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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9화 (29/605)

29화. 기마돌격

29화. 기마돌격

하루에도 수차례씩 오르내리는 언덕길이었다. 눈 감고 말을 몰아도 될 정도였으니 어둠 따위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럇! 이리얏!”

로벨은 전투마의 옆구리를 세차게 걷어찼다. 사람과 말이 하나되어 달리자 그 기세가 대단했다.

조지 도트넘 백작군은 생존본능에 충실히 임해 앞다투어 길을 열어주었다.

“막아라!”

“백작님을 지켜라!”

그러나 모두가 겁쟁이는 아니었다. 조지 백작을 수행하는 기사들이 로벨의 앞을 가로막았다. 억지로 끌려온 농민병보다 체격도 좋고, 실력도 좋고, 무장도 좋지만, 높이와 속도를 장악한 로벨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로벨은 언덕을 달려 내려온 속도 그대로 부딪쳤다.

1,400 파운드 근육 덩어리에 치인 수행기사는 중력과 작별하며 튕겨나갔다. 그 옆에 수행기사는 요령 좋게 롱소드를 휘둘렀지만 컴포지트 아머의 두터운 퀴스(Cuisse: 허벅지 갑옷)를 부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로벨은 기사들을 돌파하고 조지 도트넘 백작 앞에 이르렀다. 창끝을 낮추고,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춰 신중하게 방향을 수정했다. 그 모두가 2초가 안 되는 순간이었다.

‘뚫는다!’

로벨은 랜스 차칭의 충격에 대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조지 도트넘 백작의 하얀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공이 확장되고, 볼살이 조금씩 떨리며, 입꼬리가 기이할 만큼 높이 올라갔다.

‘...웃어?’

로벨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지만, 공격을 취소하거나 방향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리고 해비 랜스가 조지 백작의 가슴을 때리는 순간, 불길함의 정체를 알아챘다.

쾅!

“큭!”

참나무로 만든 무거운 해비 랜스가 토너먼트 시합용 버드나세처럼 산산이 깨졌다. 로벨은 랜스 레스트를 넘어 가슴을 강타하는 충격에 고삐를 놓치고 떨어졌다.

쿵.

머리와 등이 땅에 닿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밤하늘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점차 까매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으으윽...”

로벨은 의식이 달아나려는 것을 억지로 붙들고 몸을 움직였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로벨이 옆으로 구르는 순간, 로벨이 누운 자리로 플레일(Flail: 도리깨 비슷한 무기, 편곤)이 떨어졌다. 땅바닥이 주먹 깊이로 파이고 흙더미가 들썩였다.

로벨은 몸을 일으켜 손잡이만 남은 해비 랜스를 던지고 롱소드를 뽑았다.

“너... 대체...”

조지 백작은 플레일을 끌어당기며 몸을 돌렸다. 랜스 차칭이 효과가 있어 흉갑이 움푹 들어갔다. 저 정도 충격이면 심장이 터져서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조지 백작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말의 무게와 속도로 찌른 로벨이 튕겨 나간 것이 말이 안 되었다.

“크흐흐... 정말이군. 정말 아무렇지 않아.”

조지 백작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로벨은 절뚝거리며 거리를 조금 벌렸다. 원래라면 플레일의 간격이 더 길기 때문에 파고들어야 하지만 몸 상태가 안 좋아 일단 거리를 두었다.

“내가 그랜드 챔피언을 떨어트렸다. 크하하핫! 난 그랜드 챔피언을 이긴 챔피언이다!”

“이건 무효야. 반칙이잖아?”

로벨은 자존심이 상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실력으로 자존심을 회복하기 힘들었다. 충격 탓인지, 조지 백작이 엄청 크게 느껴졌다. 예전에 봤을 때는 로벨과 비슷했는데, 지금은 머리 하나쯤, 아니, 두 개쯤...? 세 개쯤...?

“어어?”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조지 백작의 덩치가 커지고 있었다. 키가 자라고, 근육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몸에 꼭 맞춘 풀 플레이트 아머가 팽창을 이기지 못해 우두둑 떨어졌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데...”

회색산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는 성 앞마당에서 본 적이 있었다. 종(種)은 다르나 존재의미가 비슷한 자들이다.

“마도의 수호자?”

조지 백작은, 아니, 조지 백작이었던 ‘그것’은 회초리처럼 작아진 플레일을 붕붕 돌렸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나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

길쭉한 얼굴과 벌렁거리는 콧구멍. 얼굴을 뒤덮은 누런 털과 두툼한 눈두덩이. 살찐 농마(農馬) 같기도 하지만 말에게는 없는 커다란 뿔이 돋아있었다. 현 상황의 이질성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외형만 말하면 인간에게 친숙한 가축 중 하나인 ‘소’의 얼굴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인가?”

조지 백작이 플레일을 휘둘렀다. 로벨은 몸을 낮춰 피했다. 조지 백작이 커진 키와 늘어난 팔길이에 적응하지 못한 덕분에 가능했다. 바람을 가르는 부웅- 소리와 함께 뒤통수가 찌릿찌릿했다.

“와아아! 와아아... 아?”

“와아... 아?”

로벨을 따라 달려온 울프 용병단은 9피트가 넘는 근육 괴물 앞에서 얼음이 되었다. 보통 때라면 흉악, 흉포, 흉측 등으로 표현될 용병들의 병장기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뭐야, 저 괴물은?”

“소대가리닷!”

“소머리 괴물이야!”

소머리 괴물은 직설적인 호칭에 몹시 기분 나빠했다.

“이 천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소머리 괴물, 아니, 조지 백작이 쿵쾅거리며 달려갔다. 사명감이나 충성심보다 생존을 으뜸으로 치는 용병들은 즉시 몸을 돌리고 도망쳤다. 로벨은 괜히 서글퍼졌다.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

로벨은 비틀거리며 조지 백작을 따라갔다. 저 괴물이 성으로 들어가게 둘 수 없었다. 성 안에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비롯해 200명이 넘는 여자와 아이들이 있었다.

‘어떻게 막지?’

조지 백작은 머릿속까지 소가 되었는지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상황파악이 늦은 조지 도트넘 백작군은 피맺힌 플레일에 치여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이제 전쟁은 의미가 없었다.

그때 로벨을 서글픔을 달래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My Lord! 이쪽입니다!”

머를 브릭이 하얀 전투마를 끌고 왔다. 체구가 좋고 잘생긴 것이 조지 백작의 애마가 분명했다. 로벨은 마를 브릭을 올려다보고 한숨 쉬었다.

“네 말이 맞았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곳을 피하십시오.”

“안 돼. 내 성을 지켜야 해.”

로벨은 언덕을 올라가는 조지 백작을 노려보았다. 덩치가 크니까 멀리서도 잘 보였다.

“‘저런 것’을 어떻게...”

“걱정하지 마. 경험자니까.”

로벨은 조지 백작의 전투마에 올랐다. 길이 잘든 말인지 낯선 사람도 쉽게 태워주었다. 주인을 죽이는 것까지 동의해 줄지는 모르겠다. 로벨은 욱신거리는 늑골을 억누르고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히이잉!”

방금 전 달려온 길을 되돌아갔다. 로벨은 롱소드를 랜스처럼 곧게 뻗고 소리쳤다.

“조지 도트넘 백작!”

남자치고 톤이 높은, 시끄러운 비명 속에서도 귀에 쏙 들어오는 앙칼진 외침이었다. 조지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 또다시 기마돌격하고 있었다.

“크하하! 로벨 로드릭! 학습능력이 부족하구나!”

지난날 로벨이 조롱한 것을 가슴에 담아둔 모양이다. 로벨은 생과 사가 엇갈리는 긴장감 속에서 중얼거렸다.

‘쪼잔하긴...’

그리고 기사와 괴물이 충돌했다.

@

로벨은 플레일의 사정거리에 접어들기 직전 등자에서 발을 빼 안장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점잖은 신사와 조숙한 숙녀에게 권장할 만한 자세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동작은 조숙하지 못한 말괄량이도 따라 하면 안 될 종류였다.

로벨을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조지 백작의 플레일이 주인 잃은 말을 후려쳤다.

“끼히히힝!”

힘이 얼마나 좋은지 우람한 전투마가 바람 넣은 오줌보처럼 날아갔다. 직격 당했으면 아무리 튼튼한 컴포지트 아머라도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로벨은 맞지 않았다.

“하아앗!”

로벨은 말의 전력질주와 안장의 높이를 빌어 6피트 이상 뛰어올랐다. 거대한 소머리가 아래로 보일 높이였다. 조지 백작은 고개를 들어 로벨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소리를 단어로 바꿀 시간이 부족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반 바퀴 돌려 역수로 쥐고, 조지 백작의 오른쪽 눈에 찔러 넣었다.

푸욱-

조금 뜬금없지만, 철없는 어린 시절 부지깽이로 밀 포대를 꾹 찌르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감촉하고 비슷했다. 차이점은 밀알이 쏟아져 당황하는 대신 진득한 핏물이 뿜어져 나와 미소를 지은 것뿐이다.

“죽어랏!”

조지 백작은 착한 아이처럼 그대로 따랐다.

@

로벨은 조지 백작 얼굴에 롱소드를 박고, 가슴을 두 발로 밀었다. 조지 백작은 로벨의 몸무게에 밀려 뒤로 넘어갔다. 덩치가 크니까 넘어지는 것도 한참 걸렸다.

쿵!

“하악! 하악!”

로벨은 조지 백작 가슴 위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부러지고 뒤틀린 뼈마디가 신경을 지지는 것처럼 아프게 했다. 그와 동시에 미노타우로스를 해치웠다는 흥분이 정신을 들뜨게 만들었다.

“기사님! 기사님!”

아득한 정신 사이로 마녀 키르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성과 들판을 뒤흔드는 고함이 몰아쳤다.

“로벨 로드릭 남작님이 괴물을 처치했다!”

“조지 도트넘 백작이 죽었다!”

“괴물 백작이 쓰러졌다! 우리 승리다!”

성문 사이로 영지민이 몰려나왔다. 로벨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귀 용병단은 진작 내빼었고, 조지 도트넘 백작군은 우왕좌왕하느라 도망조차 치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오합지졸이면 펄프 대장이 알아서 굴복시킬 것이다.

“영주님! 영주님이 이겼어요! 괴물을 해치... 영주님?”

로벨은 지팡이 삼은 롱소드가 헐거워지는 느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미노타우로스 시체가 조지 도트넘 백작 시체로 바뀌어있었다. 롱소드에 찔린 오른쪽 눈이 처참했다. 로벨은 요 며칠 동안 고생한 의식을 휴가 보내며 중얼거렸다.

‘투구를 써야 한다니까.’

@

로벨은 꿈을 꾸었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나온 것을 보아 어린 시절 꿈인 듯했다. 장난꾸러기 큰 오빠, 사춘기가 일찍 온 둘째 오빠, 그리고 내성적인 막내 오빠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가슴 한켠이 따뜻하게 젖어왔다.

‘어...?’

웃음은 가짜인데, 촉감이 현실이었다. 로벨은 따스한 손길에 눈을 번쩍 떴다.

“영주님? 깨셨어요?”

로벨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머리맡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여기 있어요.”

어린 집사가 대거를 내밀었다. 로벨은 칼자루를 잡은 후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내 방...”

“아, 진짜!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듣자 하니까 낙마했다면서요? 갑옷 입고 낙마한 사람이 그리 날뛰니까 정신을 잃죠! 어? 어라? 영주님? 우, 울어요? 제가 뭐 틀린 말을 했다고... 으아! 잘못했어요! 울지 마세요!”

로벨은 눈가를 훔쳤다. 손끝이 축축하게 젖었다. 하품을 크게 했을 때 나오는 수준이지만, 눈물은 눈물이었다.

“...꿈을 꿨어.”

“꿈이요? 무슨 꿈이요?”

“...기억 안 나.”

대부분의 꿈이 그러하듯 잠에서 깨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저 정체 모를 아련함만 맴돌았다. 로벨은 기억 안 나는 꿈을 치우고 현실에 집중했다.

이곳은 로벨에게 가장 익숙한 장소인 로드릭 성 침실이었다. 햇빛이 침실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것을 보아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햇살이 간질이는 곳에 롱소드와 컴포지트 아머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냄새나는 고약이 덕지덕지 발라진 가슴과 옆구리가 보였다. 잠결에 느낀 따뜻함은 약을 바르는 어린 집사의 손길이었다. 로벨은 혹시나 해서 방안을 다시 돌아보았다. 다행히 어린 집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것도 기억 안 나세요?”

“조지 소머리 백작이 쓰러진 것까진 기억나.”

“소머리 백작이요? 깔깔!”

어린 집사는 한참 웃었다. 로벨의 농담이 웃겨서라기보다 로벨이 멀쩡한 것이 실감되어서였다. 어린 집사는 로벨이 옷을 입을 때까지 눈물 짜며 웃다가 간신히 진정했다.

“길게 말하면 한없이 길어지지만, 영주님 몸이 안 좋으니까 짧게 말씀드릴게요.”

“응.”

로벨은 귀를 기울였다. 어린 집사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는 이야기꾼처럼 잠시 뜸을 들이고 히쭉 웃었다.

“우리가 이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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