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3화 (23/605)

23화 고블린

23화 고블린

늑대와 개는 동족이었다. 오래전 갈라져서 인간의 손과 야생의 품에서 별개의 종처럼 자랐으나, 그 근원을 찾으면 친형제가 분명했다. 마녀 키르케는 그런 사실을 담백하게 증명했다.

“자자, 냄새 맡으라고. 피 냄새가 나지? 그치?”

마녀 키르케는 아야와 이야카의 코에 촌장의 옷을 가져다 대었다. 사람마다 냄새가 다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숲 어딘가 냄새가 나는 곳이 있을 것이다. 아야와 이야카가 개코, 아니, 늑대코로 납치현장을 찾아주길 바랬다.

“좋아! 출발!”

늑대 남매는 마을 개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머리가 좋았다. 훈련을 받지 않아도,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눈치가 좋아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컹! 컹컹! 컹!”

아야가 크게 짖고 숲 속을 달려갔다.

“자, 마스코트를 따르자.”

로벨은 롱소드를 빼들고 울프 용병단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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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마을 북쪽 이름 없는 숲은 전형적인 북방계 혼합림(混合林)이었다. 외곽 쪽은 수령이 얼마 안 된 양수나무가 듬성듬성 자라있지만, 조금 깊이 들어가면 세 자릿수 나이로 자기소개해야 할 거목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컹!”

“컹컹!”

이야카가 목청껏 짖자 아야가 숲 속 어딘가에서 따라 짖었다. 이야카는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달렸다.

“헥헥... 야야! 천천히 좀 가!”

마녀 키르케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지팡이 하나 지참한 마녀가 괴로워할 정도니, 무기와 갑옷을 갖춘 용병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체력이 가장 약한 용병이 낙오했다. 로벨은 책 속에 튀어나온 듯한 철푸덕! 소리에 화급히 손을 들었다.

“정지! 정지!”

지친 상태로 고블린과 조우하면 크게 당할 수 있었다. 체력을 보존해야 했다. 로벨은 숲을 헤집고 다니는 아야와 이야카에게 천천히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을 고심했다. 그러나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끼이잉...끼잉...”

“컹컹! 컹!”

아야와 이야카가 서로 만나 얼싸안았다. 사이 좋고 체력 좋은 오누이였다.

“하악! 하악! 여긴가 봐요!”

“끄으응! 꽃다운 37살에 죽을 뻔했네.”

“저쪽에... 3년 전 죽은 마누라가 보여... 여보...”

용병들은 무기를 팽개치고 땅바닥에 너부러졌다. 로벨도 나무줄기를 붙들고 잠시 숨을 골랐다. 완전무장하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로벨은 호흡이 조금 진정되자 진심으로 충고했다.

“다음에는 목줄 메고 수색하자.”

“아하? 그래요! 하나 배웠네요!”

로벨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꾹 참았다. 심장이 얌전해지자 나무줄기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조금 전 하고 싶었던 말을 깨끗이 잊었다. 컨틀렛이 축축했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피?”

“어어억! 기사 나리! 기사 나리!”

로벨이 기댄 나무줄기만이 아니었다. 외팔이 더치는 무심코 바위에 앉았다가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어서 일어났다. 애꾸눈 볼포스는 아바레스트를 풀고 쿼럴을 꺼냈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입니다.”

“컹!”

아야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고 짖었다.

“방앗간 지미의 피 일까요?”

“그런 것치고 좀 많은데?”

“그럼 촌장의 손녀?”

“...아니길 빌자. 볼포스, 추적할 수 있겠어?”

애꾸눈 볼포스는 핏자국을 확인하고 말했다.

“핏자국이 지저분한 것을 보아 핏방울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습니다. 이 정도... 아니, 이 정도 높이입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어깨높이를 가리켰다. 로벨은 근심을 담아 물었다.

“머리를 다친 거야?”

“그건 아닐 겁니다. 머리를 다치면 본능적으로 감싸기 때문에 이렇게 규칙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더불어 부상당한 것치고 빠른 속도로 움직였습니다. 이동방향과 출혈높이를 고려하면...”

애꾸눈 볼포스는 피가 튄 방향으로 서너 걸음 이동했다. 그곳에도 똑같은 흔적이 있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포박, 혹은 기절한 사람을 어깨로 둘러메고 이동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닙니다. 촌장의 손녀 외에도 납치당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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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외팔이도 이해할만한 아주 간단한 공식을 세웠다.

“납치 대상이 많으면, 납치한 몬스터도 많겠지?”

용병들은 곰팡이 핀 빵을 배식 받은 표정으로 무기를 주워들었다. 인간은 몸값을 위해 사람을 납치하지만, 몬스터는 ‘잡아먹기’ 위해 납치한다. 식료품 저장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 ‘식량’이 싱싱할 때 먹어치우는데, 그 기간이 최대 3일이었다. 즉, 3일 안에 먹지 못할 양이면 납치하지도 않았다.

“최소 두 사람을 먹어 치울 숫자라.”

인간은 덩치가 큰 동물에 속한다. 성인 두 사람을 먹어치울 무리면 최소 열 마리, 혹은 그 이상이라고 봐야 했다.

말귀가 어두운 아야와 이야카 대신 말이 잘 통하는 전직 사냥꾼 애꾸눈이 흔적을 찾았다. 핏자국을 찾아 바위에서 바위로, 나무뿌리에서 나무뿌리로 뛰어갔다. 그리고 말라죽은 떡갈나무 앞에서 정지신호를 보냈다.

“My Lord, 저쪽입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애꾸눈 볼포스가 가리킨 방향을 훔쳐보았다.

곰 굴처럼 생긴 땅굴 주위로 고목 껍질처럼 울퉁불퉁한 피부와 가시덤불처럼 삐쭉삐쭉 뛰어나온 이빨을 가진 괴물들이 모여 있었다. 옷차림은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놈부터 대놓고 덜렁거리는 놈까지 다양하나 손에는 돌도끼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앞에 보이는 놈만 여섯 마리입니다. 땅굴 아래 몇 마리가 더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우선 여섯이야. 사격 준비.”

애꾸눈 볼포스는 장전된 아바레스트를 견착했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늙다리 잭슨도 크로스보우와 숏보우에 각각 화살을 재었다. 세 명 중 두 사람만 명중해도 9대 4로 손쉽게 우위를 잡을 수 있다.

“발사.”

팡-!

로벨은 기대가 다소 높았음을 인정했다. 명사수 볼포스는 고블린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지만, 그 외 두 사람은 하늘과 땅을 쏘았다.

“으이구... 그러고도 크로스보우맨이냐?”

“난 원래 파이크맨이라니까! 그러는 댁도 빗나갔잖아!”

“이 활은 마을 사냥꾼한테 빌린 활이라...”

유서 깊은 남탓과 변명 중에 고블린이 반응했다.

“뀌이익! 뀍!”

“꾸잇!”

고블린이 떡갈나무를 가리키더니 일제히 달려왔다. 로벨은 롱소드를 단단히 잡고 한 걸음 떼었다.

“내가 오른쪽, 외팔이 더치가 왼쪽, 나머지는 중앙에서 저지해. 가자.”

“우아아아!”

울프 용병단은 함성을 지르며 고용주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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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봄날. 아름다운 숲속에서 인간과 고블린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칼날을 붓 삼고 핏물을 물감 삼아 숲이라는 도화지를 붉게 색칠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끊어 쳐서 조잡하다 못해 조악한 고블린의 돌도끼를 박살냈다. 애병을 잃은 고블린은 삐뚤삐뚤한 이빨로 비통함을 표시했다. “꾸이이익!”

“냄새나! 저리가!”

절제된 무기 파괴술이라 회수 및 반격이 쉬웠다. 로벨은 고블린 주둥이에 롱소드를 찔러 넣고 시계방향으로 비틀었다. 이빨이 부러져서 후루룩 떨어지고, 혀 아래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로벨은 롱소드를 당기는 대신 고블린을 발로 차 밀었다. 중추신경이 손상된 고블린은 힘없이 털썩 쓰러졌다. 로벨은 롱소드를 휘둘러 고블린의 피와 타액을 땅바닥에 뿌리고 다음 물감을 찾아 이동했다.

9대 5의 싸움, 그것도 당대 최강의 기사가 이끄는 9와 쇠붙이 한 장 걸치지 못한 몬스터 5의 싸움이었다. 승부가 삽시간에 갈렸다.

로벨이 오른쪽에서 두 마리를 처치할 동안, 외팔이 더치가 왼쪽을 막고 한 마리를 해치웠고, 그 외 용병들은 중앙에 갇힌 고블린을 숏 스피어와 부주(Vouge: 장대에 칼자루를 매단 단순한 창)로 때려잡았다. 수적 우위와 실력 차이로 손쉽게 포위섬멸 할 수 있었다. 외팔이 더치는 손수 머리를 쪼갠 고블린 시체에 발을 올리고 손도끼를 흔들었다.

“으하하핫! 이게 끝이냐? 끝이야? 더 덤벼!”

“야, 임마. 그러다 100마리쯤 몰려오면 어쩌려고.”

외팔이 더치는 ‘말이 씨가 된다’는 어머니 입버릇을 떠올리고 움츠렸다. 그러나 이게 끝이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를 어깨에 걸고 다가왔다.

“이놈들이 전부입니다.”

로벨은 피 묻은 롱소드를 닦으며 물었다.

“이상하지?”

“예. 이상한 일입니다. 고블린은 영악한 몬스터입니다. 고작 여섯 마리로 마을주민을 건드릴 리 없습니다. 보복당할 것을 아니까요.”

로벨은 승리로 들뜬 용병들을 진정시켰다. 애꾸눈 볼포스와 늙다리 잭슨에게 주위를 경계시키고, 허풍쟁이 제이콥과 용병들을 땅굴로 내려보냈다. 굴이 깊지 않은 듯 금방 되돌아왔다. 흙투성이 아가씨들과 함께였다.

“우리 살았어요! 정말 살았다고요!”

“영주님! 영주님! 구하러 와주셨군요! 으아앙-!”

구출된 아가씨 중에 촌장의 손녀도 있었다. 조부를 닮아서인지 로벨에게 달려와 과도하게 매달렸다. 소녀들의 로망인 백마 탄 기사님-숲길이 험해서 말을 놓고 왔지만-에게 구조되었으니 감격할 만도 했다. 그러나 로벨은 자기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제지해야 했다. 잠시 뒤 인상이 험악한 외팔이 더치와 인상(人相)이라 평가할 수도 없는 아야와 이야카가 가까이와 자발적으로 진정하게 만들었다.

“이 처녀들이 전부입니다요.”

로벨은 구조된 아가씨들을 보았다. 총 6명. 복장을 보아 농가의 여식들이었다. 로드릭 마을 이외에서도 납치한 모양이다.

“고블린이 이렇게 큰일을 벌일 리 없는데?”

애당초 인간의 숲에 고블린이 출몰한 것 자체가 이상했다. 마녀 키르케가 피 웅덩이를 밝지 않기 위해 꼬뜨 자락을 잡고 까치발로 총총 다가왔다.

“다들 굶주리고 지쳤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어요. 근데 왜 여자뿐일까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갑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몬스터는 여자를 밝히거든.”

“흐에에엑?”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쪽으로 말고. 여자가 육질이 부드러워서 그렇다나봐. 저항을 안 해서 사로잡기도 편하고.”

“하긴... 우리도 소나 돼지를 먹을 때 그렇죠...”

용병과 마녀가 끔찍한 이야기를 주고받자 아가씨들이 겁에 질렸다. 그때, 남달리 용감한 처녀가 두 손을 꼭 쥐고 한 걸음 나섰다.

“기사님, 전 자크 영지의 대장간 장녀 제시에요.”

로벨은 ‘여자와 아이를 보호하라’는 케케묵은 기사도를 떠올리고 애써 미소 지었다.

“자크 영지의 제시. 걱정하지 마. 집으로 돌려보내 줄게.”

“정말 감사해요. 저, 저기, 그거 말고 드릴 말이 있어요.”

제시는 용병들의 눈치 보았다. 로벨은 부드러운 말로 제시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말해.”

제시는 무서운 비밀을 밝히듯 주저하다가 로벨의 미소에 힘입어 쥐어짜듯 소리쳤다.

“괴물이 아니에요! 저, 저 마을에서 보았어요.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어두워서, 어둡고 무서워서 얼굴은 못 봤지만, 기사님이 괴물을 이끌고 있었어요. 이놈들은, 이놈들은 그 무서운 기사님의 부하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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