당 벗겨진 양들이 옹기종기 모여 체온으로 몸을 녹였다.

추수제를 열거나, 포고문을 낭독하거나, 그런 일은 거의 없지만 사형 집행을 위해 교수대를 설치하는 마을광장으로 들어갔다. 추위를 모르는 꼬마들이 “와와~” 소리치며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로벨은 우수한 기사이자 숙련된 지휘관의 눈으로 꼬마군대의 전술적 우위를 분석해 보았다. 사냥꾼 찰드의 손자를 필두로 한 동군(東軍)이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처마 위의 눈을 쓸어와 물자를 보충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 집 어른들은 질색하겠지만.

“My Lord?”

로벨은 전투마를 세우고 옆을 보았다. 늙은 촌장이 설인 같은 몰골로 나와 있었다.

“날이 추운데.”

로벨은 걱정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고목껍질 같은 입술 사이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입김이 안쓰러웠다. 촌장은 구부정한 허리를 좀 더 깊이 굽혔다.

“나이만 먹은 늙은이를 걱정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디 가는 거야?”

“손님이 와서 마중 나가는 중입니다.”

“나?”

로벨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촌장은 손을 저었다.

“영주님은 주인님이시지요. 행상인이 찾아왔습니다.”

“이 계절에? 드문 일이네.”

겨울 여행은 국왕폐하도 삼가는 법인데, 상인이 눈 내리는 땅을 여행한다는 게 신기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왜?”

“영주님이 옆에 계시면 아무리 독한 상인이라도 기가 죽지 않겠습니까.”

로벨은 성에서 기다릴 식구들을 잠깐 생각하지만, 행상인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고, 또 좋은 물건을 사면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좋아할 듯도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은 고삐를 살짝살짝 당겨 늙은 촌장 뒤를 따르게 했다. 눈싸움 중인 꼬마가 영주님과 촌장님을 발견하고 두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방심한 대가로 뒤통수를 하얗게 물들였다.

로벨은 망토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뭐 살 거 있어?”

“영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양떼 덕분에 무사히 겨울을 나고 있지만, 아무래도 곡식이 모자라지 않습니까?”

겨울철 식량이 부족한 마을을 찾아다니며 귀리 한 줌, 보리 한 줌으로 비싸게 되팔 수 있는 생가죽과 금속식기를 모으는 상인이었다. 겨울 여행의 고단함만 견딜 수 있다면 크게 남는 장사를 하는 상인이었다.

마을 공용 창고에 촌장의 사위 지미를 비롯한 영지민이 모여 있었다. 영지민은 느닷없이 나타난 로벨에 당황해서 머리를 숙였다.

“영주님이 어인 일로...”

‘영주님’이란 말에 상단 일꾼들 얼굴이 안 좋아졌다. 영주의 허락도 없이 장사하려 했으니 재수 없으면 목이 날아갈 일이었다. 물론, 이만한 일로 사람을 죽이는 잔인무도한 영주가 흔치는 않으니, 끽해야(?) 돈 좀 뺏고 채찍질이나 한 다음 풀어주는 편이었다.

뱃살이 두툼한 상단주가 후다닥 튀어나와 전투마 앞에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영주님, 안 그래도 지금 막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영주님께서 무얼 좋아하시나 알아보려고...”

“어? 그런 거야?”

“나한테는 냄비가 몇 개인지만 묻던데?”

순박한 영지민들이 상단주의 염장을 질렀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상단주 앞으로 걸어갔다.

“곡물 상인이야?”

“곡물 말고도 이것저것 취급하지만, 이 시기에는 굶주린 사람들을 돕고자 곡물로 장사, 아니, 봉사하고 있습니다요.”

“좋은 일 하네. 계속해 봐.”

로벨은 전투마를 끌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상단주는 쉬이 마음을 놓지 못했다. 세금 폭탄까지는 아니어도, 진상품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골 영주들이었다.

“이번 겨울에 짠 양털이오. 이걸 다 줄 테니 귀리를 주시오.”

촌장이 양털 자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상단주는 로벨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상품을 확인했다.

“큼. 크흠. 아주 엉망이오! 양털을 깎아 본 적이 없는 모양이오? 이런 하급품은 살 수 없소이다.”

흥정의 기본은 흠을 잡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하고도 15년을 더 산 촌장은 만만치 않았다.

“어차피 옷감으로 짜거나 양털유로 찔 거 아니오? 누가 양털을 몸에 심기라도 하오?

“보관이 잘못 되었다는 뜻이오. 여기 보시오. 색이 누렇고 시큼한 냄새가 나지 않소? 이런 건 길드의 장인들이 질색한다오.”

“영주님의 양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다니! 오오! 이런 황망한 일이 다 있나!”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올리고 거래를 구경했다. 오랜 습관이 도움 되었다. 상단주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여, 영주님의 양이라고?”

촌장은 로벨을 한번보고 소리 낮춰서, 그러나 상단 일꾼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속삭였다.

“우리 마을의 양들은 모두 로벨 로드릭 남작의 소유물이오. 혹시 모르고 계셨소? 그랜드 챔피언으로 널리 알려지신 분이라오. 요즘은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계시지.”

“로,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은 왜 나를 부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상단주는 화들짝 놀라 말을 바꿨다.

“내가 잘못 봤소이다. 겉만 이렇고 속은 멀쩡하오. 아주 좋은 상등품이오. 제값을 쳐주리다.”

로벨 덕분에 거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상단주는 귀리와 보릿자루를 다섯 개 내려놓고 양털자루를 꽉꽉 채웠다. 로벨은 거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단주에게 다가갔다.

“어때?”

상단주는 한겨울에도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저, 저, 무슨 말씀이신지요?”

“먹고 살만해?”

“예, 예, 영주님의 배려로 입에 풀칠하고 있습니다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상단마차에서 양털자루 두 개를 번쩍 들어 내렸다. 상단주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건 왜...”

로벨은 전투마 엉덩이에 자루를 차곡차곡 쌓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마을 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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