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사업
31화. 사업
로벨처럼 기사 작위를 세습 받아 기사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7, 8살에 시동(Page)이 되어 기초적인 교양과 잡일을 배우고, 15, 6살에 종자(Squire)가 되어 검술과 마술(馬術)을 익힌 후, 20살이 넘어 실력과 품성을 인정받으면 주군, 혹은 스승(Master)에게 서임을 받아 기사가 되었다.
옛날에는 말과 갑옷만 갖추면 누구라도 기사라 자칭할 수 있었지만, 사회제도가 발전된 지금 기사 사칭은 중죄라 교수대에 매달려도 할 말이 없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사 서임을 받아야했고, 그런 까닭에 종자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이의 열정을 쉬이 뿌리칠 수 없었다.
“난 종자를 두지 않아.”
“...주군을 잃은 종자를 그냥 두실 겁니까.”
‘너 돕다가 직장 잘리고 고향에서 쫓겨났는데 책임 안 질 거냐’는 완곡한 항의였다. 심성이 착한 로벨은 ‘응. 그럴거야’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음... 그러니까... 난...”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어린 집사도 핑계거리를 찾지 못했다. 머를 브릭은 기사 서임과 가문과 목숨을 걸고 도왔는데,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안 된다 할 수 없었다.
머를 브릭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롱소드가 무거워서보다 수치스러워서였다. 로벨은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롱소드를 받았다. 머를 브릭은 감격, 행복, 안도가 뒤섞인 얼굴로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로벨은 새것처럼 깨끗한 머를 브릭의 롱소드를 살펴보고 돌려주었다.
“나도 잘 부탁해.”
누가 봐도 잘 부탁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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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만 하루 만에 종자를 들인 것을 후회했다. 머를 브릭은 아침 훈련부터 저녁 집무까지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녔다. 로벨은 하루 종일 감시당하는 상태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린 집사가 참다못해 화를 냈다.
“종자면 종자가 할 일을 해야죠! 마구간에 가서 전투마나 씻기세요!”
머를 브릭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침에 씻겼소.”
“그, 그럼 갑옷이라도 닦으세요!”
“점심식사 후 닦았소.”
어린 집사는 입을 딱 벌렸다. 게으르고 무능하면 쫓아내기라도 할 텐데, 부지런하고 유능해서 트집 잡을 곳도 없었다.
기사 종자 머를 브릭은 영주와 영주의 집사에게는 골칫거리지만, 영지와 영지민에게는 큰 힘이었다.
머를 브릭을 따라온 전 강철성 주민은 머를 브릭이 새 영주의 종자가 되자 안심하고 로드릭 마을에 정착했다. 기존의 로드릭 마을주민은 농민이 감히 맞설 수 없는 기사 종자 나리 탓에 텃새 비슷한 것을 시도조차하지 못했다. 그렇게 머를 브릭을 중심으로 낯선 듯 조심스럽게, 어색한 듯 쑥스럽게 섞여갔다.
로벨은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종자 머를 브릭을 대동하고 로드릭 마을을 시찰했다.
인구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난 만큼 시끌시끌하고 북적북적했다. 활기가 넘치는 만큼 할 일도 많았다.
로벨의 허가로 북쪽 숲을 벌목해서 새로운 영지민이 살 집을 마련했다. 장정들이 나무를 베고, 농마가 마을로 실어나르면, 손재주 좋은 목수를 중심으로 건설작업이 시작되었다. 톱질 소리, 대패질 소리, 망치질 소리, 사내들의 고함과 아낙들의 웃음이 뒤죽박죽으로 어우러졌다.
로벨을 본 영지민들은 일손을 놓고 조아렸다. 로벨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신경 쓰이게 말에서 내려 두리번거렸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탓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사회성이 부족한 목수의 대패질 소리만 서걱서걱 울렸다.
영주의 시찰소식을 듣고 촌장과 사위 내외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My Lord, 기별도 없이 어인 일로...”
“내 땅, 내 마을을 살피는 데 허락이 필요해?”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로벨은 조금 까칠했음을 인정하고 얼굴을 풀었다.
“잘 되고 있나 궁금해서 와봤어.”
“영주님의 크나큰 은혜로 아무 탈 없이 진척 중입니다.”
“내가 도울 일이 있어?”
촌장은 마을주민을 힐끔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으나, 작은 걱정이 있습니다.”
“괜찮아. 말해봐.”
“저, 그것이, 식량이 부족합니다.”
로벨은 애써 핀 얼굴을 다시 꾸겼다.
“굶는 사람이 있어?”
“아이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영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춘경지로 가을까지 배불리 날 수 있습니다. 허나...”
“가을 추수 이후가 문제다?”
“예. 입이 늘어난 만큼 작년 수준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더욱이 파종도 늦어서 수확량이 얼마나 될지...”
로벨은 즉시 해결책을 내주었다.
“추경지 세금을 새로 온 영지민에게 나눠줄게. 그리고 올해 방앗간 이용료를 감면해줄게.”
“악! 악!”
어린 집사가 새하얗게 질려서 소리를 질렀다. 늙은 촌장은 화색이 되었다가 다시 근심했다.
“영주님께서는 어찌하시려고 하십니까?”
“맞아요! 맞아! 영주님이 먹여 살릴 용병이 100명이라고요!”
마녀 키르케가 손가락을 꼽으며 정정했다.
“사실은 91명하고 3마리에요. 3마리 중 1마리는 여물만 먹으니까 제외해도 될까요?”
“아, 증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토지세를 안 받으면 저도 마녀도 굶어 죽어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성화에 추경지 토지세와 방앗간 이용료를 절반으로 줄이는 거로 합의했다. 어린 집사는 팍팍해진 운영자금에 쉴 새 없이 구시렁거렸다.
“정말 어쩌려고 그래요.”
“하지만, 굶어 죽게 둘 수 없잖아.”
“안 굶고, 안 죽어요. 농부들이 얼마나 억센 줄 아세요? 빵이 없으면 풀떼기랑 나무껍질로 배를 채워요. 악착같이 살아남는다고요.”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말 좀 해야겠어요. 영지민은 조금 굶어도 살지만, 용병들은 급료를 안 주면 도둑이 되고 도적이 되어요. 영주님이 신경 써야 할 것은 영지의 안전이잖아요? 100명이나 되는 도적떼가 과연 안전할까요?
마녀 키르케가 ‘기사님이랑 집사랑 나랑 빼면 88명...’ 어쩌고 중얼거렸지만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소금광산이 있잖아.”
“채굴량이 얼마나 될지 몰라요. 잘 나오면 도시도 살 수 있겠지만, 안 나오면 늑대들 간식도 못 사줄 수 있어요.”
“잘 될 거야.”
“에휴... 그것도 전쟁이 끝나야 시작할 수 있어요. 지금은 관리하는 사람도 없으니... 없...”
어린 집사는 무심코 종자 머를 브릭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골칫거리가 한 번에 해결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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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머를 브릭을 앉혀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너도 눈치 챘겠지만, 나와 용병단을 먹여 살리는 것은 소금광산이야.”
“후계자 전쟁의 공적으로 하사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관리가 안 되고 있어. 원래 펄프 대장이 책임지고 있었는데, 성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왔어.”
“용병답지 않게 충직한 자로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사실은 어린 집사가 한 말이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눈치를 살피고 운을 띄웠다.
“이제 네가 소금광산을 관리해줬으면 해.”
“제가 말입니까?”
머를 브릭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광산은 막대한 가치가 있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맡길 수 없어.”
“저를 그토록 믿어주시다니...”
머를 브릭은 감격해서 중얼거리다가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기사 종자는 마스터를 보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충직한 용병을 다시 보내심이 어떻습니까.”
이 정도는 예상했다. 로벨은 메인 홀 구석에 자리한 펄프 대장에게 눈짓했다. 펄프 대장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마녀 키르케가 써준 대본을 암송했다.
“코올록. 코올록. 이 몸이 노쇠한 까닭에 대퇴골과 경골이 맞닿아 통증이 심화하고, 허파가 축소되어 호흡이 난해하구나. 이러한 육신으로 높고 험한 회색산을 어찌 오르며, 깊고 어두운 광산을 어찌 찾을까. 아아,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로다.”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였고, 어린 집사는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로벨은 있지도 않은 수염을 만지는 시늉하며 물었다.
“너, 올해 몇 살이지?”
“18살 입니다.”
‘나랑 차이 안 나네.’
로벨은 속으로 생각했다. 로벨은 대외적으로는 22살로 알려졌지만, 로벨을 흉내 내는 ‘로벨’의 나이는 18살이었다. 로벨은 동갑임을 의식해서 목소리를 깔고 새삼 근엄하게 말했다.
“기사가 갖춰야 할 소양은 검술과 마술만이 아니야. 사람을 부리는 능력이 있어야 해. 이 임무는 기사가 되기 위한 수행이자 내가 내리는 시험이야.”
“시험이라 하시면...?”
“이 일을 무사히 마치면, 나 로벨 로드릭의 이름으로 기사 직위를 내려주겠어.”
이쯤 되면 세상에서 가장 꽉 막힌 기사 종자라도 거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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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를 브릭은 울프 용병단 5명과 함께 회색산을 출발했다. 소금광산을 관리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병력이지만, 전쟁이 끝나면 추가병력을 보내주기로 하고 쫓아내듯이 보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아무도 없는 영주 침실에서 기쁨을 나누었다.
“제가 생각해도 대단한 묘안이었어요!”
“응!”
“꽉 막힌 고집불통에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니까 수익을 빼돌리는 짓 따위 못할 거예요. 거기다 기사 서임이 걸려있으니 죽을 뚱 살 뚱 일하겠죠? 소금광산 관리자로 최고의 적임자에요!”
“응! 응!”
더불어 로벨의 정체도 숨길 수 있었다.
두 가지 골칫거리를 해결하자, 남은 골칫거리가 크게 다가왔다. 하나는 40일이 넘어가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가을 추수였다.
펄프 대장의 예상대로 추수기가 가까워지자 영주들이 하나둘 발을 빼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휴전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양측 모두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데다, 조지 도트넘 백작을 비롯한 주전파가 사라져서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에릭 공작은 강철성을 반환하고 덩굴성을 비롯한 2개 성과 3개 마을을 돌려받았다. 결과적으로 에릭 공작과 볼프 후작 모두 아무 소득이 없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싸운 거야.”
“용병만 배불렸지. 목숨이 붙어있으면 한 몫 단단히 잡았으니까.”
용병만큼이나 로벨도 소득이 있었다. 500명으로 늘어난 영지민과 기사 종자 머를 브릭, 그리고 연전연승의 명성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소득이 좋지만은 않았다. 촌장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알현했다.
“작물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왜?”
“올여름이 가문 탓도 있지만, 전쟁통에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입이 늘어났는데, 입에 넣을 것은 줄어들었다. 전쟁과 가뭄이 로드릭 마을만의 일이 아니니 볼탄 반도 대다수 영지가 비슷할 것이다. 어린 집사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세금도 절반으로 줄여줬는데, 뭘 더 해달라는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하여간! 하나를 들어주면 둘을 요구하고, 둘을 내어주면 열을 내놓으라 한다니까!”
늙은 촌장은 어린 집사의 질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벨이 어느 영주보다 어질고 자애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벨은 고심하다가 말했다.
“전쟁도 끝났으니 용병 숫자를 줄일까?”
“성과 광산을 지키기 위해서 100명이 필요하다고 말씀한 것은 영주님이에요.”
“그때는 영지민이 늘어날 줄 몰랐으니까. 추경지를 개간할 때까지만 숫자를 줄이는 것도...”
“안 돼요. 영주님처럼 생각하고 용병을 해산시키는 영주들이 많을 거예요. 그 용병들이 마음 다잡고 농부가 될 거라 생각하나요? 후계자 전쟁 때처럼 도적질하겠죠. 영지 규모가 커진 만큼 울프 용병단은 유지해야 해요.”
“그렇지만...”
그때 로벨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어린 집사의 아이디어와 똑같았다.
“용병 사업을 벌여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