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소금광산
22화. 소금광산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승전 기념 토너먼트가 어수선하게 마무리되었다. 에릭 공작은 준결승 이상 진출자를 단상 앞에 모아 무용을 칭찬하고 상금을 하사했다.
로벨은 3연속 챔피언의 명예와 함께 우승 상금 8,000페닝, 그리고 낙마로 ‘포로’가 된 기사들에게 ‘몸값’ 2,000페닝을 받았다.
“1만 페닝! 이틀 만에 1만 페닝이라니! 역시 짭짤해요!”
어린 집사는 금화 자루를 끌어안고 양쪽 뺨을 번갈아 부비적거렸다. 이걸로 큰 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로벨은 새로운 근심거리에 관심을 두었다.
“볼프 후작은?”
어린 집사는 누가 볼 새라 금화 자루를 꽁꽁 싸서 안장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로드릭 성에 도착할 때까지 잠은 다 잤다.
“그쪽 하인들하고 이야기해 봤는데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해요. 배때기랑 허벅지에 쿼럴이 하나씩 박혔지만 급소는 피해서 요양만 잘하면 될 거라나요?”
로벨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용병들과 어울리더니 거친 단어들을 쓰기 시작했다. 날 잡아서 지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물었다.
“그럼 범인은?”
“그게 또 대단한 것이요, 몸뚱이에 화살을 꽂은 채로 암살자 셋을 몽땅 해치웠대요. 그 후작님, 샌님처럼 생겨 가지고 은근히 터프하죠.”
“전부 죽였다면... 소속이나 배후를 알 수 없겠네.”
로벨은 미간에 주름을 그렸다.
“그럼 에릭 공작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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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우승 축하연회를 열어야 하지만 볼프 후작의 암살미수 사건으로 잠정 연기, 사실상 취소되었다. 안 그래도 연회자리가 불편한 로벨은 미련 없이 짐을 챙겨서 장미성을 나왔다.
“고기랑 와인을 못 먹는 것이 좀 아쉽네요.”
어린 집사가 입맛을 다졌다. 로벨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듣지 못했다.
“볼프 후작에게 개인적이 원한을 가진 자, 후작위 계승에 불만을 가진 자, 혹은 프란시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이 화해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 셋 중 하나인데...”
“영주님? 영주님. 영주님... 영주님!”
억양이 제각각 다른 영주님들 중 로벨은 네 번째 영주님이었다. 네 번째 부름만 들었기 때문이다.
“응?”
어린 집사는 허리에 손을 얹고 가정교사가 학생을 혼내듯이 말했다.
“멀쩡히 살아있는 후작을 걱정할 때에요? 우리 코가 석 자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장사꾼 이문 안 남을까봐 걱정하는 거랑 귀족 나리 힘들까봐 걱정하는 거라잖아요.”
“나도 일단 귀족인데... 남작... 로드릭 남작...”
“그니까 아무도 영주님 걱정을 안 하죠.”
“아, 그런가?”
“세금 깎아주고, 급료 따박따박 챙겨주려고 이 고생을 하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만 늘어놓죠. 에잉! 못된 사람들!”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로벨은 전투마 위에서 팔짱을 끼고 턱을 긁었다. 기마의 흔들림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평온함이었다. 기사와 말은 부부 이상의 일심동체라는 주장이 사실이었다. 어린 집사는 말고삐를 살짝 당기고 말했다.
“여하튼 우린 우리 걱정이나 하자고요. 할 일이 산더미에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회색산을 개척해야지.”
“그 전에 용병들을 처리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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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로드릭 성에 도착하자마자 울프 용병단을 불러 모았다. 계약 내용대로 잔금을 지급하고, 연장 계약을 조율했다. 고향 생각이 간절한 용병 1명과 팔콘 요새에서 부상을 입은 용병 1명 제외하고 총 58명이 울프 용병단에 잔류했다.
“으아... 6,900페닝이 그냥 빠져나갔어요...”
“어쩔 수 없지.”
로벨은 지출을 감당했다. 광산개발을 위해서는 광부만큼이나 무장병력이 필요했다. 그래야 도적과 몬스터, 그리고 탐욕적인 영주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 광부들이 딴짓 못하게 감시하는 것은 덤이었다.
“광맥을 찾을 노련한 광부도 있어야 하고, 잡일꾼, 정제시설, 그리고 판매루트도 확보해야 해요. 상인길드 허락 없이 무턱대고 소금 사세요~ 외치고 다닐 수 없으니까요. 가만있자, 그 비용이 대충 얼마냐면...”
어린 집사는 주판알을 옮기며 계산했다. 숫자에 약한 로벨은 돕지 못하고 머쓱하게 한 마디 흘렸다.
“처음부터 크게 벌일 필요 없어.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자.”
“지금 최소금액을 뽑고 있는 거예요.”
어린 집사는 남은 토너먼트 상금과 직영지 수익과 로드릭 마을 상반기 세금을 합쳐서 예산을 짜기 시작했다. 춘경지에서 거둬드리는 작물을 전부 현금화하면 아슬아슬하게 초기비용을 맞출 수 있었다.
“여유자금이 10로닝도 없어요.”
“그, 그래?”
어린 집사는 주판알을 치우고 머리를 싸매었다.
“소금이 안 나오면 파산이에요. 최악의 경우 농지를 팔아야 할지도 몰라요. 그럼 영주님은 영주님이 아니고... 떠돌이 기사처럼 이리저리 돈 벌러 다니는... 투자를 잘못한 그랜드 챔피언의 비참한 말로가... 훗날 한탕주의를 경계하라는 좋은 본보기가 될지도...”
“잘 될 거야. 잘 된다고. 아야랑 이야카의 입맛을 믿어.”
로벨은 중얼중얼하는 어린 집사를 달래고 창밖을 보았다. 성 아래에 목돈이 들어와 희희낙락한 용병들이 있었다. 아무 걱정이 없어 보여 얄미웠다.
“그냥 놀릴 수 없지. 내일 당장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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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린 집사를 영주 대리인으로 삼고, 펄프 대장을 비롯한 50명의 울프 용병단을 출진 준비시켰다.
“회색산이라고?”
“그 괴물이 있는 곳이잖아?”
배 두드리며 놀고먹으려던 울프 용병단은 회색산으로 출발한다는 말에 당황했다. 늑대의 왕에게 당한 기억이 생생해서 거부감도 표시했다. 그러나 이미 계약금이 지불되었고, 로벨이 시퍼렇게 벼린 롱소드를 차고 있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고용주가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용병이었다.
“버팅거 시티에서 광부와 물자를 구할 거예요. 생산에 들어가려면 아마 한 달쯤 걸릴 거예요.”
“한 달?”
“그나마 소금광산이라 다행이죠. 철이나 구리광산이었으면 몇 달이 걸릴지 몰라요. 애당초 시설비용도 감당이 안 되고요.”
“...잘 아네?”
“옆 동네 영주님이 광산에 투자했다가 피 봤잖아요. 그래서 공부 좀 했죠.”
어린 집사는 로벨이 신경 쓰지 못하는 일도 척척 진행했다. 새삼 느끼지만 나이답지 않게 유능했다. 어린 집사가 없었으면 로벨도, 로드릭 영지도 지금껏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집사는 투덜거리며 떠나는 울프 용병단 후미에서 손을 흔들었다.
“보름 뒤에 1차 보고 올릴게요! 그때까지 연락 없으면 구하러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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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떠나자 성이 텅 빈 것처럼 조용했다.
매일 잔소리 듣던 로벨도, 아옹다옹하던 마녀 키르케도, 뒹굴고 놀던 아야와 이야카도 심심했다. 마녀가 늑대들을 꼭 끌어안고 물었다.
“우리도 따라 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로벨은 창틀에 걸터앉아 롱소드를 닦았다.
“안 돼. 한 달이나 성을 비울 수 없어.”
아무리 작은 영지라도 영주나 영주 대리인이 있어야 한다. 당장 봄 추수가 시작되면 토지세와 방앗간세를 거둬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산세, 결혼세, 판매세 등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그나마 로벨이 양심적이라 이정도지, 어느 지방 영주들은 조명세, 창문세, 화로세, 수염세, 모자세 등등도 거두었다.
“창문세가 뭐에요?”
“창문 숫자만큼 세금을 걷는 거야.”
“...그럼 모자세는 모자 숫자만큼 걷나요?”
“응. 모자가 많은 사람한테 세금을 부과하지.”
“으아... 농민들이 고생이 많네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지세만 해도 수확량의 20%인데, 방앗간 이용과 수확물 판매에 세금을 추가로 부과하고, 재산세, 인두세, 방위세 등등을 따로 거둬가니, 농민들은 소득의 50%, 많을 때는 80%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왜 도망가지 않나요?”
“도망 못 가. 야지에는 도적과 몬스터가 득실거리니까.”
그때 애꾸눈 볼포스가 집무실 밖에서 노크하고 말했다.
“My Lord, 마을 촌장이 알현을 요청합니다.”
로벨은 의아해서 되물었다.
“오늘은 알현하는 날이 아닌데?”
“옷에 피를 묻히고 왔습니다. 촌장의 성품을 생각하면 매우 시급한 일인 듯합니다.”
로벨은 얼굴을 찌푸렸다. 롱소드를 햇살에 비춰보고 검집에 밀어 넣었다. 스르릉-! 칼날 스치는 소리가 솜털을 곤두세웠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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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점잖고 예의 바른 촌장이 영주님을 뵙게 해달라며 소란을 피웠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로벨은 촌장의 앞섶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을 보았다. 누구 피인지 모르지만, 저 정도 출혈이면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일 것이다. 로벨은 숨을 들이마시고 버럭 소리쳤다.
“무슨 소란이야!”
위엄 있는 영주의 호통이라 용병 나부랭이보다 효과가 있었다. 늙은 촌장은 로벨을 보고 믿기지 않는 힘으로 용병들을 밀쳐냈다. 그리고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로벨 발아래 몸을 던졌다.
“My Lord, 제발! 제발 제 손녀딸을 살려주십시오!”
“크르르릉...”
아야와 이야카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달려왔다. 마녀 키르케가 목걸이를 잡았지만 1피트쯤 질질 끌려갔다. 까닥하면 손녀보다 할아버지가 먼저 갈 뻔했다.
“왜 그래? 어? 피 냄새 때문인가?”
로벨은 촌장이 붙잡고 늘어져서 흘러내리는 쇼오스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손 놓고 말해. 손 놔.”
말로 안 돼서 검집으로 울퉁불퉁한 손을 때렸다. 촌장은 간신히 떨어지나 싶더니 돌연 엉엉 울었다.
“고, 고블린입니다! 고블린! 제 하나뿐인 손녀딸이 고블린에게 잡혀갔습니다!”
“고블린?”
“지미가, 방앗간 지미가 와서, 피 흘리며 와서, 숲에, 숲에 고블린이 잡아갔다고 합니다! 영주님, 제발 제 손녀딸을 구해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로벨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우리 숲에 고블린이 있다고?”
로드릭 영지 토박이도 금시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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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을 시켜 성에 남아있는 용병을 전부 소집했다. 솜씨 좋고 장비 좋은 용병들은 회색산으로 보낸 터라 남은 용병은 조잡한 무기와 오래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로벨은 구멍이 숭숭 뚫린 클로스 아머와 닳고 닳아서 종이처럼 얇아진 레더 아머를 탐탁지 않게 보았다. 로벨의 무장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없어 컴포지트 아머를 입기가 불편했다. 급한 대로 왼팔과 왼쪽 어깨, 허벅지 파츠만 장착했다.
“산 채로 잡아간 것을 보아 당장 잡아먹진 않을 거야. 하지만 배가 고파지면 오늘 저녁이라도 해치겠지. 시간이 없어.”
허풍쟁이 제이콥이 자꾸 쳐지는 전통을 조이며 말했다.
“하, 하지만, 영주님. 고작 9명이서 무슨 수로 고블린 소굴을 찾아냅니까?”
“10명이에요!”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와 떡갈나무 지팡이를 챙겨서 뛰어왔다. 숨을 고르기 위해 뜸을 들였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2마리죠.”
아야와 이야카가 긍정하라는 듯 으르릉 거렸다. 마음이 약한 용병들은 순순히 긍정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