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장사
25화. 장사
로벨의 걱정과 달리 더 이상 몬스터 피해가 생기지 않았다. 울프 용병단은 여드레 동안 자질구레한 고생고생 후 빈손으로 돌아왔다. 로벨은 괜한 일을 시킨 게 미안해 술과 말린고기로 조촐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봄 추수가 시작되었다.
여름이 더디게 찾아오는 북부지만, 계절에 연연하지 않는 콩과 보리는 아무 불평없이 수확의 날을 맞이했다. 어른들은 거대한 낫으로 훑듯이 보리를 베어갔고, 아이들은 자그마한 손으로 꼬투리를 모아왔다.
로벨은 성 앞 언덕길에서 야금야금 사라지는 보리밭을 감상했다. 쥐가 커다란 치즈를 갉아먹는 듯한 광경이었다.
개간사업에 투자한 보람이 있어 작년보다 수확량이 2배가량 늘었다. 이 정도면 늦가을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아니지만...’
봄 추수가 막 끝날 무렵, 어린 집사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글을 읽지 않아도 글씨만으로 매우 격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금광산의 지분을 주장하는 마녀 키르케가 과도한 관심을 보였다.
“뭐래요? 뭐라고 하나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편지를 꼼꼼히 읽고, 다시 한 번 읽은 후 두 마디로 요약했다.
“채굴이 가능해.”
마녀 키르케는 성의 없는 요약에 화내고 편지를 빼앗아 읽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도적떼가 바글바글한 볼탄 반도 동부대로를 내려가서, 버팅거 시티에서 20년 경력 소금광부를 고용하고, 회색산 골짜기를 따라 사흘 밤낮을 헤매다가, 옛 신의 가호로 암염을 채굴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았으며, 지금은 모자란 돈 탈탈 털어서 베이스캠프를 건설하고 있다는 장황한 모험일기였다. 마녀 키르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이걸 그렇게 요약해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마디 추가했다.
“돈을 보내야 해.”
“아앗!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다시 한마디로 요약했다.
“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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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보리 타작이 끝나자마자 노스폴드 시티로 출발할 준비를 갖췄다.
작년 가을과 달리 전투마를 모욕할 필요 없었다. 로드릭 마을에서 가장 큰 수레를 빌려와 콩을 쑤어 배불리 먹인 농마에 매달았다. 그리고 단내가 나는 햇보리와 콩, 순무자루를 가득 쌓았다.
“이렇게 쌓아두니까 상당하군요.”
“춘경지를 개간한 보람이 있구만.”
수레 두 대가 가득 찼다. 힘 좋은 농마가 아니면 실어 나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로벨은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를 마부 삼고, 허풍쟁이 제이콥을 깃수 삼고, 성 안에만 있는 것이 심심한 아야와 이야카를 대동해서 출발준비를 끝냈다. 마녀 키르케가 슬그머니 수레 뒤에 올라타며 말했다.
“기왕이면 석 달 뒤에 팔면 좋았을 텐데요.”
“왜?”
“가을 추수 직전에 곡물값이 가장 비싸니까요. 어라? 이거 상식 아닌가요? 당연한 ‘상식’이요!”
“...하아?”
로벨은 언젠가 충성서약을 모른다고 조롱한 일을 떠올렸다. 그래도 질 수 없어 반박했다.
“하지만 지금...”
“알아요. 알아. 급전이 필요해서 기다릴 수 없죠?”
“알면서 왜...”
“그냥 안타까워서 한 말이죠. 내년에는 비싸게 팔자는 뜻이기도 하고요. 자! 출발해요! 이럇! 이럇!”
마녀 키르케가 수레를 탕탕 두드렸다. 외팔이 더치는 자신도 모르게 채찍을 휘둘렀다. 선두 마차가 출발하자 자연히 깃수가 전진하고, 호위병사가 바짝 따라붙었다. 로벨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내가 지휘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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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폴드 시티는 볼탄 반도 북부 영주들에게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장원에서 생산되는 곡물, 포목, 주류 등을 매각하고, 근방에서 구하기 힘든 광물, 염료, 향신료 등을 매입하기 때문이다.
“와아! 도시다! 흐으음! 도시 냄새!”
마녀 키르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잔기침했다. 도시의 냄새는 빈말로도 좋은 냄새가 아니었다. 인간과 가축의 분뇨가 흐르고, 가죽 삭히는 냄새, 포목 염색하는 냄새, 시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교수대 앞을 지날 때는 너도나도 코를 틀어쥐었다.
“기사 나리, 상인 길드로 갈깝쇼?”
“응.”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이동하자 행인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법보다 칼이 가까운 자유도시라 감히 기사와 용병들을 가로 막는 사람은 없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도시지만, 그래도 도시는 도시였다. 영지민이 세 자릿수를 넘지 못하는 작은 장원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사치품과 기호품이 있었다. 아이란드 왕국산이 분명한 최고급 벨벳, 에르나 왕국의 장인이 빚어낸 유리세공, 동방대륙에서 산 넘고 물 건너온 비단과 도자기, 야만의 땅에서 구해온 거대한 상아와 짐승가죽, 열대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고급 가구 등등.
“예쁘다...”
마녀 키르케는 보석처럼 빛나는 유리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석잔과 나무그릇을 사용하는 로드릭 성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로벨이 전투마를 몰아 가까이 다가갔다.
“가지고 싶어?”
“그야 물론이죠! 반짝반짝하고 이쁘잖아요?”
로벨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끝내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나중에 돈 벌면 꼭 사줄게.”
“어? 정말요?”
“스톤헤드 요새에서 약속했잖아.”
마녀 키르케는 기억을 더듬어서 전쟁 중에 로벨이 한 약속을 떠올렸다.
“잠깐만요! 취소! 취소합니다! 유리잔 하나로 퉁치기는 너무 아까워요.”
“...그럼?”
“좀 더 중요한 걸 생각해볼게요. 그 약속은 킵! 킵 해두세요.”
로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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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폴드 시 길드장은 보릿자루를 뜯어서 한 줌 쥐었다. 상인의 본분과 평민의 처세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았다.
“알이 굵고 깨끗하군요. 분명 상등품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로벨이 콧등을 찡그렸다. 길드장은 슬그머니 손을 털었다. 그 유명한 그랜드 챔피언과 울프 용병단이었다. 혀를 조심해서 놀려야 했다.
“지금은 보리 추수기입니다. 질 좋은 보리가 대량으로 입수되고 있지요.”
“...그래서 얼마야?”
로벨은 상재가 없었다. 길드장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로벨 경과 하루 이틀 거래한 사이도 아니고, 1파운드 당 52로닝으로 전량 구입하겠습니다.”
로벨은 보릿자루의 무게와 숫자를 떠올리고 사칙연산 해보았다.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럼 그렇게...”
“1파운드 당 70로닝!”
그때 마녀 키르케가 끼어들었다. 길드장은 누가 봐도 마녀 같은 마녀 키르케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초가을에도 70로닝에 거래하진 않아.”
“그야 먹을 것이 많을 때니까요. 지금이니까 70로닝의 가치가 있죠.”
“그건 또 무슨 사슴 고기 뜯어먹는 소리야?”
“류트 공자 편에 섰다가 실업자가 된 용병들이 도적질에 열을 올리고 있어요. 행상인의 발이 꽁꽁 묶였죠. 추수기라 해도 물량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요?”
“그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야.”
“아니죠. 아니죠. 빵은 안 먹어도 되지만, 맥주를 안 마시고 살 수 없죠. 도시 사람에게는 식수 대신이 아니었나요? 올해 맥주 생산량이 어떤가요? 어디 양조장 좀 둘러보고 올까요?”
“컹!”
마녀 키르케가 으름장을 놓자 아야와 이야카가 덩달아 짖었다. 길드장은 지난날 새끼 늑대를 사지 않은 것과 마녀를 알선해 준 것을 후회했다. 길드장은 로벨을 돌아보고 말했다.
“저 마녀 말이 ‘일부’ 맞지만, 70로닝은 절대 아닙니다. 1파운드 당 57로닝에 구입하겠습니다.”
“65로닝!”
마녀 키르케가 다시 끼어들었다. 길드장도 지지 않았다.
“59로닝.”
“64로닝!”
“59로닝이 진짜 한계입니다. 그 이상이면 마진이 안 나옵니다.”
로벨은 그냥 마녀를 가리켰다. 마녀 키르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59로닝 하죠. 아참, 콩이랑 순무도 그렇게 사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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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길드 일꾼들은 자루 무게를 재어서 장부에 기입하고 창고로 옮겼다. 기사를 속일 만큼 간이 크지 않아 투명하게 거래되었다.
“보리값 779페닝하고 98로닝... 콩하고 순무하고 합쳐서 220페닝하고 36로닝... 도합 1,000페닝하고 34로닝! 와아! 딱 맞아 떨어졌다!”
로벨은 100페닝짜리 금화로 받아서 안장주머니에 넣었다. 말 두 마리가 힘겹게 끌고 온 수확물이 손바닥보다 작은 금화로 바뀌는 것이 꼭 마술 같았다.
“장사에도 소질이 있는 줄 몰랐는데?”
“헷! 그냥 넘겨짚은 건데 통했네요. 그것도 기사님이 옆에 있어서 가능했죠. 저 혼자였으면 두들겨 맞고 쫓겨났을 걸요?”
로벨은 몸값이 1,000페닝 증가한 전투마를 타고 노스폴드 시티를 떠났다. 큰일을 끝낸 용병들도 기분이 좋고, 악취를 떨쳐낸 늑대들도 기분이 좋고, 몸이 가벼워진 농마들도 기분 좋고, 아무튼 모두모두 기분이 좋았다.
봄 햇살을 타고 로드릭 영지로 돌아오자 마을 아낙들의 이삭줍기가 한참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땅에 떨어진 곡식 알갱이를 한 알 한 알 주워담았다. 하루 종일 주워도 작은 그릇 하나 채울까 말까 한데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로벨은 안장주머니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귀한 돈이야.”
로벨이 말하지 않아도 농민 출신인 용병들은 알고 있었다.
‘저들을 도울 사람은 나뿐이야.’
로벨은 ‘약자를 도우라’는 기사도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약자를 도울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래. 소금광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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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에서 가장 신뢰하는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에게 각각 500페닝씩 맡겼다.
“회색산 남서쪽 사슴 모양 바위가 있는 곳이야. 어린 집사 일행과 광부들이 100명 넘게 모여 있으니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야.”
외팔이 더치가 한 손으로 불편하게 돈주머니를 챙겼다.
“이것만 전해주고 오면 됩니까요?”
“그래. 자금부족에 시달리고 있을 테니 서둘러 전해줘.”
로벨은 두 사람에게 신신당부했다. 가능하면 직접 찾아가고 싶었지만, 뱀파이어의 왕이 남긴 수수께끼가 마음에 걸려서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도적 무리가 설친다니까 조심하고.”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툭툭 치고 말했다.
“펄프 대장만큼은 아니어도 용병짓이 15년입니다요. 그깟 도적떼한테 당하지 않습니다요.”
애꾸눈 볼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은 안심이 안 되어서 용병 두 명을 더 붙여주었다.
“가을 추수 전에 한번 가겠다고 전해.”
“그리하겠습니다.”
거금 1,000페닝과 로드릭 영지의 미래를 짊어진 용병들이 떠났다. 로벨은 성벽 위에서 용병들을 배웅했다. 마녀 키르케가 따라와 위로했다.
“전쟁터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은 사람들이잖아요.”
“나도 알아.”
로벨은 칼자루를 꽉 쥐고 중얼거렸다.
“그냥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로벨은 노파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사고가 터진 것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