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4화 (14/605)

14화. 소집

14화. 소집

새해가 시작되고,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듯 봄이 찾아왔다.

처마 위의 눈이 녹아 방울방울 떨어지고, 얼어붙은 시냇물이 깨어나 졸졸 흐르기 시작했다. 겨우내 웅크리고 지내던 로드릭 영지 사람들도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조준!”

겨울의 꼬리가 떨어지지 않은 시린 바람을 타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두 명의 젊은 용병이 크로스보우의 버트(Butt:손잡이 끝부분)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스티럽스(Stirrups:쇠뇌의 등자)를 전방으로 향했다. 애꾸눈 볼포스는 준비된 사수들을 훑어보고 재차 명령했다.

“발사!”

착! 차착! 팡-!

시위가 풀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촉 없는 연습용 쿼럴이 허수아비를 향해 날아갔다. 한 발 빼고 모두 허수아비 몸통에 명중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한숨을 쉬었다.

“제이콥.”

“그니까! 난 원래 파이크맨(Pikemen:장창병)이라고!”

“지금은 크로스보우맨이다. 비싼 무기를 쥐여줬으면 제값을 해야지.”

“거, 허풍 솜씨에 반의반만 되어도 참 좋겠소.”

가벼운 웃음들이 흘러나왔다. 애꾸눈은 손을 휘젓고 재장전을 명령했다. 용병들은 쇠뇌의 등자를 밟고 시위를 끌어당겨 너트(Nut:고정장치)에 걸었다. 애꾸눈이 다시 명령했다.

“조준!”

로벨은 1층 홀에서 애꾸눈 볼포스의 목소리를 감상하다가 성안으로 들어오는 펄프 대장에게 물었다.

“어때?”

펄프 대장은 머리와 꼬리가 사라진 질문에도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느 용병단에 소속되어도 숙련 사수로 대접받을 겁니다.”

“겨울 내내 비싼 밥 먹여가며 훈련시켰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안 그러면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지!”

“그럼 집사는 원숭이오?”

“나 빼고!”

로벨은 피식- 웃었다. 울프 용병단은 펄프 대장 일행 3명과 새로 고용한 신출내기 용병 12명을 합쳐 총 15명이 되었다.

“컹! 컹!”

“아, 미안.”

로벨은 이야카에게 사과하고 숫자를 정정했다. 인간 15명과 늑대 2마리였다. 아무튼, 로벨과 어린 집사를 더해도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로벨에게는 작은 근심이고, 어린 집사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때, 후천적인 장애로 석궁병에서 배제된 외팔이 더치가 성벽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기사 나리! 기수가 옵니다! 전령입니다요!”

로벨은 망토를 두르고 성밖으로 나갔다. 크로스보우를 조준하던 용병단원들도 관심을 보였다. 잠시 뒤, 활짝 열린 성문으로 프란시스 공작가 깃발을 휘날리는 기수가 뛰어 들어왔다.

기수는 숨이 찬 말을 달래기 위해 제자리에서 두 바퀴 빙빙 돌고 땅에 내려섰다. 훈련 중인 울프 용병단을 힐끔 보고 로벨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로벨 로드릭 경입니까?”

“응.”

“에릭 프란시스 ‘공작(Duke)’님의 소집명령입니다. 닷새 안에 프란시스 시티 북동쪽 스톤헤드 요새로 오십시오.”

로벨은 공작가의 인장을 살펴보고, 봉인을 뜯어 내용을 꼼꼼하게 읽었다.

“알았어.”

“그럼 이만.”

전령은 가슴을 한번 두드리고 말 위에 훌쩍 올랐다. 갈 길이 먼 듯 잠시도 쉬지 않았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질퍽질퍽한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에릭 공작님의 소집이면...”

“결국 올 것이 왔군요.”

로벨은 편지를 접어서 품 안에 넣었다.

“그래. 전쟁이야.”

@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출진준비를 갖췄다. 로벨 로드릭의 역사적인 첫 출진이지만 환호하며 꽃잎을 뿌리는 환송식이 없었다. 우선 꽃이 필 계절이 아니었다.

“눈도 안 녹았는데, 이래 가지고 싸울 수 있을까요?”

“내일 당장 싸우는 것은 아니니까.”

“내일은 아니지만, 닷새 뒤잖아요.”

“닷새 뒤도 아니야. 달이 바뀌어야 할 거야.”

“어? 왜요? 그럼 뭐하러 벌써 소집해요?”

어린 집사가 호기심 많은 8살처럼 꼬치꼬치 캐물었다. 로벨은 눈썹을 팔자로 모으고 어찌 설명할까 고심했다. 로벨을 대신해 전쟁경험 풍부한 펄프 대장이 말했다.

“전쟁이란 것이 깃발 들고 ‘이리 모여라!’, ‘돌격 앞으로!’, ‘와아아아아!’ 하며 싸우는 게 아니오. 전략, 전술, 편제, 병참 등을 갖추고, 상대방의 암묵적인 동의를 끌어낸 다음 싸우는 것이지.”

“뭐야, 그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잖아요!”

“집사는 몰라도 난 알고 있소. 영주님이 말한 다음 달이오.”

“어떻게 알아요?”

펄프 대장은 답답한 듯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32년 경력의 노병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다. 로벨이 뒤이어 설명했다.

“기사가 소집에 응해 종군하는 기간은 최대 40일이야. 그 시간만 채우면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

“그게 뭐예요. 쳇! 기사도가 어쩌니 명예가 어쩌니 하더니만, 결국 이런 거군요? 우리 입장에서 나쁘지 않지만...”

“40일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다시 휴전에 들어갈 거야.”

“에릭 공작이 전쟁 비용을 모두 지불하고 지속할 수도 있잖습니까?”

“글쎄... 금화 몇 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로벨과 어린 집사가 잡담하는 사이 울프 용병단이 대열을 갖췄다.

울프 용병단은 용병답게 복장이 자유로웠다. 가난한 기사들이 탐을 낼법한 고급 체인 메일(Chain Mail)부터 전리품으로 취급하지도 않을 싸구려 클로스 아머(Cloth Armor)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병장기만큼은 비슷했다. 등 뒤에 파비스(Pavise:땅에 고정하는 방패. 휴대용 엄폐물에 가깝다)를 매고, 오른쪽 어깨에 크로스보우를 거치하고, 왼쪽 허리에 숏소드, 워 해머, 메이스 등의 단병기를 소지했다.

“지난번보단 좋네요.”

어린 집사가 뿌듯하게 말했다. 세 자릿수의 군대를 끌고 올 대영주에게는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군대다운 군대가 준비되어 부끄럽지는 않았다.

“집사,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해.”

로벨은 전투마에 올라 어린 집사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어린 집사 홀로 성을 지켜야 했다. 펄프 대장이나 애꾸눈 볼포스를 붙여주고 싶었지만,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라 그럴 수 없었다. 로드릭 마을 촌장이 청년들을 교대로 보내준다 하니 그것을 믿을 뿐이었다.

“제 걱정 마세요. 전 오히려 영주님이 걱정인걸요.”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붕붕 소리 나게 휘두르며 말했다.

“기사님은 제가 모실 테니까 꼬마 집사는 염려 놓으시라!”

“에휴... 저 마녀를 남겨두고 제가 따라가야 하는데... 아니지, 마녀 혼자 남겨두는 쪽이 더 불안하구나.”

“뭐라구욧?”

로벨은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울프 용병단을 출발시켰다. 아야와 이야카가 ‘출발!’ 소리에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용병들은 자신을 지켜줄 마스코트를 향해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크로스보우를 다루지 못하는 외팔이 더치가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높이 들고 앞장섰다. 그 뒤로 로벨이 전투마를 몰며 따라가고, 기사종자 역할을 수행하는 펄프 대장과 수행원을 자처하는 마녀 키르케가 양옆에 붙었다. 그리고 애꾸눈 볼포스 이하 울프 용병단 13명이 2열로 행군했다. 어린 집사가 성 언덕배기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영주님! 잘 다녀오세요! 혹시 질 거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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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녹은 봄길은 질척하고 질퍽하고 지긋했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로벨은 괜찮지만,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었다.

“으아앙. 다 젖었어요.”

마녀 키르케가 흙투성이 된 꼬뜨 자락을 들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발목과 종아리가 드러나자 순박한 신출내기 용병들이 일제히 헛기침했다. 펄프 대장이 눈살을 찌푸리고 충고했다.

“여자가 함부로 발목을 보이면 안 되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게 상식이오!”

마녀 키르케는 구시렁거리며 꼬뜨 자락을 놓았다. 뒤쪽에서 아쉬움이 담긴 탄식이 흘러나왔는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인원이 많은 탓인지, 길이 안 좋은 탓인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지난 가을보다 두 배 이상 시간이 소모되어 사흘째 아침에 간신히 스톤헤드 요새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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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헤드 요새.

프란시스 시티를 지키는 두 개의 요새 중 하나로 경사진 스톤실드 언덕 위에 짐승 머리처럼 솟아 있었다. 마녀 키르케는 풍화의 흔적이 가득한 성벽과 그 아래 호수처럼 펼쳐진 천막을 보고 감탄했다.

“와아! 사람 많다!”

볼탄 반도에서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모두 모였다. 근래 들어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

로벨은 성문을 지키는 수비대장에게 소집령이 담긴 편지를 주고 신분을 밝혔다. 수비대장은 울프 용병단의 총인원을 확인한 후 통과시켰다.

요새 안은 더욱 혼잡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흉흉한 무기를 가진 용병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농민병의 훈련소리, 대장장이의 망치소리, 나팔소리와 북소리도 흘러나왔다. 마녀 키르케가 귀를 틀어막고 소리쳤다.

“여기 너무 시끄러워요!”

“...이동한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끌고 성탑 아래 빈자리로 이동했다. 소똥인지 말똥인지 모를 것이 조금 굴러다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펄프 대장은 따라오고,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

로벨은 펄프 대장만 대동하고 요새의 중심부인 아성으로 향했다. 소집에 응한 영주들은 모두 그곳에 있을 것이다.

실내로 들어가자 흉악한 용병 대신 말쑥한 서기들이 돌아다녔다. 다만, 표정을 보면 사람 두엇 정도는 해치우고 온 듯했다.

“서 볼턴이 70명의 풋맨을 이끌고 합류했습니다.”

전령이 보고하자 서기가 바쁘게 기록했다. 종이두께를 봐서 꽤 많이 참여한 듯 했다.

“서 로드릭이 20명의 크로스보우맨과 함께 합류했습니다.”

마침 로벨의 보고도 올라왔다. 서기는 로벨 로드릭의 이름을 기록하고 깃털 펜을 잉크병에 꽂았다. 잠깐 쉬려는 듯 허리를 쭉 폈다.

“겨우 3천 명을 채웠군.”

“에릭 공작?”

로벨은 서기의 정체를 깨닫고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러고 보니 서기치고 옷차림이 화려했다.

“서 로벨, 부름에 응해줘서 고맙네.”

로벨은 허리를 숙여 기사의 예를 표했다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에릭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눈치를 보던 진짜 서기들이 달려와 자리를 대신했다.

“내일 저녁까지 기다려봐야겠지만, 더 이상 올 영주들은 없을 것 같군.”

“제가 마지막입니까?”

그 질문은 새로 온 전령이 답했다.

“지브린 남작이 방패비용을 보내왔습니다.”

방패비용(Shield money/Scutage). 병사가 아니라 돈을 보냈다. 그 남작은 십중팔구 류트 공자에게도 돈을 보냈을 것이다. 에릭 공작을 혀를 두 번 차고 로벨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연회를 가장한 작전회의가 있으니 경도 참석하도록. 기왕이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설명하는 게 좋겠지.”

로벨은 입술을 살짝 떼었다가 닫았다. 로벨 말고도 수십 명의 기사들이 찾아왔을 것이다. 신실한 기사인 로벨은 나이 어린 주군을 더 이상 힘들게 할 수 없었다.

“Yes, My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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