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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0화 (20/605)

20화. 급료

20화. 급료

로벨은 페르젠 백작을 따라 폭풍성의 메인 홀로 들어갔다. 폭풍성의 이름을 따서 폭풍의 홀이라 불리는 장소였다. 3백 년의 세월이 묻어나는 장엄한 홀이기도 했다.

폭풍의 홀 중앙에는 에릭 공작의 최측근이자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대영주들이 모여 있었다. 수백의 군사를 거느린 백작, 자작들이 로벨을 환영했다. 에릭 공작 또한 술잔을 시종에게 넘기고 로벨을 돌아보았다.

“서 로벨 로드릭. 팔콘 요새를 점령하고 회색산을 정복한 공적을 매우 높이 산다. 그리해서 서 로벨을 남작(Baron)으로 봉하고, 팔콘 요새의 수비를 위임하고자 한다.”

사전에 이야기가 된 듯 가벼운 박수가 흘러나왔다. 로벨은 작위보다 팔콘 요새에 집중했다. 비명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My Lord, 팔콘 요새 점령은 전적으로 페르젠 백작의 공입니다. 제가 요새를 받을 수 없습니다.”

속내를 까발리자면, 로드릭 성 하나 지키는 것도 힘든데, 세금도 안 나오는 요새를 떠안기 싫었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릭 공작, 페르젠 백작, 그 외에 여러 귀족들이 로벨 로드릭의 겸손함을 칭찬했다.

“그럼 남작은 따로 원하는 것이 있는가?”

로벨은 ‘남작’이란 호칭이 익숙지 않아 손가락 발가락을 곰지락했다. 그러다 로벨치고는 아주 놀라운, 상재에 밝았던 필립 로드릭이 모자란 딸내미를 위해 잠깐 빙의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놀라운 요청을 했다.

“가능하다면, 랭스터 백작령의 회색산을 원합니다.”

에릭 공작이 의아해서 되물었다.

“남작이 점령한 곳이니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바위산이 아닌가?”

로벨은 웃음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제게는 충분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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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전쟁’이 끝났다.

전쟁의 시작이 그러했듯, 전쟁의 결말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영주들은 안심했고, 용병들은 아쉬워했으며, 시민들은 기뻐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승리선언과 함께 봉신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에릭 공작이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창과 방패 대신 펜과 종이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충성심을 증명한 봉신을 치하하고, 정적이 된 봉신을 제거하고, 양자 사이에서 눈치를 본 봉신을 갈구는 일이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지어 문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볼탄 반도 북부에 자그마한 장원을 가진 로벨 로드릭 남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출진 29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집사는 사랑하는 주인의 귀환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슨 염소도 아니고, 용병을 새끼 쳐서 돌아왔어요?”

울프 용병단은 6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로드릭 영지의 경제수준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영지민이 300명인데 용병이 60명이면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

로벨은 방방 뛰는 어린 집사를 잡아끌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팔콘 요새 전투, 그리고 늑대의 왕과 회색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 집사 또래의 사내 아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박진감 넘치는 전투에 혼을 빼고 집중했다.

“...그래서 회색산을 봉토로 받았어.”

어린 집사는 ‘암염’이란 말에 엉엉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진짜, 진짜진짜 암염이 있어요? 진짜요?”

로벨은 집 나간 부모님을 찾는 듯한 간절한 모습에 심적 부담을 느꼈다.

“아마도?”

“아마도로 안 돼요! 저 용병들을 보세요! 순도 100% 야생 용병이라고요! 저런 용병은 돈을 안 주면 도적이 되어요!”

전문직 종사자의 자부심을 가진 허풍쟁이 제이콥이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겠다. 로벨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말이야. 펄프 대장을 대장 삼아서 회색산으로 보낼까 해. 소금을 보면 도적질을 하지 않을 거야.”

어린 집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곤조곤 따졌다.

“소금이 정말 있고, 채굴이 정말 가능하면 돈이 되겠죠. 그런데 채굴할 돈이 없잖아요? 회색산은 너무 멀어서 영지민을 보낼 수 없어요. 억지로 보내도 농부가 광부를 흉내 낼 수도 없고요. 결국 돈이 필요한데...”

로벨은 흉갑을 딱! 소리 나게 두드렸다.

“그건 걱정하지 마.”

“어? 돈 빌려줄 사람이라도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나 돈 벌 줄 알아.”

“영주님이요? 으헤헤! 재미난 농담... 이 아니구나. 봄이네요?”

어린 집사는 뜬금없는 소리로 마무리하고 활짝 웃었다.

“아, 그런데 할 수 있을까요?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텐데요.”

“그래서 더욱 크게 할 거야. 승전 기념이잖아.”

로벨은 자신만만했다. 사흘 뒤, 로벨의 짐작대로 프란시스 공작이 주최하는 승전 기념 토너먼트 일정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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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분해해서 꼼꼼하게 정비했다.

판금은 찌그러진 부분을 망치로 핀 다음 기름칠하고, 사슬은 구멍 난 곳을 메꾼 다음 모래통에 넣어 굴렸다. 그리고 가죽끈을 교체해서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흠집 난 곳이 많네요.”

“오래 썼으니까.”

로벨의 컴포지트 아머는 사슬로 강화된 아밍 더블릿 위에 판금 파츠를 덧입는 형태였다. 최신 플레이트 아머에 비하면 크고 무겁지만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값이 싸고, 수리가 쉬우며, 덩치가 크게 보였다. 로벨은 마지막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돈 많이 벌면 새 갑옷을 사요.”

“난 이 갑옷이 좋아.”

로벨은 흠집투성이 컴포지트 아머를 쓸어 만졌다. 아버지와 큰 오빠가 입은 갑옷이었다.

“그럼 준비가 끝난 건가요?”

“응.”

어린 집사는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계산했다.

“가만있자, 95일까지 프란시스 시티에 도착해야 하니까, 조금 여유 있게 91일에 출발하면 될 거에요. 사흘 정도 시간이 남아요. 애매한 시간이네요. 계획이 있어요?”

로벨은 우플랑드의 허리띠를 조이고 소드 벨트를 둘렀다. 롱소드와 대거가 철컹 소리를 내었다.

“영주가 해야 할 일.”

“그 일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 순시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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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전투마를 타고 늠름하게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주민과 울프 용병단원이 일손을 놓고 머리를 조아렸다.

볼탄 반도에서 로벨만큼 존경받는 영주도 드물었다. 실력 좋고, 성격 좋고, 명성까지 드높으니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좀 가난해서 그렇지. 로드릭 마을 촌장이 지팡이를 짚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My Lord, 이 이른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냥. 농사는 잘 돼?”

“영주님의 은덕으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로벨은 전투마를 몰아 콩과 보리가 심어진 춘경지를 찾아갔다. 아침 해가 빼꼼하게 내민 들판에서 아낙들은 싹이 난 잡초를 뽑고 아이들은 장대를 휘두르며 새를 쫓았다.

“잘 되고 있구나.”

“어린 집사가 애를 많이 썼습니다.”

보름 전, 멧돼지가 출몰해서 콩밭과 보리밭을 헤집어 놓았는데, 어린 집사가 청년들을 모아 덫을 놓고 몰이해서 잡았다고 한다. 촌장은 어린 집사가 건방지고, 시끄럽고, 깐깐하고, 까칠하지만 일은 잘한다고 칭찬했다.

‘칭찬이 아닌 거 같은데...’

로벨은 공용축사에서 농마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방앗간에서 보릿가루를 조금 챙긴 다음 마을에서 빵으로 바꿨다. 마녀 키르케가 온 뒤로 음식 구걸을 다니지 않아도 되지만, 기왕 마을까지 내려왔으니 성 식구들을 위해 한 끼 신세를 졌다.

순시를 마치고 성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헤헤. 기사 나리, 벌써 집에 가십니까?”

용병들이 건들거리면서 비굴하게 말을 걸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 신기했다. 천성이 용병이라 예의를 알지 못했다.

“왜?”

용병들은 서로의 눈치를 조금 보고 조심스레 말했다.

“급한 일은 아니굽쇼. 그 뭐시냐, 그러니까...”

“계약금은 볼턴 경에게 받았으니 상관없지만, 잔금이 남아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도 꽤 되었는데...”

로벨은 롱소드 폼멜에 왼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다분히 의식적이었다. 로벨의 칼솜씨를 수차례 보아온 용병들은 움찔해서 한 걸음을 물러났다. 로벨은 미안한 감정을 숨기고 강경하게 말했다.

“떼먹을 생각 없어. 전쟁이 일찍 끝나서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야. 너희들도 40일 이상 종군할 작정이었잖아?”

용병들은 머리를 굴려보았다. 괴물 같은 기사와 드잡이해서 몸 상하고 잔금 날리는 것보다 며칠 더 기다리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급료가 늦는 것만 빼면 ‘울프 용병단’이 나쁘지도 않았다. 로벨 로드릭 남작의 용병단이라하면 동업자들이 꾸벅 죽었다.

“그럼 기사 나리만 믿겠습니다.”

“그래. 믿어.”

용병들은 쭈뼛거리면서 마을로 내려갔다. 로벨이 버티고 있으니 얌전히 지내겠지만,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우려가 현실임을 인정하고 성으로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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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전투마를 빗질하고 안장과 등자를 올렸다. 젊은 말이라 건강은 이상 없으나 조만간 편자를 갈아야 할 듯했다.

“에... 빠진 것 없죠?”

경비절감을 위해 어린 집사 한 명만 대동하기로 했다. 항상 그랬지만, 로벨은 돈이 부족했다.

펄프 대장과 촌장에게 성 관리를 맡기고-어린 집사는 자신과 주인 이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태도로 창고와 집무실을 삼중으로 봉인했다- 사흘 치 식량, 잘 손질된 무기와 갑옷, 그리고 약간의 노잣돈을 준비했다.

“잘 다녀오세욧!”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를 목줄 메고 배웅 나왔다. 늑대 남매는 바깥바람에 맛 들여서 로벨이 짐을 싸면 무조건 따라가려고 했다. 로벨은 귀를 젖히고 불쌍한 척 “끼잉-” 소리를 내는 늑대들을 쓰다듬었다.

“집 지키고 있어. 열흘 안에 돌아올 테니까.”

“저만 믿으세요. 히힛!”

“......”

아야한테 한 말인데 마녀 키르케가 대답했다. 로벨은 덤으로 마녀 키르케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펄프 대장을 잘 도와줘. 외팔이 더치하고 싸우지 말고.”

마녀 키르케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가 몸을 쭉 폈다. 펄프 대장이 히죽 웃었다.

“늑대 용병단인데 늑대는 없고 강아지만 셋이오.”

“강아지도 물 줄 알거든요?”

마녀 키르케가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펄프 대장은 찔끔해서 딴청을 부렸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영주님의 실력은 잘 알지만, 그래도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로벨은 안장에 훌쩍 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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