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7화 (27/605)

27화. 수성전

27화. 수성전

소금은 생필품이고 소비품이라 어느 때나 안정된 가격을 유지했다. 로벨은 노스폴드 시티 상인 길드와 헨리 상단을 통해 1차 생산된 소금을 판매하고 자금을 긁어모았다.

“그 길드장이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구요. 히히힛!”

어린 집사가 금화 주머니를 펼쳐놓고 오랫동안 꿈꿔온 소망을 늘어놓았다.

“목초지를 정비해서 소도 키우고, 양도 키우고, 우유랑 양모랑 짜다가 치즈도 만들고, 모직옷도 만들고...”

“그만.”

로벨은 금화 주머니의 주둥이를 바짝 조였다.

“우선 용병을 고용해야 해. 장기고용. 전쟁이 아니라도 로드릭 마을과 소금광산을 지키려면 80명, 아니, 100명 정도 필요할 거야.”

“100명? 100명이요! 유지비가 얼마나 나올 줄 알고요?”

“어쩔 수 없어.”

로벨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린 집사는 피 같은 돈이 아까워서 부들부들 떨었지만, 영지의 안전을 위해 로벨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틀 뒤, 에릭 공작의 소집령이 떨어졌다.

로벨은 미안한 마음과 함께 미리 준비한 거절의 편지를 보냈다. 올해 한 차례 종군했으니 불명예라 할 수 없었다. 더불어 동부에 위치한 류트 공자 세력과 싸울 때는 후방이었지만, 북부에 위치한 사트로 후작과 싸우는 지금은 로벨 로드릭 성이 최전방이었다. 에릭 공작을 지원하기는커녕 지원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에릭 공작도 그런 사정을 잘 알 테니 섭섭해 하지 않을 것이다.

“섭섭해 하려나?”

섭섭해도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용병 경력 32년차, 아니, 33년차 베테랑 펄프 대장을 시켜 울프 용병단원을 모집하게 했다. 전쟁 소식을 접한 용병들이 볼탄 반도로 몰리고 있어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도움을 받아서 컴포지트 아머를 입었다. 성 밖에서 펄프 대장의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펄프 대장은 기존 용병과 신입 용병의 알력다툼을 막고자 강압적으로 행동했다.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통솔이라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어린 집사는 아밍 더블릿의 가죽끈을 백 플레이트 고리에 감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초기 멤버는 거의 남지 않았네요.”

펄프 대장, 외팔이 더치, 애꾸눈 볼포스 세 사람을 제외하면, 허풍쟁이 제이콥, 과묵한 몬트, 코골이 바디, 그리고 겁쟁이 데비 세 사람뿐이었다. 로벨은 주먹으로 흉갑을 두드리고, 땅바닥에 서배튼(Sabbaton)을 굴려본 후 일어났다.

“이번 전쟁은 끝날 때까지 성 안에 틀어박혀 있을 거야. 더 이상 내 사람을 잃을 수 없어.”

@

로벨은 완전무장 후 울프 용병단의 사열했다. 거칠고 사나운 남자임을 자부하는 용병들이지만, 기사, 그것도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 앞에서 남자다움을 과시하지는 않았다. 바늘 하나 찔러넣을 곳이 없는 컴포지트 아머에 기가 죽은 것도 있었다.

‘저자가 로벨 로드릭 남작인가?’

‘후계자 전쟁의 영웅이라지?’

로벨은 용병들의 무장상태를 확인하고 풋맨, 스피어맨, 아처로 구분해서 펄프 대장 일행의 소대원으로 편성했다.

“어? 어라? 전 어디로 갑니까?”

자칭 파이크맨 제이콥이 우왕좌왕하자 애꾸눈 볼포스가 조용히 끌고 갔다.

숏소드, 행거, 워 해머, 모닝스타 등으로 무장한 풋맨 45명, 숏 스피어, 부주, 파르티잔, 밀리터리 포크 등으로 무장한 스피어맨 32명, 숏보우, 롱보우, 크로스보우, 아바레스트 등으로 무장한 아처 21명으로 총 98명이었다. 뾰족한 송곳니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무장한 아야와 이야카를 더하면 정확히 100이었다. 성 안 연병장이 꽉 찼다.

번쩍번쩍 빛나는 무기들과 철컥철컥 울리는 갑옷들이 가슴을 뛰게 했지만, 반대로 머리는 차게 식었다.

“하아... 저 많은 입을 어떻게 먹이지...”

용병들은 싸우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로드릭 마을의 경제력으로 100명이나 되는 용병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금광산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성 아래 야영지를 만들어. 마을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잘 통제해. 할 수 있겠어?”

“고용주 앞에서 깽판을 칠만큼 모자란 놈들은 아닙니다.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머리통을 쪼개놓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성 안에서는 영지민의 진지공사가, 성 아래에서는 울프 용병단의 군사훈련이 진행되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지나갔다. 그 사이 볼탄 반도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모두가 예상했듯 에릭 공작이 불리했다. 열흘 만에 3개 성이 함락되고 5개 용병단이 와해되었다. 전황이 기울자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여기가 4번째 성과 6번째 용병단이 될지는 몰랐는데.”

“야! 임마!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

로벨은 성벽 위에서 북동쪽 마른 땅을 바라보았다. 조지 도트넘 백작군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로드릭 마을주민은 한 번 겪은 일이라 익숙하게 대처했다. 식량과 귀중품을 싸들고 로드릭 성으로 올라왔다.

로벨은 여자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아성을 개방했다. 그러나 성(Castle)이 무너지면 아성(Keep)의 빈약한 방어시설은 있으나 마나 하니 정말 안전하다 말하기 힘들었다.

로벨을 따라 올라온 울프 용병단 핵심인물들이 조지 도트넘 백작군을 분석했다.

“제일 앞줄의 기사가 조지 도트넘 백작입니다. 백작이 되더니 병사가 늘었군요.”

“저 깃발을 압니다요. 내 팔을 잘라간 놈이 부리던 놈들입지요.”

외팔이 더치가 어금니를 갈았다. 평면적으로 그려진 검정색 새 깃발, 까마귀 용병단이었다.

조지 백작은 다루는 병사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조지 도트넘 백작군은 로드릭 마을을 그냥 지나쳐 성 언덕 아래 멈췄다. 마을을 약탈하는 동안 배후를 내줄 것을 경계했다. 작년과 달리 조심성이 엿보였다. 그러나 로벨 로드릭 남작군도 작년과 달랐다.

성은 작지만 성 안에 군사가 가득했다. 울프 용병단이 100명, 화살과 돌을 나르는 징집병이 100명, 허수아비 병사가 30명으로, 성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성 전체가 북적북적했다.

양군의 병력을 정확히 비교하면, 로벨 로드릭 남작군은 징집병 92명과 울프 용병단 98명이고, 조지 도트넘 백작군은 징집병 150명과 까마귀 용병단 122명이었다. 조지 백작군 병력이 80명 정도 많지만, 성벽을 넘어 승리를 장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조지 백작의 젊은 종자가 깃발을 들고 언덕길을 올라왔다. 성벽에 자리 잡은 애꾸눈 볼포스 이하 아처가 일제히 활을 겨냥했다. 로벨은 종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손을 들었다.

“쏘지 마.”

일전에 조지 도트넘 백작을 고발할 것을 요청한 기사 종사(Squire)였다. 기사 종자는 성문 앞에서 깃발을 크게 흔들고 말했다.

“조지 백작님의 전언이오! 기사답게 밖으로 나와 싸우기를 청하오!”

로벨은 명예로운 기사라서 할 수 없는 말을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가 대신했다.

“네놈들 같으면 나가서 싸우겠냐? 뇌가 장식이야?”

“개소리 작작하고 꼬우면 덤벼봐! 겁나냐? 겁나?”

명예를 아는 것은 로벨 뿐이라, 부끄러워하는 것도 로벨 뿐이었다. 울프 용병단은 낄낄 웃으며 젊은 종자를 비웃었다. 기사 종자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성벽 위의 병력과 성문 앞 바리게이트를 살폈다. 로벨이 정말 성 밖으로 나올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성의 방어태세를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기사 종자는 주위를 충분히 둘러본 후 아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로벨은 롱소드의 폼멜을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전투준비.”

1분쯤 지났을까, 조지 백작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찢어 죽일 천것들이! 돌격! 돌격하라!”

로벨 로드릭 남작이 프란시스 공작과 사트로 후작의 오랜 갈등에 휘말리는 순간이었다.

@

성벽은 높이의 이점을 제공하고, 그 이점은 병사가 2~3명의 몫을 수행하도록 도와주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

“올라가! 올라가!”

따라서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공성측이 수성측보다 3배 이상 많아야 했다. 낡아빠진 로드릭 성이 정말 세 사람 몫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상식에 적용할 때 조지 백작의 공격은 무모했다.

성벽 위로 화살이 날아다녔다.

전투경험이 많은 까마귀 용병단은 적절한 위치에서 신속하게 파비스를 설치했다. 울프 용병단의 아처들은 첫 사격으로 대여섯 명을 처치한 이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조지 백작의 강압으로, 혹은 가능성이 희박한 포상금에 눈이 멀어 사다리를 타는 징집병만 피해를 보았다. 성벽을 발을 올리기도 전에 창에 찔리거나 돌에 맞아 굴러 떨어졌다. 애당초 전문용병과 징집병은 무장수준이 달랐다.

“까마귀들을 처치해야 합니다!”

로벨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다리를 반쯤 올라온 농민병이 쇳덩이나 다름없는 기사와 눈을 마주치고 하얗게 질렸다. 로벨은 군말 없이 사다리를 밀어주었다.

사다리는 성벽에서 천천히 멀어지다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빠르게 넘어갔다. 사다리에 매달린 농민병의 비명이 애처로웠다.

팅-!

화살 한 대가 아멧을 스치고 튕겨 나갔다. 로벨은 움찔했지만, 컴포지트 아머를 믿고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로벨처럼 철판을 두르지 못한 펄프 대장은 모래포대 뒤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쳤다.

“까마귀를 물리치면 농민병은 가만둬도 도망칠 겁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까마귀 용병단은 파비스 뒤에서 쿼럴을 날릴 뿐 성벽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조지 백작은 귀중한 자산인 영지민이 죽어가는 것에 분통 터트렸지만, 용병들은 안 될 거 뻔히 알면서 목숨 내놓지는 않았다.

조지 백작은 농민병의 피해가 30이 넘자 별수 없이 후퇴시켰다. 로벨은 아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흑단처럼 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함성을 질렀다.

“와아앗! 와앗!”

아군의 사기를 올리고. 적군의 사기를 떨구기 위해 적극적인 호응을 유도했다. 펄프 대장이 따라 소리치고, 외팔이 더치가 깃대에 꽂힌 깃발을 뽑아 흔들자, 곧 낡아빠진 성이 무너지는 거 아닐까 우려될 만큼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 겁쟁이들아! 어딜 도망가냐!”

“으하하핫!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성벽 위아래에서 승리의 함성이 파도쳤다. 그러나 정작 흥분을 유도한 로벨은 모래포대에 한 발 올리고 차분한 눈으로 까마귀 용병단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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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투의 성과로 나쁘지 않았다. 아군 피해는 부상자 5명이었고, 적군 피해는 전사자 37명 및 포로로 잡은 부상자 12명이었다. 언덕 아래로 후퇴한 병사들 중에도 전투가 불가능한 부상자가 있을 테니 실제 피해는 50명 이상일 것이다.

“이걸로 전력차이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아니, 피해를 입은 것은 농민병뿐이야. 울프 용병단과 까마귀 용병단의 병력차이는 여전해.”

로벨이 냉정하게 말했다. 수성의 이점을 빼면 아직도 약세였다. 펄프 대장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조지 백작의 낯짝이 궁금하군요. 작년 수준일 거라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진격해 왔을 텐데요.”

어린 집사가 얼른 맞장구쳤다.

“이게 다 우리 영주님의 선견지명이죠. 어서들 찬양하세요.”

로벨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마녀 키르케가 사심 없이 박수쳤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아무튼 전황이 좋지 않습니다. 적군은 볼프 후작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 쪽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리고 식량 사정도 있고...”

똑똑.

그때 허풍쟁이 제이콥이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My Lord, 저기,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영주님을 뵙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외팔이 더치가 어이없어서 따졌다.

“전쟁 중에 어떤 미친놈이?”

“아까 낮에 본 젊은 기사 종자인데... 똥 마려운 것처럼 굴긴 하는데, 미친 것 같진 않아.”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서로를 보았다. 그 기사 종자의 이름을 아는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마들린 브런치?”

“...맛있어 보이는 이름인데, 아니야.”

조지 도트넘 백작의 기사 종자, 머를 브릭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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