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5화 (15/605)

15화. 공성전

15화. 공성전

저녁이 되자 요새를 가득 채운 소음이 잦아들었다. 훈련에 지친 농민병들은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적극적으로 가져다 붙였고, 쇠와 불에 시달린 대장장이들은 거리로 나와 차디찬 밤바람을 만끽했다. 그러나 모두가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성의 요리사와 하인들은 낮보다 한층 더 바빠졌다. 메인 홀을 가득 채운 수십 명의 영주와 기사들 때문이다.

“우하핫! 그래서 본인이 한마디 했지요. 자네, 불알을 잘 간수해야겠네.”

“으하하핫!”

“자작의 말솜씨가 일품이오!”

고급 비단과 금은 장식을 둘렀어도 천성은 피와 싸움을 즐기는 전사들이었다. 오늘만 사는 것처럼 술을 퍼마시고, 먼 후손들이 알면 부끄러워할 욕설과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호탕함에 숨겨놓은 불안감도 있었다.

로벨은 최고급 델 포니산 와인이 담긴 주석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딱 세웠다. 그에 맞추듯 에릭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릭 공작은 유난히 눈치가 없는 기사도 입을 다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입술을 떼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소환에 응해주어 대단히 고맙네. 그대들처럼 충직하고 용맹한 기사들이 있어 안심이 되네.”

기사들은 목례로 답했다. 에릭 공작은 한층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동생은 본디 선량하고 자상하나, 귀가 얕아 사특한 꾀임에 잘 넘어가네. 나는 어리숙한 동생을 조종해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랭스터 백작 일당을 단호하게 처단하고자 하네.”

로벨은 벌써부터 지루해했다. 에릭 공작은 ‘내가 옳고 쟤네가 틀렸다’, ‘너희들은 내 편 들어주었으니 한 몫 챙겨주겠다’ 내용을 세 바퀴 반 정도 꼬아서 전달하고, 고무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버팅거 시티에는 사트로 후작군 1,200명과 랭스터 백작군 450명이 주둔 중이네.”

“한 줌 밖에 안 되는군요!”

“당장 쓸어버립시다!

로벨은 술잔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한 줌 치고 많잖아...’ 그래도 에릭 공작군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에릭 공작은 적당히 호응한 후 페르젠 백작에게 눈짓했다. 사전에 이야기가 된 듯 페르젠 백작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진정하시오.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오.”

페르젠 백작은 세력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입지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젊은 기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버팅거 시티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병참기지인 팔콘 요새부터 점령해야 하오.”

“팔콘 요새는...”

“허드슨 자작의 성이오.”

류트 공자와 사트로 후작이 단 하루 만에 버팅거 시티를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가 팔콘 요새 덕분이었다. 팔콘 요새를 장악하고 있는 허드슨 자작은 후계자 전쟁 이전부터 류트 공자의 측근이었다. 에릭 공작이 영주들을 쭉 둘러본 후 말했다.

“버팅거 시티로 진군하기 전에 선봉군을 팔콘 요새로 보낼까 하네. 페르젠 백작의 450명이 주력이 되고, 서 볼턴과 서 로드릭이 양익을 맡아주게.”

로벨은 넋 놓고 있다가 기습 호명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수십 명의 영주와 기사들이 로벨을 돌아보았다.

“아, 영광입니다.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My Lord.”

적극적이고 적절한 대처였다. 에릭 공작 이하 모두가 만족스러워했다.

“내일 아침 동이 트는 즉시 백작군과 함께 출발하게. 무운을 빌지. 그럼 다음 사항으로 프란시스 시티에서 버팅거 시티까지 보급선을 유지할...”

에릭 공작은 몇몇 기사들을 지목해서 임무를 맡겼다. 어느 성의 수비를 강화할 것, 어느 영지에서 식량을 징발할 것 등등. 그러나 로벨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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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대장은 친근하지만 딱히 친해지고 싶지 않은 단어를 토해냈다.

“선봉군입니까?”

“응.”

“이런! 오자마자 참전이라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나도 못했어.”

로벨은 다른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이번이 첫 출전인 신출내기 용병들은 예상보다 빠른 참전에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허풍쟁이로 통하는, 그러나 참전 횟수가 펄프 대장 다음으로 많은 고참 용병 제이콥이 파비스를 쾅쾅 두드렸다.

“니들 왜 그래? 싸우려고 온 거잖아? 이틀 뒤에 싸우나 열흘 뒤에 싸우나 별 차이 없어! 그리고 잘하면 우리가 첫 승을 올릴지도 몰라. 이 전쟁에서 전설이 될 수도 있다고!”

허풍쟁이 제이콥이 껄껄 웃자 하나둘 표정을 풀었다. 종래에는 다들 농담 한마디씩 할 정도가 되었다.

“컹컹! 컹!”

아야와 이야카가 야영지 밖을 향해 짖었다. 로벨 이하 울프 용병단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서 로벨의 랜스(Lance:부대 단위)인가? 주인을 닮아서 다들 기운이 넘치는군. 이크! 자네들은 개도 데리고 다니나?”

마녀 키르케가 입술을 삐죽였다.

“늑대인데...”

새치가 희끈희끈 보이는 밤색 머리와 기품이 철철 넘치는 구티 수염(Goatee:콧수염과 턱수염이 연결된 수염). 한눈에 봐도 명검처럼 생긴 롱소드와 맞춤형으로 제작되어 빈틈없이 몸을 감싼 풀 플레이트 아머. 프란시스 공작의 제1가신을 자처하는 허버트 페르젠 백작이었다.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이라 깍듯한 예의가 필요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오?”

“출발 전에 이야기 좀 하려고 왔소. 내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지금밖에 시간이 없지 않소.”

눈치 빠른 펄프 대장이 용병단원을 일으켰다. 기사 2명을 위해 용병 16명이 말똥 쌓인 구석 자리로 쫓겨났다. 페르젠 백작은 천한 용병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경도 눈치를 챘겠지만-전혀 못 챘다- 공작께서는 이복동생인 류트 공자를 해하고 싶어 하지 않으시오.”

“류트 공자의 생각은 다른 듯 하오만.”

“우리가 충성하는 분은 류트 공자가 아니오.”

페르젠 백작은 꽉 막힌 구시대 기사의 표본이었다.

“계속 말씀하시오.”

“류트 공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공자의 충복인 랭스터 백작과 허드슨 자작을 축출해야 하오. 따라서 팔콘 요새 공략은 버팅거 시티 공략 이상으로 중요하오. 나는...”

페르젠 백작은 무엇 때문인지 말똥을 집어 던지며 싸우는 울프 용병단을 힐끔 보고 말했다.

“다소간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팔콘 요새를 점령, 허드슨 자작을 제거할 것이오. 경도 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오.”

로벨은 롱소드의 폼멜을 꽉 쥐었다. 페르젠 백작에게서 피 냄새가 물씬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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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허버트 페르젠 백작군이 스톤헤드 요새를 빠져나갔다. 아군의 출진소식을 전해들은 로벨도 전투마에 올라 울프 용병단을 인솔했다. 요새 안팎의 병사들이 몰려나와 첫 전투를 치르러가는 전우를 배웅했다.

“배웅은 무슨! 구경꺼리구먼!”

“부러워서 저러는 거야.”

“퍽이나!”

허버트 페르젠 백작군 455명, 조디 볼턴군 72명, 로벨 로드릭군 17명으로 총 병력 544명이었다. 그 대부분이 전문용병이라 상당한 전력이었다.

“서 로벨 로드릭!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울프 용병단 후미로 젊은 기사가 다가왔다. 실용성보다 멋에 중점을 둔 듯한 퀴러시어 아머(Cuirassir Armor:상반신만 감싸는 판금갑옷. 하프 아머와 달리 목, 어깨, 팔과 팔목까지 보호한다)를 입고, 역시나 실용성이 의심되는 츠바이핸더(Zweihander:대형검)를 매고 있었다. 저 큰 칼을 말 위에서 다룰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인사가 늦었소이다. 나는 볼턴 가의 장자 조디 볼턴이오.”

“서 볼턴, 만나서 반갑소.”

로벨은 말 타고 달리는 볼턴 경을 힘겹게 쫓아오는 풋맨들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충견과 멍청이라.’

충견과 멍청이가 들으면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다행히 생각을 읽는 재주가 없는 멍청이가 말했다.

“고명한 기사인 로벨 경 앞에서 부끄럽소만 본인은 전쟁이 처음이오. 경께서 좀 보살펴주시오.”

로벨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냥 멍청이가 아니었다. 엄청난 멍청이였다.

“...기사가 할 말이 아닌 듯하오.”

“하핫! 기사의 계율 중에 진실만을 말할 것이 있잖소?”

“그런 의미로 진실되란 뜻이 아니지만...”

“아무튼, 페르젠 백작에게 요청해서 함께 움직입시다. 경도 페르젠 백작의 들러리나 서는 것보다 좋지 않소?”

로벨은 고민하는 척하다가 제안을 받았다. 서 볼턴의 지휘관 자질은 의심스럽지만, 70명이나 되는 풋맨의 전력까지 의심스럽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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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했어야 했어.”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가 설치한 파비스 뒤에서 투덜거렸다. 펄프 대장이 뭐라고 소리쳤지만, 요란한 대포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쾅! 콰광!

허드슨 자작은 팔콘 요새를 사전적인 의미로 ‘요새화’해 놓았다. 성벽의 여장(女墻)을 모래포대로 높이고, 해자를 폭넓게 팠으며, 성 탑마다 대포와 발리스타를 배치했다. 그리고 페르젠 백작군을 향해 기름과 화살을 비처럼 쏟아냈다.

최초 돌격한 백인대는 5분 만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후퇴했고, 재차 투입된 제2, 제3백인대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제2백인대와 교대한 로벨과 볼턴 경의 백인대도 화살비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다.

세 자릿수의 전쟁 전문가가 최첨단 병기를 동원하여 싸우고 있었다. 조지 도트넘 자작의 농민병과 비교할 수 없었다.

쾅!

대포에서 발사된 주먹만한 돌덩이가 로벨의 오른쪽에 떨어졌다. 흙과 자갈이 튀어 올라 갑옷을 두드렸다. 틱-! 티틱-!

‘명중률이 낮아서 다행이지만...’

신병기 대포의 위력은 경이로웠다. 직격당하면 아무리 튼튼한 컴포지트 아머라도 박살 날 것이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를 한 대 쏘아붙이고 파비스 아래 웅크렸다. 야금야금 전력을 깎아내는 애꾸눈이 얄미운지 일제사격이 날아들었다. 타타탁! 탁! 타탁! 로벨과 애꾸눈이 엄폐한 파비스가 삽시간에 고슴도치가 되었다.

“서쪽 성탑에 2문, 남쪽 성탑에 1문입니다. 기왕 치고 올라갈 거면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안 돼! 피해가 클 거야!”

빗발치는 화살을 뚫고, 경사진 언덕을 뛰어올라, 15피트나 되는 성벽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 불가능한지는 볼턴 경이 몸소 보여주었다. 용맹하게 뛰쳐나갔다가 발리스타에 직격당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그 덕분에 로벨은 볼턴 경의 풋맨 부대까지 지휘 중이었다.

로벨은 도합 80명이 넘는 군대를 가졌지만 팔콘 요새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와 울프 용병단이 간간이 응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답답한 상황이 본진에까지 전해졌다.

부우우웅-! 부우- 웅-!

“영주님! 퇴각 신호입니다!”

로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장 경험이 풍부한 두 사람은 적의 공격이 잠시 뜸해지는 틈을 타 재빨리 병사를 물렸다.

로벨 로드릭군이 철수한 자리에는 볼턴 경을 비롯해 20여 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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