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반신
19화. 반신
늑대의 기사.
기사(Knight)라고 불리지만 진짜 기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로 어두운 밤에 등장하며, 그 형상을 본 사람은 수일 내 사고를 당해 죽거나 병이 들어 죽었다. 포비아 왕국보다 옆 나라 에르나 왕국에서 더욱 유명했다.
로벨은 늑대의 기사 전설을 속성으로 강의 받고 의문을 표시했다.
“지금은 낮인데?”
늑대의 왕 리카온은 츠바이핸더를 어깨 위에 척! 걸치고 말했다.
“최근 무명을 떨치는 젊은 기사가 있다더니, 그게 바로 너로군.”
“그러는 넌 누구지? 진짜 늑대의 기사야?”
“난 늑대의 왕 리카온이다.”
눈치가 심각하게 모자란 외팔이 더치가 속닥였다.
“지 입으로 지가 왕이래. 웃긴다. 그치?”
“쉿! 쉿!”
사람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지만, 귀는 늑대만큼 밝은 모양이다. 늑대의 왕은 외팔이 더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외팔이 더치는 찔끔해서 자신보다 작은 애꾸눈 볼포스 뒤에 숨었다.
“크르르릉...”
“끼잉...”
아야와 이야카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하지만 싸울 생각은 없는 듯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고 있었다. 늑대의 왕에게 겁먹고 있었다.
로벨은 롱소드를 머리 위에 세워 상단세를 취하고 말했다.
“우린 랭스터 백작군과 싸우기 위해 왔어. 적이 아니면 싸우고 싶지 않아.”
늑대의 왕은 로벨의 자세를 살핀 후 말했다.
“안 되겠는데.”
“뭐가?”
늑대의 왕이 이빨을 보였다. 어쩐지 익숙한 표정이었다. 아야와 이야카가 먹잇감을 잡았을 때와 보이는 표정과 비슷했다.
“모처럼 쓸만한 인간을 만났는데 그냥 보낼 수 없지.”
그리고 사나운 그리즐리처럼 달려들었다. 로벨은 왠지 억울해서 소리쳤다.
“늑대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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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핸더는 본래 장창병을 상대하기 위한 무기였다. 크고 무거운 칼날은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스피어 월(Spear Wall)을 파해하기 좋았다.
“큭!”
다시 말해, 창날을 꺾고 창대를 부러트리는 거병이었다. 롱소드로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에 대한 신뢰를 잠시 접어두고 옆으로 굴렀다. 로벨이 서 있던 자리에 팔뚝만한 칼날이 떨어졌다. 땅이 움푹 파이고 자갈이 튀어 올랐다. 팔콘 요새에서 겪은 포격이 생각났다.
로벨은 한 바퀴 구른 후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롱소드를 찔렀다. 칼끝이 늑대의 왕 옆구리에 꽂혔다.
찡-!
바위를 찌른 것처럼 칼날이 진동했다. 컨틀렛이 아니면 칼자루를 놓쳤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야!’
로벨은 늑대의 왕 뒤로 돌아갔다. 츠바이핸더의 길이를 생각하면 뒤로 물러나는 것은 위험했다. 철저하게 3피트 간격을 유지해야 했다.
“흡!”
로벨은 성벽 같은 등짝을 향해 롱소드를 내려쳤다. 곰 가죽 아래 무슨 갑옷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계속 때리면 데미지가 축적될 것이다. 그러나 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늑대의 왕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츠바이핸더만 뒤로 돌려 참격을 막았다. 깡!
한편, 구경꾼이 된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은 두 기사의 싸움을 넋 놓고 보았다.
“저 덩치에 저 몸놀림이라니...”
“그, 그래도 우리 기사님이 더 빠르죠?”
“그럼 뭐해? 피해를 못 주잖아?”
애꾸눈 볼포스는 아바레스트에서 윈드라스를 떼어내고 촉이 송곳 모양인 철제 쿼럴을 골라 몸체에 올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주님이 쓰러지면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 그렇지! 구경할 때가 아니야! 크로스보우! 준비!”
기사도, 결투, 정정당당함 따위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크로우보우맨들은 늑대의 기사를 겨냥했다. 로벨을 맞히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했다.
늑대의 왕은 거대한 츠바이핸더를 회초리 마냥 붕붕 휘둘렀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아도 로벨의 동선을 정확히 차단하고 있었다. 로벨은 머리를 젖혀서 피하고, 다리를 들어 피했지만, 이어지는 몸통 횡베기만큼은 피할 수 없어 막았다.
쾅!
정말 쾅! 소리가 났는지, 머릿속에서 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롱소드를 폴드런(Pauldron: 어깨 방어구)에 붙여서 전신으로 방어했는데도 충격에 붕 떠서 날아갔다. 사람이 사람을 때려서 날리는 것이 가능할 줄 몰랐다.
“지금이다! 쏴라!”
애꾸눈 볼포스는 기회가 오자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10여 발의 쿼럴이 늑대의 왕을 두드렸다. 하지만 곰 가죽에 꽂힌 쿼럴 한 발이 최대성과였다. 그 외에는 절벽에다 쏜 것처럼 힘없이 튕겨나갔다. 그래도 부가적인 효과가 하나 있었다. 늑대의 왕이 불쾌해 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스프 속에서 벌레를 발견한 듯한 표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곧 자신들이 벌레 입장임을 깨달았다.
“훼방꾼부터 치워야겠군.”
늑대의 왕은 츠바이핸더를 가로로 눕히고 다리와 허리를 구부렸다. 울프 용병단을 향해 달려들 자세였다. 상상력이 풍부한 제이콥은 산산조각이 나는 동료들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었다. 그때, 전력 외로 취급한 사람이 나섰다.
“랄라라... 거친 바람아 울지 마라. 잠든 불꽃이 깨어날라. 랄라라... 랄라라... 성난 짐승아 오지 마라. 시든 꽃잎이 떨어질랏!”
마녀 키르케가 가죽망토를 벗고 아야와 이야카를 혼내는 용도로 사용하던 떡갈나무 지팡이를 흔들었다. 드루이드의 속박술이었다.
늑대의 왕은 움츠린 자세에서 멈칫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잠깐을 놓치지 않을 만큼 뛰어난 기사가 있었다.
“하앗!”
로벨은 롱소드를 역수로 쥐고 딱 좋은 높이에 무방비하게 놓인 늑대의 왕 뒷목을 내리찍었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칼질하는 느낌이었다. 단단하고, 단단하고, 단단하다가, 어느 순간 칼날이 쑥 들어갔다.
로벨의 롱소드가 늑대의 왕 목에 거꾸로 꽂혔다. 늑대의 왕은 실로 늑대답게 울부짖었다.
“깨갱! 깽!”
“...좀 더 폼나게 짖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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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롱소드를 회수할 생각 따위 일찌감치 버리고 아군 진영으로 물러났다. 펄프 대장에게 검을 달라고 신호했는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풋맨을 지휘해 늑대의 왕을 포위했다.
늑대의 왕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온 칼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죽었나?”
“다, 당연히 죽었지! 목에 칼 꽂고 살아있으면 사람이 아니... 으아! 사람이 아니잖아!”
늑대의 왕이 츠바이핸더를 지팡이처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칼 맞은 사람치고 평온했다. 어디까지 칼 맞은 사람치고 말이다.
“진부한 대사지만 꼭 해야겠군. 나를 무릎 꿇게 한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간절한 신호를 보냈다. ‘칼 좀 줘!’ 펄프 대장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초라해도 대거를 뽑아야하나 고민하는데, 늑대의 왕이 츠바이핸더를 땅바닥에 쿵! 소리 나게 찍었다.
“내가 졌다.”
그리고 두 손을 목 뒤로 가져가 롱소드를 뽑았다. 한 치씩 뽑힐 때마다 핏물이 꿀렁꿀렁 쏟아졌다. 그로데스크한 광경이었다.
“싸움에서 진 늑대는 얌전히 떠나야지. 이 산은 이제 네 것이다.”
“아니... 랭스터 백작 땅인데...”
“허나, 다시 만나면 오늘 같지 않을 것이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그 이름을 기억해두겠다.”
기어이 롱소드를 뽑아냈다. 피투성이가 된 칼날을 앞뒤로 살펴보고 로벨에게 던져주었다. 로벨이 롱소드를 받는 순간, 늑대의 왕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디 간 거야?”
“마, 마, 마법이다! 조심해!”
울프 용병단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소란을 피웠다.
로벨은 롱소드의 핏물을 털어내고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다시 안 보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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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옛 신의 저주로 늑대가 된 시크론 섬의 영주. 최초의 늑대인간이자 짐승들의 왕. 지금에 와서는 반신(Demigod)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에요.”
“그니까 인간이 아니란 거잖소.”
마녀 키르케의 설명이 끝나자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이야, 그럼 우리가 신적인 존재를 이긴 거네?”
“말은 똑바로 하자. 영주님이 이긴 거잖아.”
긴장이 풀린 탓인지 평소보다 시끄러웠다.
로벨은 겨우 떨림이 멈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눈치코치 없는 펄프 대장에게 명령했다.
“우리 임무는 끝났어. 복귀하자.”
“아, 예. 복귀해야... 그런데 공작님이 이 이야기를 믿어줄까요?”
“글쎄.”
울프 용병단은 시신을 수습하고 내팽개친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 회색산 아래로 내려갔다.
팔콘 요새에 이어서 회색산까지 점령(?)했으니 전쟁영웅으로 대접받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볼탄 반도 남부대로에 들어서서 기대를 접어야 했다.
“버팅거 시티를 탈환했다고?”
“예예. 사트로 후작이 급사하는 바람에 버팅거 시티에 주둔 중인 후작군이 전부 철수했습니다.”
“급사?”
“암살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고, 지병을 앓았다는 소문도 있고... 아무튼 새 후작인 볼프 사트로 후작은 후계자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류트 공자와 랭스터 백작은 자신들 병력만으로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잉그비아 왕국으로 도주했습니다.”
로벨 이하 울프 용병단은 서로를 떨떠름하게 보았다.
“그러니까 뭐야, 우리가 없는 곳에서 전쟁이 끝나 버렸다고?”
“버팅거 시티 폭풍성에서 논공행상하니 전쟁에 참전한 기사들은 전원 참석하라는 명령입니다.”
에릭 공작의 전령은 전할 말을 전하고 훌쩍 떠났다. 볼탄 반도 곳곳에 흩어진 영주들을 찾아야 하니 전령 일도 만만치 않았다.
로벨은 있지도 않은 수염을 만지는 시늉 했고, 펄프 대장은 허탈하게 웃었고, 외팔이 더치를 화를 냈고, 애꾸눈 볼포스는 무덤덤하게 안대를 만졌다. 그래서 기뻐한 사람은 마녀 키르케 한 사람뿐이었다.
“전쟁이 끝났어요! 와아! 정말 기쁜 일이에요!”
로벨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된 일이야. 집에 갈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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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팅거 시티는 볼탄 반도 동쪽 바다로 흐르는 버팅거 강 하류에 위치했다. 볼탄 반도 곳곳에서 흘러오는 지류들이 최종적으로 합쳐지는 수구 지역이라 수로가 발달했고, 자연히 상업도 발전했다.
샘 포클의 광장, 수로 시장, 조선소 등등 볼거리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폭풍성이 가장 큰 볼거리였다.
로벨은 지친 말을 재촉해서 구불구불 이어진 언덕길을 올라갔다. 외팔이 더치가 자꾸 흘러내리는 방패를 꽉 조이고 투덜거렸다.
“높기는 겁나 높습니다요.”
나이 탓에 무릎 관절이 안 좋은 펄프 대장도 동의했다.
“이 성을 점령하려면 골백번 죽어 나가겠다. 새삼 다행이다 싶다.”
장미성과 비교할 때 크지는 않지만 까마득하게 높았다. 폭풍을 붙잡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이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성에 도착했다.
성문 밖에는 외팔이 더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병들이 흩어져 있고, 성 안쪽에는 수십 명의 기사들이 축배를 들고 있었다. 얼마나 술을 퍼부었는지 성 밖까지 와인 냄새가 진동했다.
로벨은 귀족들에게 결례가 되지 않도록 갑옷을 조금 손보았다. 그때, 로벨을 알아본 페르젠 백작이 두 팔 벌려 소리쳤다.
“오오! 로벨 로드릭 경! 어서 오시오! 우리 영웅이 드디어 도착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