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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32화 (32/605)

32화. 양털

32화. 양털

로벨은 자꾸 투레질하는 전투마를 달랬다. 피 냄새에 흥분했는지, 병장기 소리에 화가 났는지 거센 콧김을 뿜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아니야. 침착해.”

로벨은 전투마의 갈기를 쓸어내렸다. 기운 넘치는 오베리아 산 거마는 주인의 부드러운 손길에 겨우 진정했다. 그러나 눈앞의 전장은 진정될 낌새조차 없었다.

“모여! 모이라고!”

“버텨랏!”

외팔이 더치가 지휘하는 풋맨 35명이 급조한 스쿠툼(Scutum: 타원형 대형방패)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짜증과 분노를 발산했다. 그 정면에서는 버질 용병단인지 퍼질 용병단인지 헷갈리는 도적 무리가 신나게 화살을 쏘아댔다.

울프 용병단을 고용한 배불뚝이 자작이 초조하게 물었다.

“로벨 남작, 정말 저대로 괜찮겠소?”

“...아마도?”

로벨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배불뚝이 자작은 영 믿음이 안 가는지 몸을 비틀었다. 그때마다 배불뚝이 자작을 태운 조랑말이 숨을 헐떡였다. 저 커다란 덩치에 70파운드는 족히 나갈 틸트 아머(Tilt Armor: 마상시합 전용 갑옷. 대단히 무겁다)까지 입었으니 서 있는 것이 용했다.

로벨은 삐쩍 마른 조랑말을 안쓰럽게 쳐다보고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오! 성공했소! 측면을 잡았소이다!”

애꾸눈 볼포스가 이끄는 아처 20명이 우회기동에 성공했다. 언덕 아래에 파비스를 설치하고 일제히 쿼럴을 쏘았다.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눈짓했다. 펄프 대장은 둘둘 말아놓은 깃발을 풀어 크게 흔들었다.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로 왼팔을 대신하는 버클러(Buckler: 소형방패)를 쾅쾅! 두드렸다.

“이 자식들아! 기사 나리의 신호다! 전진! 전진해라!”

울프 용병단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남쪽에서 압박했다. 전투기술은 좋지만, 전술능력이 부족한 전직 용병대장 겸 현직 도적두목은 포위당했다는 위기감에 고지를 내어주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좋아. 예상대로야.”

지금껏 지켜본 바로, 도적들은 조금만 불리해도 곧장 도망쳤다.

도적은 용병과 달라 싸운다고 돈이 나오지 않았다. 돈이 안 되는 싸움이니 적극적일 리 없었다.

로벨은 전투마를 몰아 전장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과묵한 몬트, 코골이 바디, 겁쟁이 데비 등 최고참 울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펄프 대장이 각종 병장기를 짊어지고 따라오며 말했다.

“꼭 섬멸해야 합니까? 쫓아내는 거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동업자 의식이야?”

“저런 놈들을 동업자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우리 애들이 다칠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로벨은 아멧의 바이저를 내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섬멸해야 해.”

펄프 대장은 경무장 보병을 상대하기 좋은 라이트 랜스를 골라 내밀었다. 로벨은 랜스의 길이와 무게를 확인한 후 랜스 레스트에 걸었다.

“‘울프 용병단’이란 이름만 들어도 도망치게 할 거야. 그럼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잖아?”

펄프 대장은 고용주의 장대한 목표를 듣고 입을 떡 벌렸다. 로벨은 그 입에 흙먼지를 넣어주었다.

“이리얏!”

로벨과 스피어맨이 북쪽길을 차단하고, 외팔이 더치와 풋맨이 언덕을 돌아 남쪽으로 치고 올라가고, 애꾸눈 볼포스가 언덕 위에서 화살을 쏟아냈다. 도적들은 처지가 비슷한 용병들이 이처럼 철저하게 압박할 줄 몰랐다.

“나랑 무슨 원수진 게 있다고!”

유언치고 조야했다. 로벨은 그림 같은 랜스 차칭으로 도적두목의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버질 용병단인지 퍼질 용병단인지 끝내 알 수 없게 되었다.

두목의 죽음은 안 그래도 메마른 도적들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전열이고 뭐고 없이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다가 외팔이 더치와 애꾼눈 볼포스에게 학살당했다.

펄프 대장은 쓸 일이 없어진 병장기를 주섬주섬 싸며 중얼거렸다.

“저 기사 나리 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군. 적으로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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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전쟁 후유증을 앓는 볼탄 반도 각 지역을 순례했다.

에릭 공작처럼 상시 동원이 가능한 ‘군대’를 가진 영주는 흔치 않았다. 대다수의 영주들은 영내 치안을 유지할 수준의 소규모 군사를 유지하고, 전시에만 영지민을 징집하거나 용병단을 고용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훌륭한 방침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있었다.

살인과 약탈을 장기 삼는 용병들이 영지의 빈약한 수비 상태를 알고 도적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영주가 전쟁에서 지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급료를 지급하지 않을 때는 더욱 심각했다.

“1페닝 아끼려다가 1000페닝 날아간 꼴이네요.”

마녀 키르케가 신랄하게 말했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가 화급히 입을 막았지만 조금 늦었다. 정수리가 벗겨진 늙은 남작이 얼굴을 붉혔다. 로벨이 없었으면 한바탕 칼춤을 추었을지도 모른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걸치고 말했다.

“굴뚝 용병단을 처리했소.”

“굴뚝새 용병단이오.”

“...굴뚝인지 굴뚝새인지 중요하지 않을 거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못할 테니까.”

늙은 남작은 거미 다리를 연상시키는 마른 손가락으로 금화 주머니를 던졌다. 그리고 돈이 아까워서인지, 구겨진 자존심 때문인지 비아냥도 한 줌 던졌다.

“국왕폐하가 인정한 기사 중에 기사 로벨 로드릭 남작이 천한 용병짓이라니... 부끄럽지 않소?”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금화를 던져주고 몸을 돌렸다.

“천한 용병한테 죽을 뻔한 것은 부끄럽지 않소?”

로벨은 피식 웃고 늙은 남작의 성을 나왔다. 하인과 하녀들이 시체 같은 눈으로 훔쳐보았다. 주인을 닮아 하나같이 생기가 없었다.

“기분 나쁜 곳이야.”

“어느 성이나 이런 분위기입니다. 영주님의 성이 특이한 편이죠.”

“우리 성이?”

“어린이와 강아지가 뛰어노는 성이 어디 흔하겠습니까?”

로벨과 울프 용병단 지난 스무닷새 동안 다섯 번을 싸워 모두 승리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전투는 꽤 힘들었지만, 세 번째 전투는 손쉽게 승리했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전투는 싸울 필요도 없었다. 로벨 로드릭과 울프 용병단의 이름을 듣고 자진 해산했기 때문이다. 깃발 들고 행군한 것만으로 도적떼가 사라졌으니 늙은 남작의 심통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걸로 볼탄 반도 남쪽의 도적 무리는 거진 소탕되었습니다.”

영주와 상인에게 뜯어낸 의뢰비와 전리품이 대단했다. 전공을 세운 용병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고도 7천 페닝이 남았다. 어린 집사가 기뻐할 것이 눈에 선했다.

“농사보다 돈이 되네.”

펄프 대장이 껄껄 웃으며 설명했다

“지금이 성수기라 그렇습니다. 전쟁도 끝났고, 도적떼도 사라졌으니 한동안 용병 노릇하기 팍팍할 겁니다.”

전쟁이 나면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이유가 있었다. 그 덕분에 로벨도 한 몫 벌었지만, 장기적으로 할 짓은 아니었다. 가장 안정적인 수익은 역시 땅이었다.

“추경지를 개간하고, 목초지를 정비할 거야. 인구가 늘었으니까 일거리도 늘려야지.”

“어린 집사가 좋아하겠군요.”

“가장 좋아할 것은 이 녀석들이지.”

로벨은 엄마가 돌아왔다고 깡충깡충 뛰며 좋아하는 아야와 이야카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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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30일 만에 로드릭 영지로 돌아왔다. 전쟁이 한창일 때보다 위험하고 바쁜 시간이었다.

어린 집사와 영지민이 성 앞 언덕길에 모여 타지에서 돈 벌고 돌아온 병사들을 기쁘게 맞아주었다.

“영주님 만세! 울프 용병단 만세!”

“로벨 로드릭 남작 만세! 로드릭 마을 만세!”

농사일이 바빠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환영을 받으니 개선하는 기분이 들었다.

로벨은 성문 앞에서 울프 용병단을 해산시키고 전투마에서 내려 어린 집사와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갔다. 무뚝뚝한 가장들이 그러하듯 애정 어린 말보다 돈주머니를 먼저 내밀었다.

“와! 뭐 이리 많아요?”

“많이 죽였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무섭잖아요.”

용병 사업이 돈이 되는 것을 알았으니 기회가 될 때마다 군사를 보내겠지만, 로벨이 직접 전투에 나설 대규모 전투는 한동안 없을 것이다.

로벨은 아멧을 벗고 땀에 찌든 머리카락을 털었다. 로벨을 졸졸 따라오던 아야와 이야카가 갑자기 말구유와 건초더미에 관심을 가지고 떠났다. 어린 집사는 코를 막고 말했다.

“겨울을 날 식량을 살까요? 아니면 축사를 짓고 가축을 들일까요?”

로벨은 머리카락이 곤두선 수사자 몰골로 말했다.

“일단 좀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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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추수가 시작되었다.

여름이 가물었던 탓에 작황이 좋지 않았다. 개울가에 위치한 밀밭은 그럭저럭 예년 수준이었지만, 영지민의 주식인 귀리밭은 반도 여물지 않았다. 씨알이 몇 알 안 되는 쭉정이가 대부분이었다. 농부들은 대형낫으로 귀리를 쓸어내면서도 한숨을 푹- 푹- 내쉬었다.

로벨은 성벽 위에서 힘 빠진 가을걷이를 내려다보다가 망토를 챙겨 나온 어린 집사에게 물었다.

“그 행상인이 이름이 뭐였지?”

“무슨 행상인이요?”

“고기랑 가죽을 가져오는 키 작은 행상인 말이야.”

“헨리 상단의 헨리 피터요? 히힛! 이름이 입에 착착 감기지 않나요?”

“그 상인이 가축도 취급하지?”

“행상인이 가리는 게 어디 있겠어요. 돈이 되면 다 취급하죠. 근데 가축을 사게요?”

“양이 좋겠어.”

로벨은 10년 넘게 방치된 목초지를 보았다. 축사를 새로 짓고 울타리도 보수해야 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는 대로 일을 시작할 작정이었다.

“양 좋아요! 치즈도 만들고, 옷도 만들고, 기름도 짤 수 있으니까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마냥 순수하지는 않았다.

“저 망할 늑대들을 부릴 때가 됐군요. 목양견으로 훈련시켜볼까요?”

“...늑대한테 양을 맡긴다고?”

로벨은 그게 가능한 일인가 고민해 보았다.

로벨은 품종 좋은 잉그비아 왕국산 양을 50마리 구해서 새로 정착한 영지민에게 나눠주었다.

영지민은 집 안에서 가축을 키우기 때문에 큰 축사가 필요 없었다. 양젖과 양털을 팔아 생계를 꾸릴 수도 있었다.

영지민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루에 한 번씩 양젖을 가져왔다. 영주님도 행복하고, 마녀 아가씨도 행복하고, 늑대 남매도 행복했지만, 어린 집사만큼은 행복하지 않았다.

“또! 또 남 좋은 일만 하고!”

“에헴! 그게 바로 기사님의 매력이죠!”

“그쪽은 좀 조용해요!”

로벨은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양젖을 한 모금 마시고 어린 집사에게 주었다. 어린 집사는 툴툴거리면서도 양젖을 깨끗이 비웠다. 마녀 키르케는 빈 병을 받고 울상이 되었다.

“그래도 매일 우유를 마실 수 있잖아.”

“우유 가지고 되겠어요? 고기도 썰고, 옷도 만들고, 기름도 짜야죠!”

“새끼를 낳을 거야. 새끼 낳으면 가져오자.”

로벨은 어린 집사를 위로했다. 어린 집사는 굳게 다짐시켰다.

“새끼 치면 무조건 받아와요! 양치기를 고용해서라도 직접 키우겠어요!”

그러나 로벨을 너무 쉽게 믿었다. 로벨은 양이 새끼를 낳자 사들이는 형식으로 돈을 주고 영지민에게 다시 위임했다. 사실상 잘 키웠다고 하사금을 내려준 것이다. 어린 집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지만, 로벨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양들의 주인은 로벨인데, 우유를 짜서 치즈를 만들어 먹고, 양털을 모아 옷을 지어 입는 것은 영지민이었다. 로벨은 목초지 관리명목으로 약간의 세금을 거두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늑대한테 양을 맡겼지!”

늑대(?)는 치즈를 맛보고 미소지었다. 그 늑대 덕분에 볼탄 반도 북부의 한 마을은 푹신한 양털을 안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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