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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4화 (24/605)

24화. 마도

24화. 마도

제시의 말에 따르면, 로벨이 구조한 6명 외에 몇 명이 더 있었으나 ‘무서운 기사님’이 데려갔다. 큰 상처를 입었거나 몸이 약해진 처녀들이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까슬까슬한 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상하기 쉬운 음식부터 먹는다는 건가?”

“아, 좀!”

생긴 것과 달리 비위가 안 좋은 외팔이 더치가 항의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저 여자 말대로 인간이 꾸민 짓이라면 단순한 사건사고가 아닙니다.”

외팔이 더치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인간이 몬스터를 부릴 수 있습니까요?”

“글쎄.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지.”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로벨을 따라 용병들과 처녀들도 마녀를 바라보았다. 마녀 키르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마법으로 웨어울프를 쫓아낸 적이 있잖아?”

“그건 그냥 겁을 줘서 도망가게 한 거예요. 명령을 내리는 마법이 아니에요.”

“그럼 마법으로도 몬스터를 부릴 수 없는 거야?”

“으음... 패밀리어(Familiar: 사역마)를 삼아서 부리거나, 마인드 컨트롤로 잠시 조종할 수 있긴 하지만... 그것도 한두 마리가 한계고, 시야에 항상 있어야 해요.”

“고블린을 수하로 둘 방법이 없다는 것이군.”

마녀 키르케는 골똘히 생각한 후 말했다.

“저 아가씨가 잘못 본 거 아니까요?”

제시가 주먹을 꼭 쥐고 반박했다.

“아니에요! 분명히 봤어요! 키가 크고, 갑옷을 입고, 무섭게 생긴 기사님이었어요!”

마녀 키르케는 손을 흔들었다.

“아뇨. 아뇨. 그러니까 보이는 것을 잘못 봤다는 게 아니에요.”

“보이는 것? 그럼 보이지 않는 것은 뭐야?”

“인간을 흉내 내지만, 인간이 아닌 자들이 있어요. 기사님도 한 번 보았잖아요?”

로벨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인간이 아닌 자에게 얻어맞은 자리였다.

“늑대의 왕...”

“스승님이 말씀했어요. 이 세상에는 인간의 이지(理智)가 닿지 않는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는 길을 마도(魔道)라 칭한다고요.”

“마도?”

어려운 말이 나오자 일자무식 용병들은 갑자기 날씨와 가족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로벨 역시 어렵긴 마찬가지였지만 중요한 정보인 듯해서 외면하지 않았다.

“지옥 같은 거야?”

“지옥도 마도의 세계 중 하나에요. 실체 너머 인지의 세계니까요. 옛 신의 사제들은 부정하겠지만...”

“잘 모르겠지만, 저 아가씨가 본 ‘무서운 기사’가 인간이 아니란 거야?”

인간이 아니면 괴물이다. 제시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했다.

“실체의 세계와 인지의 세계 사이에 위치한 자들이 있어요.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전해진 옛날 이야기,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본 동화 같은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자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들 중 강력한 힘을 가진 자를 ‘마도의 수호자’라 불러요. 늑대의 왕 리카온도 마도의 수호자 중 하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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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처녀들을 집까지 호위하게 했다. 그리고 로벨은 마녀 키르케, 아야와 이야카, 촌장의 손녀를 데리고 로드릭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앞에는 어울리지 않게 쇠스랑을 틀어쥔 촌장이 나와 있었다. 로벨 일행이 빈손으로 돌아오면 직접 찾으러 갈 작정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오오!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로벨은 허리에 손을 얹고 가족상봉을 지켜보았다. 촌장의 주름진 뺨과 손녀의 상기된 뺨이 저녁노을에 반짝였다. 마녀 키르케가 눈물을 닦는 시늉 했다.

“크흡! 좋은 일 했어요.”

“그럼 좀 더 해야지.”

“어떻게요?”

“그 무서운 기사를 찾을 거야.”

“어억? 진짜요?”

로벨은 롱소드의 폼멜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반년 동안 함께 지내온 마녀 키르케는 로벨이 피를 볼 작정이란 것을 알아챘다. 촌장이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서 로벨에게 다가왔다.

“My Lord,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하나뿐인 핏줄을 구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방앗간 장남 지미는?”

“아직 의식이 없습니다만... 영주님의 크나큰 은혜가 있으니 죽지 않을 겁니다.”

로벨은 자신이 무슨 은혜를 베풀었나 잠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은혜를 베풀기로 했다.

“키르케, 지미를 도와줄 수 있겠어?”

“전 의사가 아닌데요?”

“마녀들은 약술에 밝잖아?”

“그거 직업에 대한 편견인데...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알겠어요. 알았다고요.”

촌장과 손녀가 연신 굽신거렸다. 그러고 보니 봄 추수가 끝나면 촌장의 손녀와 방앗간 장남이 결혼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하긴, 성인 남녀가 단둘이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음흉하기는...”

“컹.”

아야가 순진무구한 눈으로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로벨은 두 남녀가 음흉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결혼세를 마련하려고 숲에 갔을 거야. 버섯이랑 약초가 자랄 시기잖아. 숲지기 허락도 없이 그런 짓을 하다니... 아주 음흉하지 않아?”

“컹! 컹! 컹컹!”

늑대 남매는 정말 그렇다는 듯 힘차게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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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울프 용병단이 인근 마을에서 돌아왔다. 그곳에서도 처녀들의 실종으로 난리가 나 있었다.

“우리 영주님처럼 발 벗고 찾아 나선 영주들은 아무도 없더이다.”

“우리 영주님이 유별난 거지.”

용병들과 마을주민 사이에서 로벨의 평판이 한층 올라갔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아침훈련을 마치고 성 밖으로 나오는 로벨을 새삼 존경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로벨이 입술을 떼는 순간 존경심을 버렸다.

“오늘부터 영지민을 위협하는 ‘무서운 기사’를 찾을 거야. 전원 완전무장하고 집합해.”

울프 용병단은 갑자기 주어진 고난이도 임무에 당황했다.

“저, 저기, 영주님? 마녀 아가씨 말대로라면 늑대왕인지 짐승왕인지 하는 회색산의 괴물하고 비슷한 놈이잖아요?”

“그럴지도.”

“그럼 우리들만으로 좀 힘들지 않을까요? 펄프 대장하고 동료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너무 늦어. 그 사이 영지민이 또 당할 수 있어.”

참 좋은 영주님지만, 썩 좋은 고용주는 아니었다. 울프 용병단은 구시렁거리며 무기를 챙겨왔다. 로벨 역시 컴포지트 아머를 단단히 갖춰 입었다.

로벨은 소집된 용병들의 무장상태를 확인한 후 빠르게 명령했다.

“외팔이 더치와 늙다리 잭슨은 마을을 지켜.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각각 두 명씩 데리고 숲 외곽을 순찰해.”

“예예...”

“으하핫! 알겠습니다!”

기운 빠진 웅얼거림 사이로 외팔이와 늙다리만 신이 나서 크게 대답했다. 로벨은 용병들을 격려했다.

“위험한 일은 하지 마. 만약 ‘무서운 기사’를 찾으면 싸우지 말고 곧장 성으로 연락해. 내가 직접 상대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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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말구유통에 앉아 성 밖으로 노려보았다. 그것 말고 할 일이 없었다.

밤이 찾아오자 홀로 남은 성은 스산할 만큼 고요했다. 말 한 마리와 늑대 두 마리가 곁에 있지만, 사회적인 관용과 문화적인 공감대를 나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벨은 어느 순간 성벽 위로 툭 튀어나온 반달을 보고 전투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잠잘 시간인데 방해해서 미안.”

푸르릉!

전투마가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혹은 얼굴 만지지 말라는 항의인지도 모르겠다. 로벨은 길고 지루한 밤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로벨 로드릭 남작.”

유리를 긁는 것처럼 섬뜩한 목소리였다. 로벨은 움찔해서 몸을 돌렸다. 성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

“남작이 애타게 찾는 자요. 초대장 보내는 것을 잊은 듯 하여 결례인 줄 알지만 이리 찾아왔소.”

‘그것’은 정중하게 말했다. 귀족처럼 품위 있게 말하지만 혀끝에서 냉기가 피어났다. 시체가 말해도 이것보다 정감이 갈 것이다.

“나를 알아?”

“늑대의 왕을 꺾은 자라 들었소이다.”

“...너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너도 그자와 같은 과야?”

‘그것’은 뾰족한 턱을 괴고 연병장 쪽으로 서너 걸음 걸었다.

“어려운 질문이요. 늑대와 개처럼 종이 같으냐는 질문이면 부정하겠으나, 존재의 의미, 사상, 추구하는 목적이 같으냐는 질문이면 온전하지 않으나 일부 긍정하겠소.”

내용은 둘째 치고 말하는 품새를 보아 늑대의 왕과 다른 자 같았다. 로벨은 말구유통에서 일어나 그것과 마주 섰다.

“왜 처녀들을 납치한 거야?”

“남작이 아침과 저녁에 행하는 것과 같은 이유요. 먹기 위해서.”

왼손으로 검집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롱소드 손잡이를 쥐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릴 때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너... 정체가 뭐야.”

그 순간, ‘그것’이 사라졌다. 로벨의 동공이 확장될 때 ‘그것’이 로벨 뒤에서 속삭였다.

“죽은 자의 왕, 밤의 주인, 야만인 학살자, 그대의 선지자들은 뱀파이어 군주 드라카라 부르기도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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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튕기듯이 몸을 던지며 등 뒤로 발검(拔劍)했다. 칼날이 밤공기를 갈랐다. 뱀파이어의 왕은 어느새 칼날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늑대왕과 다르오. 인간과 힘을 겨루는 고약한 취미 따위 없소.”

“그럼 왜 나타났지!”

“본인이 나타난 것이 아니오. 그대들이 불러낸 것이지.”

“우리가 불렀다고?”

로벨은 롱소드를 고쳐 쥐고 간격을 재었다. ‘네 걸음, 아니, 세 걸음!’ 그런 로벨이 불편한지 뱀파이어의 왕은 성벽 위로 순간이동했다.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이다.

“어두운 밤, 옷장을 열어본 적이 있소?”

“...옷장?”

“옷장 속에는 온갖 것이 다 있소. 작고 못생긴 악마, 나팔 부는 꼬마 천사,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사랑을 노래하는 요정.”

“무슨 헛소리야?”

로벨은 튜닉과 우플랑드 몇 벌 뿐인 자신의 옷장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뱀파이어의 왕이 말하는 옷장은 좀 다른 옷장 같았다.

“옷장 속의 괴물을 상상하는 것도, 옷장의 문을 여는 것도 인간이 하는 일이오. 사람을 산채로 잡아먹는 무서운 괴물도 스스로 옷장을 열고 나오지는 않는 법이오.”

로벨은 지식과 지혜보다 상상력에 의지해서 질문했다.

“누가 옷장을 열었는데?”

“그걸 말해주면 재미가 없지 않겠소?”

“뭐야?”

뱀파이어의 왕은 성벽 아래로 스르륵 넘어갔다. 로벨은 깜짝 놀라서 성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달빛 아래에서 웃던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 기사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언덕 아래에서 작은 등불이 흔들렸다. 마녀 키르케였다.

로벨은 롱소드를 꽂아 넣고 잰 걸음으로 다가갔다. 마녀 키르케가 등불을 높이 들고 말했다.

“설마, 저 기다린 거예요? 와아! 와! 감동! 감동이다!”

로벨은 차가운 진실과 따뜻한 거짓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다.

“방앗간 장남 지미는?”

“한두 달 요양해야겠지만, 음, 지금은 괜찮아요. 몸 상한 것보다 혼인을 못 할까봐 걱정하더라고요. 하여간 남자들이란...”

로벨은 평소와 다름없는 마녀 키르케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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