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괴물
18화. 괴물
로벨은 버릇대로 칼자루에 왼손을 올리려다가 허공을 짚었다. 그리고 머쓱해서 팔 운동 하는 시늉을 조금 했다. 펄프 대장이 매너 없이 지적했다.
“My Lord, 티 납니다.”
“...그래?”
로벨은 헛기침을 하고 ‘현 사안이 중대하니 집중하자’라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마녀 키르케가 키득키득 웃어대서 효과가 없었다. 로벨은 아야를 불러 조용히 시키고-“물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일 정오까지 정비를 끝내. 오후에 회색산으로 출발할 거야.”
“거 참, 쉴 틈을 안 주는구먼!”
신입 울프 하나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주위에서 일제히 달려들어 신입의 입을 틀어막고 머리를 찍어 눌렀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아이고, 영주님이 아니라 공작님한테 한 말입죠. 암요. 암.”
로벨은 중무장한 덩치들에게 깔린 신입이 걱정되어 조마조마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무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회색산은 랭스터 백작령입니다. 혹시 랭스터 마을을 공격합니까?”
‘마을’이란 말에 용병들이 눈을 번쩍였다. 전쟁 중에는 적대세력의 마을 물자를 징발, 정확히는 징발을 가장한 약탈이 허용된다. 용병들에게는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고 쌓인 욕구불만을 해소할 기회였다. 로벨은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피해 말했다.
“아니야.”
아쉬운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났다. 펄프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이 멍청이들아! 따지고 보면 전부 프란시스 공작의 영지인데, 자기 땅에서 약탈을 허용할 리 없잖아?”
“쳇. 그럼 뭐하러 갑니까?”
신입 울프는 반골 기질이 강한 것이 큰 인물이 되거나 비명횡사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크로스보우 손잡이로 두드리는 것을 보면 후자 쪽이 가깝지 않을까 싶다. 로벨은 폭행현장을 못 본척하고 말했다.
“주 임무는 정찰이지만, 할 수 있다면 회색산의 랭스터 백작군과 싸워도 돼. 하지만 루카스 남작군도 패퇴한 곳이니까 위험할지 몰라. 펄프 대장, 준비 부탁해.”
펄프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뜩 궁금해서 질문했다.
“My Lord, 이제 대장도 아닌데 왜 대장이라 부르십니까?”
“응? 그러네?”
펄프 용병단은 해체되었고, 새로 탄생한 울프 용병단의 주인은 로벨이었다. 펄프 ‘대장’이란 호칭은 옳지 않았다.
로벨은 새로운 호칭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수년간 입에 붙은 게 펄프 ‘대장’이라 다른 호칭이 어색했다. 로벨이 “끄응...” 소리를 내며 고민하자 마녀 키르케가 깔끔하게 해결해주었다.
“그냥 별명이 대장인 걸로 하죠. 애꾸눈이나 외팔이처럼요.”
명쾌한 해결이라 로벨과 펄프 대장 모두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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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출발 준비를 떠넘기고 대장간을 찾으러 갔다. 해골 같은 대장장이는 인사를 건너뛰고 담금질해서 날을 세운 롱소드를 보여주었다.
“언놈이 만들었는지 몰라도 잘 빠진 놈입니다. 하지만 연식이 오래되어서 내구력이 부족합니다. 수리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번에는 새 칼을 장만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로벨은 롱소드를 수평으로 눕혀서 위아래를 돌려보았다. 곧고 날카로웠다.
“수고했어.”
로벨은 10페닝짜리 금화를 던져주었다. 어린 집사가 봤으면 무슨 칼 한 자루 가는데 금화를 내냐고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 한 자루에 목숨이 갈리는 기사와 그 목숨을 책임진 대장장이는 당연하다는 듯 금화를 주고받았다.
대장장이는 다음 작업을 위해 풀무질을 몇 번 하고 말했다.
“회색산으로 이동한다고 들었습니다.”
“응.”
“루카스 남작이 도망친 곳이지요.”
“잘 아네?”
대장장이는 부러진 창 조각과 휘어진 칼 토막을 불 속에 던지고 말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기사 나리와 용병 잡것들을 자주 보죠. 자연히 듣는 것도 많습니다.”
“심심하지 않겠어.”
“대신 걱정이 많지요.”
대장장이는 망치를 모루 위에 올려두고 로벨을 보았다.
“회색산에는 괴물이 있다고 합니다.”
“고블린? 트롤?”
“수사학적인 표현입니다. 사람인지 괴물인지 아직 모릅니다.”
로벨은 잠깐 침묵한 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어려운 말도 쓰네.”
“나이를 헛먹지 않았지요.”
대장장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봐야 해골에 그림 그려 넣은 수준이지만.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거대한 츠바이핸더(Zweihander)를 휘두르는데, 사람과 말을 가리지 않고 두 쪽 낸다고 합니다. 살아서 돌아온 루카스 남작의 용병이 말하길, 전설로 전해지는 늑대의 기사 같다고 합니다.”
“늑대의 기사...?”
로벨은 어디서 들어본 단어라 갸우뚱했다. 대장장이는 시뻘겋게 달궈진 쇠덩이를 꺼내 모루 위에 올렸다. 이제 일을 할 시간이었다.
로벨은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대장간을 나왔다. 쇠 두드리는 소리가 깔랑깔랑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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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60명의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팔콘 요새에서 남동쪽으로 10마일 떨어진 회색산으로 향했다. 에릭 공작에게 반기를 든 랭스터 백작령이었다. 서쪽에 있을 때처럼 여유를 부릴 수 없어 정찰대를 교대로 보냈다.
“바위투성이네요.”
마녀 키르케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초봄치고 쌀쌀한 날씨였다. 로벨은 안장 뒤에 둘둘 말려있는 망토를 풀어 마녀 키르케에게 주었다. 마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로벨은 수행원 ‘따위’를 챙기는 행동이 이상해 보일까 봐 변명을 덧붙였다.
“말이 무거워.”
“어? 그럼 입지 마요?”
“...입어.”
마녀 키르케는 깔깔 웃고 가죽망토를 어깨 둘렀다. 기장이 안 맞아 끝자락이 땅에 끌렸다. 그때 정찰 나간 애꾸눈 볼포스가 돌아왔다.
“정상까지 개미 한 마리 없습니다.”
“랭스터 백작군은 어디로 갔지?”
“버팅거 시티의 본대와 합류한 게 아닐까요? 조만간 대규모 회전이 있을 테니까요.”
로벨은 직감으로, 펄프 대장은 경험으로 긍정했다. 얼추 주변 정리가 끝났으니, 에릭 공작이나 류트 공자나 담판을 짓고 싶을 것이다.
“하루만 더 둘러보고 이상 없으면 스톤헤드 요새로 돌아가자.”
로벨은 채찍 손잡이로 말 엉덩이를 두드렸다. 사납지만 영리한 말은 주인의 의지대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해가 높이 뜨자 추위가 어느 정도 물러갔다.
울프 용병단은 전진 깊숙한 곳에 들어온 것치고 긴장감 없이 행동했다. 대열을 흩트리고, 잡담을 나누고, 무장을 풀고 생리현상을 해결하기도 했다. 로벨은 못마땅했지만 수일 째 참고 따라와 준 것이 고마워 제재하지 않았다.
“크르릉!”
“컹컹!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아야와 이야카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로벨은 대장장이가 말한 괴물이 나타났나 싶어 롱소드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인간 남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 그러니까 먹을 것을 두고 싸우는 중이었다.
“너희들 뭘 먹어?”
마녀 키르케가 늑대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식겁할 행동이었다. 자기 덩치만한 늑대들을 꼬집고 때려서 쫓아내는데 평범해 보일 리 없다. 아야와 이야카는 유모라고 할 수 있는 마녀 키르케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입에 문 것을 툭 내려놓았다. 주먹만한 돌덩이였다. 펄프 대장이 한숨을 쉬었다.
“배가 얼마나 고프면 돌을 씹어 먹을까.”
물론, 돌을 먹을 리 없었다. 마녀 키르케는 돌덩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미심쩍은 얼굴로 혀를 가져다 대었다. 늑대들이 씹던 거라 비위가 약한 용병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녀 키르케는 돌조각을 우물거리다가 퉤! 뱉었다. 그리고 로벨과 측근들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이거 암염이에요.”
“소금이라고?”
소금이란 말에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가 관심을 보였다. 볼탄 반도에서 금은 다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소금이었다.
“회색산에서 소금이 난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소만.”
“여기는 랭스터 백작의 사유지잖아요. 누가 들어와서 땅속에 소금이 있는지 조사했겠어요?”
“랭스터 백작은 알고 있을까?”
“알고 있지 않을까요? 모르려나? 아나? 모르겠어요.”
“이 땅을 수백 년 간 지배해온 주인이 모를 리 없소.”
로벨 일행은 랭스터 백작이 소금밭을 방치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산 정산에 이르렀을 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My Lord, 사람이 있습니다.”
펄프 대장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외팔이 더치와 풋맨들은 방패를 꺼냈고, 애꾸눈 볼포스와 크로스보우맨들은 쇠뇌의 등자를 밟고 시위를 걸었다.
펄프 대장은 전투준비가 끝나자 자신만만하게 한 걸음 나섰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정체는 밝히지 않았지만, 반응은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펄프 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얼굴만 보면 옛 신의 사제처럼 점잖은데, 몸집은 네일 공국의 바바리안처럼 우람했다. 머리에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등 뒤에 6피트 길이의 무지막지한 츠바이핸더를 매달고 있어 더욱 무시무시했다. 거인은 굵직한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창과 칼 앞에서도 태연했다.
“경고가 부족했나?”
“경고?”
로벨은 문뜩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아닌 것 같았다. 신기한 느낌이다.
‘왜 이러지?’
로벨이 당황한 사이, 거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용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용병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놈이 겁대가리가 상실했나, 웃어?”
풋맨 중 한 명이 숏소드와 라운드 실드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말릴 틈도 없었지만, 말릴 수 있어도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덩치가 크다고 하나 고작 한 명이니까. 그러나 울프 용병단의 실수였다.
꽈직-!
거추장스러울 만큼 커다란 츠바이핸더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적극적인 풋맨은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세로로 쪼개졌다. 로벨 이외에는 풋맨이 뇌와 창자를 쏟으며 좌우로 쓰러질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로벨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모두 피해!”
거인은 붉게 물든 츠바이핸더를 가로로 눕히고 울프 용병단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가까운 용병이 롱 스피어를 찔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인은 갑옷이라도 입은 듯 몸으로 창을 들이박았다. 창대가 부러지고 용병은 튕겨 나갔다.
애꾸눈 볼포스가 머리를 노리고 아바레스트를 쏘았다. 그러자 이빨로 쿼럴을 잡았다. 철판도 꿰뚫는 철제 쿼럴을 정면에서, 그것도 앞니로 받아낸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괴, 괴물이다!”
괴물은 괴물 소리가 듣기 싫은지 츠바이핸더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가로로 찢어놓았다. 로벨은 아멧을 챙길 틈도 없이 달려갔다.
“그만둬!”
자세를 낮추고, 롱소드를 아래로 늘어트리고, 거인의 간격 안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거인은 츠바이핸더의 폼멜(Pommel:손잡이 끝에 달린 무게추)로 견제했지만,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타앗!”
로벨은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여 주먹만한 폼멜을 흘려보냈다. 스쳤을 뿐인데도 볼살이 얼얼했다. 그리고 거인의 품 안에서 롱소드를 올려쳤다. 칼끝이 거인의 곰 가죽을 찢고 턱선을 따라 실금을 그었다.
“칫!”
회심의 일격이 빗나갔다. 로벨은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용병들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걸었다.
“난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다! 넌 누구냐!”
거인은 자신을 뺨을 쓸어 만졌다.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면도하다 살짝 긁힌 수준이지만, 거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거인은 츠바이핸더를 옆에 세우고 한결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시크론 섬의 리카온이다. 혹자는 늑대의 왕 리카온이라 부르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