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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6화 (26/605)

26화. 초야권

26화. 초야권

로드릭 영지에는 허풍쟁이 제이콥과 늙다리 잭슨 외에 두 명만 남게 되었지만, 옛날에도 세 명이 지켰으니 걱정 없었다. 그러나 볼탄 반도 정세에 너무 어두웠다.

에릭 공작과 볼프 후작의 친선에 금이 가자, 후작가의 매파(-派)들은 후계자 전쟁으로 약화된 시기를 놓쳐서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 강경한 인물 중에는 강철성의 새 주인 조지 도트넘 백작도 있었다.

볼탄 반도 북부에서 전쟁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로드릭 영지에서는 경사가 한참이었다. 촌장의 손녀딸 루시와 방앗간 장남 지미가 혼인식을 올렸다.

신랑은 깨끗한 새 옷을 입고, 신부는 들꽃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옛 신의 성물 앞에서 사랑을 맹세했다. 그리고 영주인 로벨 로드릭에게 곡물 반 자루와 정성껏 만든 의자를 진상했다. 로벨은 초야권을 행사하는 대신 의자를 받고 혼인을 인정했다.

마녀 키르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초, 초, 초야권이라고 하면... 그... 그... 그...”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는 권리지.”

“어머나!”

마녀 키르케는 시뻘게진 얼굴로 로벨을 훔쳐보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껄껄 웃었다.

“어느 미친 영주가 진짜로 초야권을 행사하겠어? 곰팡내 나는 낡은 풍습이야. 오늘처럼 결혼세와 진상품을 받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지.”

“아, 그렇군요.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그, 그런 게 있어요!”

마녀 키르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마녀도 다행이지만, 로벨도 참 다행이었다. 로벨에게는 신부의 첫날밤을 가져갈 방법이 없으니까.

결혼식이 끝나고 마을잔치가 시작됐다.

촌장집과 방앗간집은 로드릭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었다. 더욱이 신랑과 신부가 장남과 장녀라 무리해서라도 술과 고기를 장만했다. 로벨이 진상 받은 의자에 앉아 신명나게 쥐어터지는 신랑과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는 신부를 구경했다. 곳간이 가득 차고, 경사가 거듭되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때 아닌 마을축제에 외지인이 몇 명 있었다. 촌장의 부탁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가져온 상인 일행이었다. 로벨과 안면이 있는 상인이기도 했다. 키가 작고 다부진 느낌의 중년 상인이 인사했다.

“My Lord, 헨리 상단의 헨리 피터입니다.”

“아, 기억나.”

매년 이맘때쯤 찾아오는 행상인이었다. 고기와 가죽을 주고 보리와 맥주를 가져갔다. 로벨은 술잔을 흔들고 말했다.

“올해는 맥주가 좋을 거야. 보리농사가 잘되었거든.”

“세심하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벨은 인사가 끝났으니 저리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헨리 피터 상단주는 분위기가 어색해지도록 걸음을 떼지 않았다. 로벨은 자상하게-사실은 억지스럽게 - 웃으며 다시 물었다.

“혹시 할 말이 있어?”

로벨이 대담을 허락하자 헨리 상단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주제넘은 말일지 모르나, 영주님과 영지민이 걱정되어서 말씀드립니다.”

“걱정? 왜?”

“혹시 북쪽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까?”

로벨의 관심사는 오직 회색산 쪽에 쏠려있었기에 북쪽이 어느 방향인지도 잊고 있었다. 로벨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헨리 상단주는 장탄식을 터트리고 말했다.

“사트로 후작의 봉신들이 군사와 군수물자를 모으고 있습니다.”

“...뭐?”

“상인의 눈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잘 보이지요. 볼탄 반도 북부에서 잉여작물이 사라지고 철광석 시세가 오르고 있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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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북쪽은 사트로 후작의 영토였다.

볼탄 반도를 오른쪽 손바닥으로 표현하자면,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서 엄지손가락 아래 마디까지 비스듬히 선을 그어 남쪽은 프란시스 공작령, 북쪽은 사트로 후작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로드릭 영지는 새끼손가락 세 번째 마디쯤에 위치했다. 사이가 안 좋은 강철성의 조지 도트넘 백작과 한 마디 정도 떨어진 곳이기도 했다.

저녁 늦은 시간, 허풍쟁이 제이콥이 찾아와 보고했다.

“My Lord, 그 행상인의 말이 맞았습니다. 잉그비아 왕국의 까마귀 용병단, 철사자 용병단, 네일 공국의 붉은 수염 용병단이 국경을 넘어왔다고 합니다.”

로벨은 ‘까마귀보다 독수리가 좋지 않을까?’, ‘용병대장이 붉은 수염인가? 나이 먹고 하얘지면 어떡하지?’ 등의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용병업계 종사자들은 아주 심각했다.

“철사자 용병단? 그리고 붉은 수염 용병단까지?”

“가만! 까마귀 놈들은 8년 전 더프타 성에서 천둥 용병단을 박살 낸 놈들이잖아!”

로벨은 격한 반응이 의구심을 표시했다.

“유명해?”

“유명하냐굽쇼?”

“아이고! 두 말하면 입 아프죠!”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용병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 에르나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의 99일 전쟁에서 3개 용병단을 괴멸시킨 일화, 3,000명의 대군도 넘지 못한 난공불락 폴라 요새를 7일 만에 함락시킨 일화, 고작 100명으로 1,500명의 적군을 격퇴한 일화 등등.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전공이었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돼.”

로벨은 고개를 저었다. 전시에는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 과장된 소문을 퍼트렸다. ‘후계자 전쟁’ 당시 울프 용병단의 업적도 많이 부풀려졌다.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해도, 수차례 전쟁을 치른 정예 용병단이란 것은 분명합니다.”

“그놈들이 볼탄 반도에 들어왔다는 것은... 진짜 전쟁이 일어나나?”

“아니요. 명분이 없습니다.”

펄프 대장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늙다리 잭슨이 나이 먹은 만큼의 통찰력을 발휘했다.

“프란시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이 암만 앙숙이라 해도 국왕폐하의 신하입니다. 명분 없이 전쟁할 수 없습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반박했다.

“토너먼트 경기 중에 습격당했잖아?”

“에릭 공작이 꾸민 짓이라는 증거가 없잖아.”

“나참. 증거 따위야 대충 만들면 되죠. 귀족 놈들은 원래 거짓말이 특기잖아요?”

소년티를 못 벗은 앳된 용병이 아무렇게 말을 내뱉다가 귀족 고용주를 깨닫고 당황했다. 성 안의 시선이 로벨의 허리춤으로 집중되었다.

로벨은 ‘감히 귀족을 능멸해? 정의의 칼을 받아랏!’ 따위의 대사를 하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수염을 더듬는 시늉했다. 로벨이 별말 없이 넘어가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로벨은 ‘방앗간집 장남이 의자를 잘 만드네’ 따위를 생각하고 말했다.

“지난번처럼 행운에 기댈 수 없어.”

“지난번이요?”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을 보고 한숨 쉬었다. 조지 도트넘 백작과 싸운 이후에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펄프 대장 일행이 자리를 비운 것이 아쉬웠다.

“썩 내키지 않지만, 부역을 시켜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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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에게 예속된 영지민은 7일 중 3일을 ‘봉사’해야 했다. 청소, 빨래, 재봉, 심부름 등 자질구레한 일부터 직영지 경작과 성벽 공사 같은 큰일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로벨은 태생적으로 숨겨야 할 비밀이 많아 영지민을 가까이 두지 않았고, 자연히 부역 또한 잘 이뤄지지 않았다. 로벨이 본의 아니게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로벨이 근 1년 만에 영지민을 부역에 동원했다.

“왜 이런 일을 해야합니까요.”

“아직 김도 매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안 하던 일이 하자 목맨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벨은 미안해했으나, 허풍쟁이 제이콥과 늙다리 잭슨은 화를 내었다.

“이것들이 배가 불러서 개념을 상실했나. 그동안 ‘해야 할 일’을 안 시킨 거지, 지금 ‘안 해도 될 일’을 시키는 거냐?”

“항상 잘 대해주면 고마운 줄 모른다니까. 이것도 당신들을 위해서야. 사트로 후작군 쳐들어오면 손 놓고 죽을 거야?”

용병들이 윽박지르자 영지민은 마지못해 움직였다. 성벽 아래 해자를 파고, 파낸 흙은 자루에 담아 성벽 위로 올리고, 통나무를 깎아 바리게이트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불만불평이 끊이지 않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영지민은 순박하지만, 순수하지는 않아요.’

그때 마녀 키르케가 우플랑드 소매를 잡아당기고 말했다.

“시설보다 급한 것이 사람 아닐까요?”

“응?”

“용병 아저씨를 절반 정도 데려오면 어떨까요?”

“......”

로벨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로드릭 성만큼이나 소금광산도 중요했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고, 이 성이 공격받는다는 확신도 없어.”

“그래도 만사 불여튼튼이란 말이 있잖아요.”

로벨은 통나무 두 개가 세워질 때까지 고민하다가 슬쩍 물었다.

“절반으로 될까?”

마녀 키르케가 배시시 웃었다.

“부족한 숫자는 다른 곳에서 채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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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가능성을 점치는 것은 로벨만이 아니었다. 인근 영주와 상인들, 떠돌이 용병과 농민들 사이에서도 긴장과 불안이 보였다.

‘전쟁이 시작되는...’

‘어느 쪽에 서야...’

‘재산을 숨기는 것이...’

속삭임이 모여서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어느 바람이나 에릭 공작의 불리함을 말했다. ‘후계자 전쟁’으로 정통성이 있는 영주들이 대폭 줄었고, 남아있는 영주들도 막대한 재화를 소모해서 힘이 약해졌다. 기사의 명예, 귀족의 의무, 신하의 충성 등을 들먹여도 돈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돈이 없기로 유명한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묵묵하게 싸움을 준비했다.

“이게 소용이 있을까?”

“수천 명이 몰려오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수백 명이면 시간 벌이 정도 될 걸?”

허풍쟁이 제이콥은 헝겊과 짚단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세웠다. 나무창, 나무방패, 나무갑옷을 장착하고 용병 사이에 두자 훌륭한 병사처럼 보였다.

“영주님. 영주님. 나무 가져왔어요.”

마을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나무를 가져왔다. 대부분 불쏘시개로 써야 할 만큼 쓸모없는 잔나무지만, 드물게 화살로 쓸 수 있는 곧은 나무도 있었다. 무엇보다 칭찬받으려고 북쪽 숲에서 로드릭 성까지 왕복한 것이 고맙고 대견했다. 로벨은 까치집 머리를 쓰다듬고 집에 가서 밥 먹으라고 말했다. 마을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성 앞 언덕길을 달려갔다. 항상 옳은 말만 하는 어린 집사지만 한 가지 틀렸다.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었다.

로벨은 옛 신의 성물을 닮은 롱소드에 왼손을 올리고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옛 신이시여. 저 웃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하지만 기도도 평소에 잘해야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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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곳에 열대의 향수가 묻어나는 계절이 찾아왔다. 그리고 저 멀리 떨어진 회색산에서 첫 진상품이 올라왔다.

로벨은 나이프로 마름모양 입방체 모퉁이를 긁어내어 칼끝을 혀끝에 가져갔다. 쇠의 시큼한 맛보다 짜고 씁쓸한 소금의 맛이 강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이네.”

그 말이 진리라도 되는 듯 성 안의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린 집사는 고개를 쉴 새 없이 끄덕였고, 펄프 대장은 어깨를 떨군 채 노인처럼 허허 웃었다.

“My Lord, 기뻐해 주세요. 드디어 고정수입이 생겼어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요청대로 기뻐했다. 그런 다음 작은 의문을 표시했다.

“근데 두 사람이 다 오면 소금광산은 누가 관리해?”

나이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두 측근은 서로를 한번 보고 말했다.

“광산관리보다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어요.”

“급한 일?”

“볼프 사트로 후작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로벨은 새로 생긴 고정수익이 어디로 빠져나갈지 예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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