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1화 (21/605)

21화. 토너먼트

21화. 토너먼트

빠- 빠암- 빰-

푸른 봄 하늘 아래 황동 나팔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포비아 왕국을 상징하는 사자의 깃발과 프란시스 공작을 상징하는 장미의 깃발이 나란히 펼쳐지고, 그 아래 볼탄 반도를 주름잡는 30개 깃발이 정렬했다. 영광스럽게도 로벨 로드릭 남작의 깃발이 첫 줄에 자리했다.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이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야.”

“생각보다 젊은데?”

로벨은 랜스를 곧게 세우고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을 바라보았다.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로벨처럼 생각하는 기사들이 많은지 열병식은 길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경, 아니, 이제 로드릭 남작이던가? 실로 오랜만이오.”

로벨의 옆자리 기사가 아는 척했다. 헬름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지만, 깃발과 갑옷으로 정체를 추리할 수 있었다. 더욱이 로벨과 같은 대열이면 지난 대회 준우승자이니 알아보기 쉬웠다.

“볼프 사트로 후작.”

수도 포클랜드에서 결승전을 치른 전(前) 그랜드 챔피언 볼프 사트로 후작이었다. 그 당시에는 견습 딱지 뗀지 얼마 안 된 청년 기사였지만, 지금은 후계자 전쟁 중 사망한 사트로 후작의 뒤를 잇는 볼프 후작이었다.

“이 대회에 참가할 줄 몰랐소.”

프란시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의 알력다툼은 새삼 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다. 볼프 후작은 헬름 틈새로 웃음을 흘렸다.

“화해의 제스처로 좋지 않소?”

“화해?”

“양쪽 집안 모두 새 주인이 들어왔으니, 새 인연을 쌓을 좋은 기회라 생각하오.”

볼프 후작은 말을 몰아 경기장 주위를 돌았다. 환호하는 관객들 앞에서 말을 제자리걸음 시키며 손을 흔들었다.

“재미있네.”

까칠한 로벨은 퍼포먼스 따위 집어치우고 곧장 야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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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경기장은 프란시스 시티 북쪽 벌판에 설치되었고, 토너먼트 참가자는 경기장 동쪽에 캠프를 차렸다.

수십 마리의 말과 수백 명의 사람이 천막 사이를 오갔다. 경기 참가자만 모인 것이 아니었다. 갑옷을 수리하는 대장장이, 기사와 수행원을 유혹하는 창녀, 시합참가 비용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 등등도 활기차게 돌아다녔다.

“작년하고 똑같이 주스트(Joust:개인전)로 치러져요. 영주님한테 유리하죠.”

어린 집사가 토너먼트 규칙을 확인했다. 시합 규칙이 지역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바뀌어서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다.

“한 시합에 창 3자루에요. 창을 더 많이 부러트린 쪽이 승리해요. 아, 점수가 높아도 낙마하면 무조건 패배에요. 몸값이 1천 페닝으로 지정되어 있으니까, 절대, 절대절대 낙마하면 안 돼요. 그리고... 3회 돌격으로 승부가 나지 않으면 도보전(徒步戰)을 시작해요. 어어? 상대방을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고의성이 보이면 즉시 실격이라네요.”

로벨은 버드나세(Bourdonasse: 시합용 랜스) 창끝에 헝겊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이면 상대를 낙마시켜서 몸값도 챙겨요. 결승까지 총 5번 싸우죠? 히힛! 전부 낙마시키면 5천 페닝이에요!”

로벨은 꿈이 지나치게 큰 어린 집사를 타일렀다.

“그건 힘들어.”

진짜 랜스라면 모르지만, 쉽게 부러지는 버드나세로 중장갑 기사를 낙마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힘, 속도, 절묘한 기술, 그리고 행운이 필요했다.

‘늑대의 기사라면 모르지만.’

로벨은 끔찍하게 강한 늑대의 왕을 떠올렸다. 울프 용병단과 마녀 키르케가 아니었으면 결코 이길 수 없었다.

“그자에 비하면야.”

“그자요? 그자 누구요?”

로벨은 설명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 전에 몸을 달궈놔야 했다. 사람과 말 모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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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

시속 25마일 속도로 질주하며 8피트 길이의 창을 찔렀다. 창끝의 작은 한 점을 마주 달려오는 상대방에게 찔러 넣기 위해서는 적절한 요령과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버드나세가 부러지지 않으면 그 공격은 실패로 처리된다. 속 빈 포플러나무라 해도 충분한 힘과 정확한 타격이 아니면 쉬이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벨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좋아요! 2점 벌었어요!”

로벨은 처음 위치로 돌아와 세 번째 창을 받았다. 현재 스코어 2대 1이었다.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결승 진출이 확정이었다.

“서 로벨! 서 로벨! 서 로벨!”

“그랜드 챔피언! 그랜드 챔피언!”

귀족, 평민, 남자, 여자, 노인,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든 관객이 환호했다. 유라피아 대륙 최고의 스포츠다웠다.

로벨은 전투마의 엉덩이를 두드리고 버드나세의 손잡이를 랜스 레스트(Lance rest: 갑옷 겨드랑이 고리. 랜스를 고정시키는 곳)에 걸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커지는 상대방에게 창끝을 맞추었다.

까-강!

랜스가 아니라 버드나세를 사용하는 것은 비단 기사의 안전 때문만이 아니었다. 산산조각으로 휘날리는 나무파편이 화려하기 때문이었다.

로벨은 전투마를 세우고 부러진 창을 수직으로 높이 들었다. 그런 로벨 뒤로 준결승 진출자 오웬 경이 힘없이 기울어졌다.

쿵!

갑옷을 입은 기사의 낙마는 무겁고 요란했다.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흥분을 못 이겨서 모자를 던지고 맥주를 뿌리는 관객도 있었다.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손을 한번 흔들었다. 여자들의 환호성이 한층 더 커졌다.

로벨은 대기석으로 돌아와 종자 노릇을 하는 어린 집사에게 창과 말고삐를 주었다.

“오웬 경이 낙마했어요! 낙마!”

“응.”

“영주님도 참! 아침에는 못할 것처럼 말하더니, 벌써 두 명을 낙마시켰어요! 2천 페닝! 2천 페닝을 벌었다구요! 으히힛! 영주님 실력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가?”

로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쩐지 작년보다 쉬운 느낌이었다. 도트넘 자작군과 전쟁, 팔콘 요새 전투, 그리고 늑대의 왕 리카온과 싸우면서 알게 모르게 성장했다.

기절한 오웬 경이 실려 나가고, 큼직한 파편이 급하게 치워지고, 곧장 다음 경기가 시작되었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실력, 그리고 적극적인 퍼포먼스로 로벨만큼이나 인기가 많은 볼프 사트로 후작이었다.

“칫! 우리 영주님하고 안 만나서 여기까지 온 거지. 운이 좋아.”

“조용.”

로벨은 아멧을 벗고 시합에 집중했다. 어릿광대가 괴기한 춤으로 이목을 사로잡은 후 기사들을 소개했다.

“북방의 사자! 북풍의 기사! 북해의 주인! 그 용맹함은 사자보다 무섭고, 그 창은 바람보다 빠르다! 사트로 가문의 새로운 주인! 볼프 사트로!”

로벨 못지않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시시덕거리면서 토너먼트에 나와요? 사람이 할 짓인가?”

“평화의 제스처라잖아. 류트 공자 일로 틀어진 두 가문이 화해하는데 이만한 행사도 없어.”

“그건 그렇지만...”

잠시 뒤, 볼프 후작과 피핀 경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마상창이 3대 3 동점을 이루고, 말에서 내려 롱소드와 메이스로 백병전을 치렀다. 중병기가 맞부딪치며 불꽃과 굉음을 자아냈다.

“이야, 치열하네요. 준결승다워요.”

“아니. 볼프 후작이 봐주고 있어.”

머리로 떨어지는 메이스를 쳐내고, 허리로 날아드는 롱소드를 피하고, 어깨를 부딪쳐 힘 싸움 좀 하다가 떨어졌다.

볼프 후작은 멋진 공방을 주고받다가 관객들의 긴장이 풀어질 때쯤 상대방의 손목을 쳐서 제압했다. 피핀 경은 패배를 인정하고 기사답게 항복했다.

“기사의 명예와 관객의 재미를 모두 고려한 연출이야.”

어린 집사는 긴가민가해서 볼프 후작을 관찰했다. 그리고 로벨의 말을 이해했다. 볼프 후작이 헬름을 벗었는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정말... 타고난 탤런트군요.”

피핀 경이 말을 끌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관전 중인 로벨을 발견하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조금 숙였다.

“로벨 남작, 꼭 승리하시오. 이곳은 프란시스 공작의 땅이오. 사트로 후작에게 우승컵을 안겨줄 수 없소이다.”

로벨은 어떤 멋진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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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가 물구나무를 서서 통통 튀었다. 키가 작고 통통해서 바람 넣은 돼지오줌보처럼 보였다.

“프란시스 공작 주최 승전기념 토너먼트 대망의 결승전! 수도 포클랜드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두 명의 그랜드 챔피언이 다시 붙습니다! 헥헥! 숨넘어가겠다.”

대사가 너무 길어서인지, 물구나무가 힘들어서인지 헉헉 걸렸다. 관객들이 낄낄 웃으며 야유를 퍼부었다. 의도한 것이라면 대단히 유능한 광대였다.

어릿광대는 백 덤블링으로 자세를 바로잡고-의도한 게 맞는 듯하다- 다시 소개를 이어갔다.

“그야말로 용과 호랑이의 싸움! 곰과 사자의 싸움! 옆집 부부싸움 다음으로 무시무시한 챔피언의 싸움이 펼쳐집니다! 아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어제 먹은 사슴 고기가 얹혔나?”

어릿광대는 과장된 말과 행동으로 분위기를 띄우며 에릭 공작과 진행자를 살폈다. 관객들의 야유에 조바심이 피어날 때 깃발이 올라왔다. 어릿광대는 안도하고 덤블링을 두 바퀴 돌아 우측 청코너를 가리켰다.

“팔콘 요새의 정복자! 일기당천의 살아있는 전설! 국왕폐하께서도 인정한 최강의 기사! 그 누가 내 창을 받을쏘냐! 로벨 로드릭!”

로벨은 소음 때문에 흥분한 전투마를 다독이며 시합장으로 들어갔다. 관객들이 자지러질 듯 함성을 질렀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 관객 대부분이 프란시스 공작의 봉신인 로벨의 편이었다.

“북방을 지배하는 위대한 기사!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멋쟁이 기사! 한 손에 검을, 다른 한 손에 장미를 가져왔도다! 볼프 사트로!”

“우우우우우!”

경계심이 가득 담긴 야유. 하지만 경기에 대한 기대로 금방 함성이 되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뭐야, 왜 안 나와?”

“무슨 일이야?”

“나, 나도 몰라.”

어릿광대의 소개가 끝났는데도 볼프 후작이 나오지 않았다.

로벨은 말갈기를 쓸어내리며 홍코너의 대기실을 노려보았다. 눈에 띄게 어수선했다. 후작을 수행하는 젊은 기사가 에릭 공작 내외에게 달려가 무언가 속삭였다. 에릭 공작의 표정이 아주 안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작년 가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데자뷰인가?’

에릭 공작이 어릿광대를 불러서 무언가 지시했다. 어릿광대 역시 당황했으나 고용주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에... 갑작스러운 소식입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일신상의 이유로 기권했습니다. 와아아! 챔피언! 로벨 로드릭! 우와아!”

어릿광대가 함성을 유도했지만 부질없었다. 관객들은 술잔을 던지며 야유했다. 우우우! 우우!

“기권?”

로벨은 어릿광대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볼프 후작의 성격상 싸우다 죽으며 죽었지 기권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집사가 진행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후다닥 돌아왔다. 그리고 기쁜 건지 무서운 건지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님! 영주님! 볼프 사트로 후작이 피습을 당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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