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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30화 (30/605)

30화. 기사 종자

30화. 기사 종자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가 구해준 목발을 짚고 성 밖으로 나갔다. 부러진 곳은 갈비뼈인데 온몸이 다 아팠다.

‘이 몸으로 어떻게 싸웠지?’

로벨은 신음을 삼키고 자신을 칭찬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니까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로벨은 낑낑거리며 성 앞 언덕으로 이동했다. 간밤의 흔적이 가득했다. 시체와 피 웅덩이, 불탄 목책과 부러진 병장기, 흥분한 용병들과 겁에 잔뜩 질린 포로들.

바리게이트로 만든 포로 수용소에 조지 도트넘 백작군이 모여있었다. 외팔이 더치가 다년간의 용병생활로 습득한 갈굼을 시범 보이는 가운데, 펄프 대장이 로벨을 발견하고 목례했다.

“My Lord, 벌써 움직여도 괜찮습니까?”

“괜찮아.”

로벨은 포로 수용소 앞에서 전공과 피해, 그리고 조지 도트넘 백작의 처분을 보고받았다. 펄프 대장이 뿌듯하게 말했다.

“영주님께서 괴물을 처치해주신 덕분에 큰 피해는 나지 않았습니다. 깨지고 부러진 놈들이 대여섯 있는데, 잘 먹이고 푹 쉬게 하면 금방 멀쩡해질 겁니다.”

“까마귀 용병단은?”

“그놈들은 진작에 토겼... 도망갔습니다. 잉그비아 촌놈들이 눈치는 빨라가지고 영주님이 역습할 때 발을 뺏더군요.”

“저자들은?”

“멍청해서 도망도 못 간 징집병입니다. 사로잡아봐야 식량만 축나니 그냥 도망치게 놔두려 했는데, 그거 하나 못하더군요.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지쳐 쓰러진 놈도 있습니다.”

펄프 대장은 정말 재미있지 않냐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로벨은 갈비뼈가 아파서 웃어주지 못했다. 펄프 대장은 혼자 웃는 게 머쓱해서 금방 그쳤다.

“험. 험험. 아무튼 대승입니다. 영주님의 첫 승리이기도 하지만, 에릭 공작님의 첫 승리이기도 합니다.”

“아... 그렇네?”

“가만있어도 소문이 나겠지만, 그래도 자랑할 일이니 프란시스 시티에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로벨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생색내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 에릭 공작의 소집령을 거부한 것이 마음에 걸리던 차라 영지의 사정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어린 집사랑 이야기해봐.”

펄프 대장은 어린 집사가 거론되자 눈썹을 모으고 말했다.

“애꾸눈이 이쪽으로 밝으니 애꾸눈을 보내겠습니다.”

로벨은 속내가 빤히 보이지만 넘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지 백작은?”

“부패가 시작되어서 지하창고로 옮겼습니다.”

로벨은 절뚝거리며 로드릭 성 지하로 발을 옮겼다. 펄프 대장은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외팔이 더치가 주먹질을 시작하자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 가치를 두기로 했다.

“야! 그만해라! 포로 다 죽일 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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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수백 명이 머물다 떠난,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메인 홀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쪽에 웅크리고 숨어있던 아야와 이야카가 주인을 발견하고 꼬리를 흔들었다. 로벨은 두 남매를 차례로 쓰다듬어주고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어린 집사가 꼼꼼하게 관리하는 곡식창고와 맥주창고를 지나 가을추수를 위해 비워둔 마지막 창고로 들어갔다. 차디찬 땅바닥에 사늘한 시체가 누워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야.”

로벨은 조지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지만, 얼굴 반쪽이 뭉개져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숲에서 마주쳤을 때일까? 아니면 토너먼트에서 웨일 백작을 이겼을 때일까? 고명한 기사인 웨일 백작은 무재(武才)가 떨어지는 장남을 질책하며 비슷한 나이의 로벨 로드릭과 비교했을지 모른다. 조지 백작의 가슴 속에는 질투와 원망, 분노가 쌓여갔을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패배는 질투를 굴욕으로 분노를 좌절로 바꾸었다. 그 결과 인간이 해서 안 될 일을 저질렀다.

“마도의 수호자들은 한때 인간이었어요.”

마녀 키르케가 지하창고로 내려왔다. 두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조지 백작도 인간이었어.”

“마도의 길을 잘못 걸어간 것이죠.”

로벨은 벽에 걸린 거적때기로 조지 백작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한숨 쉬듯이 물었다.

“인간이 괴물로 변할 수 있어?”

“보통은 불가능해요. 실존하는 육체가 빈약한 정신을 지배하거든요. 스승님이 말씀하시길 슬픔과 분노로 정신이 나간 사람도 손톱 밑에 바늘을 꽂아주면 아프다고 소리치고, 강철 같은 의지의 고행자도 이레쯤 굶기면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해요.”

“이상한 예시잖아.”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스승이란 작자가 궁금해졌다.

“보통 사람이 인지의 세계, 마(魔)에 몸을 담그는 것은 불가능해요. 실존을 넘어선 심오한 지혜와 사악한 의식이 필요하거든요.”

“...이단 신앙?”

로벨은 머를 브릭을 떠올렸다. 조지 백작이 심취한 이단 신앙과 관계있을 것이다.

“요즘 이상한 일만 생기는 것 같아.”

마녀 키르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 세상은 항상 이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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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의 전쟁은 심화되어갔다. 에릭 공작이 친정하여 지난날 잃은 덩굴성을 탈환했으나, 닷새 뒤 볼프 후작의 친동생인 에반 사트로 백작이 붉은 수염 용병단을 끌고 와서 재점령했다.

전쟁경험이 풍부한 펄프 대장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다가 가을추수 직전에 휴전할 것이라 예측했다.

마녀 키르케가 아야 머리에 리본을 묶으며-왜인지 아야도 좋아한다-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왜 이렇게 싸우는 것을 좋아할까요.”

로벨은 튜닉 안으로 손을 넣어 아물어가는 갈비뼈를 더듬으면서 말했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싸움의 결과를 좋아하는 사람만 있지. 그래서 질 것 같은 싸움은 모두 싫어해.”

“기사님도요?”

로벨은 자신의 생각을 검증해보려다가 귀찮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 키르케는 활짝 웃었다.

볼탄 반도 전역이 전화에 시름 하고 있지만, 다행히 로드릭 영지만큼은 평화로웠다.

볼탄 반도 외진 곳, 인구 300명과 흔해 빠진 보리 말고 별다른 자원이 없는 로드릭 영지는 그리 탐나는 곳이 아니었다. 거저 준다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무패를 자랑하는 그랜드 챔피언과 악명 떨치는 울프 용병단하고 싸워서 얻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로벨은 공언했듯 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페르젠 백작이 주인 잃은 강철성을 공격, 반나절 만에 함락시키며 볼프 후작 심장에 칼을 들이밀었다.

강철성에서 사트로 시티까지 하루거리가 안 되었다. 남쪽으로 내려간 볼프 사트로 후작군은 서둘러 철수했다. 그 유명한 도트넘 가문이 작디작은 로드릭 가문에게 패배하고, 그것도 모자라 난공불락의 강철성까지 내어줄지는 예상치 못 했다. 로벨은 철저히 싸움을 피했으나, 로벨의 명성은 저절로 높아졌다.

프란시스 시티의 장미성에서는 대강 이런 대화가 오갔다.

“페르젠 백작의 공적이 대단합니다. 강철성을 단 하루 만에 함락시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글쎄요. 백작의 공적을 깎아 내리고 싶지 않지만, 조지 도트넘 백작의 부재가 영향이 컸습니다. 그리고 강철성 영지민의 불만도 한몫했지요.”

“그럼 로벨 로드릭 남작의 공도 무시할 수 없군요.”

페르젠 백작의 정적들은 페르젠 백작을 견제하기 위해 로벨 로드릭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고, 그 덕분에 로벨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마녀 키르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높은데서 떨어지면 아픈데...”

어린 집사가 별걱정 다한다는 듯 말했다.

“밧줄로 단단히 묶어놔요.”

로벨의 측근들은 쓸만한 밧줄을 찾아보았다. 에릭 공작 밧줄은 튼튼하지만 얼키설키 꼬여 있고, 페르젠 백작 밧줄은 가깝지만 칼집 내려는 사람이 많아 불안했다. 전쟁 걱정, 정쟁 걱정, 소금광산 걱정, 가을추수 걱정 등등이 쌓여갈 때, 썩 괜찮은 동아줄이 내려왔다.

“My Lord, 이런 꼴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주인 잃은 종자인 머를 브릭이 찾아왔다.

로벨은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롱소드를 휘두르다가 거지꼴로 나타난 머를 브릭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갑옷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더블릿과 브레(Braies: 쫄바지)도 너덜너덜했다. 눈썹 위로 가지런히 정리한 머리카락도 한 주먹 정도 뜯겨져서 혹이 난 것처럼 보였다.

“실업자의 고통이야?”

“예? 무슨 말씀인지...”

“아니야. 아무것도.”

로벨은 롱소드를 칼집에 밀어 넣고 두 팔 벌려서 머를 브릭을 환영했다.

“너한테 빚진 게 많아. 고마워. 그리고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해.”

머를 브릭은 “크으윽!” 소리를 내며 마주 두 팔을 벌렸다. 포옹하자는 뜻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로벨은 아차! 싶어서 재빨리 손을 치웠다.

기사와 종자의 아름다운 재회를 연출하려던 머를 브릭은 괴상한 자세로 굳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입을 틀어막았고, 지나가던 허풍쟁이 제이콥과 늙다리 잭슨은 낄낄거렸다. 로벨은 어색함을 덜어주기 위해 물었다.

“그날 어떻게 된 거야?”

머를 브릭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그래서 기어이 어린 집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다. “푸히힛!” 머를 브릭은 시뻘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조지 백작님... 이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주위 병사들을 모아 강철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강철성으로?”

“예. 영지민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제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강철성은...”

페르젠 백작군의 공격을 받았다. 머를 브릭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다시 도망쳐왔습니다. 저와 함께 온 사람이 150명입니다.”

로벨은 깜짝 놀라 어린 집사를 돌아보았다. 어린 집사도 처음 듣는 듯 화를 내었다.

“난민들을 데려왔다고요?”

머를 브릭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가족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오.”

“가족? 무슨 가족이요? 아, 포로들요?”

어린 집사는 이마를 짚었다. 책임질 입이 점점 늘어갔다. 로벨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생각하며 물었다.

“포로를 풀어주면 될까?”

“아닙니다.”

머를 브릭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로벨은 행정을 책임진 어린 집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영주가 팽개친 영지민이라면 못 받아줄 것도 없지만, 흐음... 숫자가 부담되네요. 포로들까지 합치면 200명이 좀 넘어요. 그만한 숫자를 통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그와 관련해서 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머를 브릭은 허리에 찬 롱소드를 뽑았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났다. 로벨은 반대로 한 걸음 내디뎠다. 몸을 왼쪽으로 비틀고, 머를 브릭의 목을 칠 수 있게 롱소드의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성실한 종자의 뜻을 잘못 짚었다. 머를 브릭은 롱소드를 두 손으로 받치고 머리 위로 올렸다. 기사가 주군에게 칼을 바치는 자세였다.

“브릭 가문의 장남 머를 브릭이 검과 명예를 바치고자 합니다.”

“응?”

“제 마스터가 되어주십시오.”

“...응?”

로벨 로드릭에게 종자가 생긴 날이었다.

썩 달갑지 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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