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기습
28화. 기습
로벨은 얼굴을 문질러서 피곤을 지우고 메인 홀로 내려갔다. 낯익은 기사 종자가 찾아와 있었다.
울프 용병단이 창칼로 포위하고, 여자와 아이들이 기둥 뒤에서 훔쳐보았다. 로벨이 영주가 된 이후 성(Keep)안이 이토록 북적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머를 브릭은 적대적인 인파 속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M, My Lord!”
“오랜만이야.”
로벨은 용병들에게 물러가라 손짓하고 의자에 앉았다. 자신감과 여유로움을 보이기 위해 팔걸이에 손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로벨의 느긋한 태도에 영지민과 용병들도 긴장을 풀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머를 브릭 한 사람뿐이었다.
“My Lord,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로벨은 주위 사람을 의식해서 재빨리 선수쳤다.
“지난번에 부탁한 내용이라면 할 수 없어. 미안해.”
전쟁 중이라 귀족원 회의를 열 수도 없고, 설령 열린다고 해도 적대 세력의 중상모략으로 취급받을 것이 뻔했다. 머를 브릭은 두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보다, 그보다 훨씬 무서운 일을 고백하고자 찾아왔습니다.”
로벨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친족살해보다 무서운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머를 브릭은 어둠 속에 고여 있는 눈동자들을 의식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오래된 성과 숨죽인 그림자들은 묘한 공포를 전해주었다. 로벨에게는 그저 손님이 많은 거실이었지만.
머를 브릭은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술 떼었다.
“조지 백작님 주위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과 어울리면서 기, 기이한 의식을 치릅니다. 가끔은 피를 묻히고 돌아오기도 하는데,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아랫마을의 젊은 처녀가 행방불명됩니다.”
로벨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로벨 뿐만 아니라 메인 홀에 모인 사람들 모두 비슷했다. 대충 요약하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정도였다. 머를 브릭은 악쓰듯이 말했다.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 저조차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조지 백작님은 이교도에 빠진 것 같습니다.”
로벨은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살인 다음에 이단이야?”
“예?”
“너를 어떻게 믿지?”
“그건...”
“그리고 넌 왜 나를 믿는 거지?”
로벨은 의심에 찬 눈길을 보냈다. 머를 브릭은 조지 백작의 기사 종자였다. 주인을 배신하는 기사 종자보다 적을 속이려는 기사 종자 쪽이 그럴듯했다. 머를 브릭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나, 남작님께 사로잡혔다가 풀려난 뒤로 이상해졌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전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사가 몸값을 내고 풀려난 일은 자랑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수치도 아니었다. 로벨은 머를 브릭의 주장을 부정하려다가, 문뜩 조지 백작이 지하감옥에서 한 말을 떠올렸다. 싸움에서 진 기사의 악담이라 해도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처녀... 그리고 행방불명이라...’
그것도 상당히 익숙했다.
“설마, 옷장 문을 열었나?”
“My Lord?”
“아니야. 아무것도.”
로벨은 자세를 고쳤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살짝 들었다.
“옛 신의 신앙이든, 이단신앙이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차라리 옛 신의 사제들에게 알리는 편이 좋을 거야.”
“아... 그와 별개로 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머를 브릭은 큰 짐을 덜어내고 한결 편안하게 두 번째 용건을 밝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두 번째 내용이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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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딱 잡아 말했다.
“함정이에요.”
조심성이 많은 펄프 대장과 귀족혐오가 심한 외팔이 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나 애꾸눈 볼포스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야간공격과 동시에 별동대를 우회시켜 배후를 노린다는 것인데, 고전적인 양동작전입니다. 이런 작전을 거짓으로 속여서 이득 볼 것이 없습니다. 속아 넘어가봐야 야간 경계로 조금 피곤해지는 것뿐입니다.”
“어... 그럼 야간 경계를 강화할까?”
“아, 글쎄! 거짓말이라니까요!”
대화가 한 바퀴 돌아 머를 브릭의 정보가 사실이냐 아니냐로 돌아왔다. 그때 마녀 키르케가 손을 들고 말했다.
“저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요.”
로벨은 손을 들어서 어린 집사와 애꾸눈 볼포스의 말싸움을 중단시키고 마녀 키르케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마녀 키르케는 지난 전쟁과 지지난 전쟁 때 모두 공을 세웠으니, 이번에도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마녀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용병 아저씨들은 유명할수록 비싸잖아요? 맞나요?”
펄프 대장이 긴가민가하게 대답했다.
“꼭 그렇진 않지만, 그러한 편이오.”
“까마귀 용병이란 아저씨들은 유명하죠?”
“그야 물론이오.”
“그럼 그 아저씨들 무지 비쌀 텐데... 조지 백작님이란 기사님은 어디서 돈이 났을까요?”
돈에 민감한 어린 집사가 반박했다.
“지금 적을 걱정해요? 강철성의 주인이 그만한 돈도 없을까 봐요?”
“음... 기사님이랑 집사님이랑 울프 용병단을 50명 늘리려고 보리도 팔고, 소금도 팔았잖아요. 암만 백작 기사님-백작 기사가 뭐야? 쉿! 조용해 봐!-이라도, 매년 수십 명, 수백 명의 용병을 고용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거기다 1만 5천 페닝의 몸값도 지불했지.”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말을 이해하고 어린 집사에게 물었다.
“강철성이 부유한 영지야?”
“우리 영지보단 낫지만, 프란시스 시티나 버팅거 시티처럼 부자동네는 아니에요. 볼탄 반도 구석진 곳이잖아요.”
“그럼 어디서 돈이 나서 잉그비아 왕국의 까마귀 용병단을 고용했을까? 여름작물만으로 그만한 예산이 나올까?”
집무실 곳곳에서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울렸다. 남의 영지 자금 사정을 세세하게 알 수야 없지만, 동종업무를 수행하는 만큼 대강 감을 잡았다.
“어려울 걸요?”
“볼프 후작이 도와준 게 아닐깝쇼?”
“주군과 봉신의 관계가 바뀌었잖아.”
“하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대강 답이 나왔다.
머를 브릭의 말처럼 이단신앙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금을 대주는 세력은 의심할 만했다. 그렇다면 야간 양동작전도 믿어줄 만했다.
“수비 병력을 나누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로벨은 아멧을 챙겨서 일어났다. 내일 밤까지 준비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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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자 소모적인 전투를 두어 차례 치렀다. 조지 백작은 첫날처럼 무작정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3개 소대로 번갈아 공격했다.
“까마귀 용병단이라, 이름값을 하는군요.”
잉그비아 왕국 출신 용병답게 활 솜씨가 뛰어났다. 울프 용병단의 신입 하나가 객기 부리다가 머리가 날아갔다. 그 광경을 본 나머지 용병들은 파비스와 모래포대하고 친하게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의 전투는 아침 해가 뜰 때 시작해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화살이 부족해서 상대편이 쏜 화살을 회수하여 쓸 만큼 긴 싸움이었다.
전투가 길어진 만큼 피해도 컸다. 울프 용병단은 전사자 7명에 부상자 15명이 나왔다. 까마귀 용병단의 피해도 비슷할 것이다. 힘들고, 아프고, 괴롭고, 피곤한 하루였다. 그러나 일과를 마무리할 시간이 아니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마을 아낙들이 가져온 보리죽을 마시다시피 해치우고 성 밖으로 나갔다.
펄프 대장이 영지민을 모아놓고 무어라 훈계하고 있었다. 욕설이 반이고, 폭력이 나머지 반이라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로벨은 아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우고 혈압이 걱정되는 펄프 대장에게 다가갔다.
“준비됐어?”
펄프 대장은 ‘영주님 때문에 산 줄 알아!’ 라는 얼굴로 영지민을 훑어보고, 로벨을 향해 싹싹하게 말했다.
“허풍쟁이가 마무리 중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응.”
로벨은 펄프 대장을 따라 불씨 한 점 없는 성벽을 올라갔다.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숙련된 용병들이 끼니도 거르고 작업 중이었다. 로벨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저놈들 말입니까?”
펄프 대장은 풀죽어서 흩어지는 영지민을 힐끔 보았다.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령을 어겨서 혼내는 중이었습니다.”
로벨이 인상을 찌푸렸다.
“불을 피웠어?”
“부싯돌로 장난칠 때 막았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채찍으로 다스릴 일인데, 시간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훈계로 끝냈습니다.”
“...잘했어.”
허풍쟁이 제이콥이 마지막 작업을 끝내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로벨과 눈을 마주쳐서 굽신거렸다.
“헤헤, 영주님 오셨습니까, 막 일이 끝났습니다.”
“수고했어.”
로벨은 성벽 위에 일렬로 늘어선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사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운 건방진 병사들이었다. 로벨은 가까운 병사의 속살을 더듬었다. 단단하게 뭉쳐진 보릿짚이 만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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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이 서쪽 들판으로 기울 무렵, 조지 도트넘 백작군이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 로벨 로드릭 남작군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들고, 욕설과 비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피와 공포가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그러나 낮과 다를 것이 없는 지리멸렬한 전투였다. 그때, 로드릭 성 뒤편에서 첫 변화가 일어났다.
“적이다! 적이 뒤에서 공격한다!”
“으아악! 살려줘! 살려줘!
성벽 위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서쪽 하늘로 불길이 치솟았다. 조지 도트넘 백작군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까마귀 용병단은 한발 뒤로 물러나서 성 안이 혼란에 빠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성벽 위의 그림자는 변화가 없었다.
유난히 좋은 밤눈과 남달리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용병이 특이점을 알아챘다.
‘저놈들이... 움직이지 않아...?’
그 순간, 지난 사흘간 꿈쩍도 안 한 로드릭 성의 성문이 열렸다. 조지 도트넘 백작군은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컴포지트 아머와 오베리아 산 전투마로 무장한 기사가 포탄처럼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조지 도트넘 백작군 병사들은 거의 동시에 작년 이맘때를 떠올렸다. 그날의 충격은 어두운 밤이라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로, 로, 로벨 로드릭이닷!”
“그랜드 챔피언이 나왔다!”
로벨은 원뿔 모양의 해비 랜스를 앞세웠다. 창끝을 헝겊으로 감싼 토너먼트 시합용과 달랐다. 뾰족한 쇠촉이 박힌 살인병기였다.
“비켜!”
로벨은 수천, 수만 번 반복해서 습득한 마상창의 정수를 선보였다. 성문과 가까운 적병의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돌격거리가 짧아 갑옷을 관통하지는 못했지만, 뼈와 내장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었다. 지금 안 죽어도 십중팔구 장기파열로 사망할 것이다.
로벨은 낚싯바늘처럼 휘어진 창끝을 힐끔 보고 속도를 높였다. 사실 창날은 중요하지 않았다. 랜스 차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게와 속력이니까.
인간과 말과 창이 하나가 되어 70명의 병사를 뚫고 언덕길을 달려내려갔다. 달빛마저 바랜 깊은 밤의 마력일까, 언덕 아래 조지 도트넘 백작군은 밤하늘을 날아오는 전설 속의 페가수스를 연상했다.
“영주님을 따르자!”
“돌격! 돌격 앞으로!”
그리고 전설의 기사 뒤로 울프 용병단의 풋맨 45명이 따랐다. 그 외 용병들은 성 뒤에서 수비 중이었고, 성 앞에 모인 것은 로벨과 풋맨 부대가 전부였다.
로벨의 작전은 간단했다.
조지 도트넘 백작군이 성 앞뒤로 나눠진 틈을 타 ‘머리’를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