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용병단
13화. 용병단
장미성에 모인 영주들은 부랴부랴 병사들을 챙겨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변명을 남기고 떠난 영주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특히 버팅거 시티와 가까운 영주들은 병사에 앞서 본인 정신부터 챙겨야 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모습으로 떠났다.
에릭 공자는 영주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럴만한 정신도 없었으나, 혹 정신이 또렷해도 영주들을 잡아둘 이유와 명분이 없었다.
로벨도 마녀 키르케와 늑대 남매를 찾아 로드릭 영지로 돌아갈 채비 했다.
“어차피 지금은 싸우지 못해.”
“왜요?”
“겨울이 오고 있어. 병사를 소집하고, 편제해서 싸울 준비가 끝날 때쯤이면 혹한이 시작될 거야.”
류트 공자, 아니, 사트로 후작도 그걸 알고 선제공격을 강행했을 것이다. 반쪽짜리 충성서약을 받은 에릭 공자는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애꾸눈 볼포스가 좀 더 심각한 이야기를 꺼냈다. 로벨에게 직접 닥친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젯밤 습격한 용병들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로벨을 포함해 모두가 뒤돌아보았다. 어린 집사가 대표로 물었다.
“도트넘 자작이 고용한 거 아니에요?”
“아니오. 물증은 없으나 류트 공자의 소행이오.”
“어억? 우리 영주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우리 이외에도 다수의 기사들이 습격을 받았소. 이곳에 온 기사들은 무사하니까 왔겠으나...”
“오늘 못 온 영주님 중에는 봉변을 당한 영주님도 있겠군요! 그럼 그렇지! 이권만 챙기면 그만인 영주들이 괴소문 따위에 등 돌릴 리 없지! 작위와 봉토만 유지할 수 있으면 개나 고양이한테도 충성할 사람들인데!”
“와, 막말하는 것 좀 봐. 나도 배워야지.”
“배우지 마!”
로벨은 어린 집사의 말을 열심히 되뇌는 마녀 키르케를 만류하고 애꾸눈 볼포스에게 물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소문이 나야 하잖아?”
“도적에게 습격당한 것을 자랑하는 기사님은 없습니다. 영주님 또한 침묵하지 않으셨습니까?”
“나, 난 딱히 말할 사람이 없어서...”
친구가 없다는 뜻이라 조금 서글펐다. 애꾸눈 볼포스가 위로하듯 말했다.
“아무나 노린 것이 아닙니다. 에릭 공자에게 충성할 기사들, 그중에서도 명성이 높고 명예가 깊은 기사들만 노렸습니다. 그런 기사들이 충성서약식에 참여하지 않으면 에릭 공자의 지지가 흔들릴 테니까요. 군사적인 피해보다 정치적인 피해를 노린 행위입니다. 애당초 호위병력이 많은 대영주들은 노리지도 못하지요.”
마녀 키르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애꾸눈 아저씨도 귀족이에요?”
“내가 어디 봐서 귀족처럼 보이오?”
“귀족도 아닌데, 귀족들 생각을 잘 아시네요?”
애꾸눈 볼포스는 안대를 만지며 씁쓸히 말했다.
“한평생 귀족들 뒤치다꺼리를 했으니까.”
로벨은 자신을 말하는 건가 싶어 흠칫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어린 집사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게 사실이면 벌써 전쟁에 휘말린 거네요! 으아아! 빨리 성으로 돌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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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빠른 소문 중에서도 전쟁 소문만큼 빠른 놈은 없었다. 로벨 일행이 도착하기도 전에 버팅거 시티의 소식이 퍼졌다. 에릭 프란시스 제1공자와 류트 프란시스 제2공자의 골육상쟁,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후계자 전쟁’이라 불리고 있었다.
“영주님이 오셨다!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로벨은 전투마를 트롯(Trot:시속 약 13km) 속도로 몰아 어린 집사 일행보다 한발 먼저 로드릭 성에 도착했다. 펄프 대장이 성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말고삐를 받았다.
“My Lord, 소식을 들었습니다.”
“별일 없어?”
“영지민이 불안해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로벨은 말안장에서 내려 지난 닷새간 고생한 전투마를 다독였다.
“점심식사 같이하자. 준비되는 대로 식당으로 모여.”
“Yes, My Lord.”
로벨은 펄프 대장을 물리고 침실로 향했다. 구멍 난 망토를 풀어 침대 위에 던지고 컴포지트 아머 파츠를 하나씩 풀어냈다. 닷새 만의 무장해제였다. 가을이라 망정이지 여름이었으면 땀 냄새가 지독했을 것이다.
사슬로 된 묵직한 아밍 더블릿마저 벗어 던지고, 깨끗한 우플랑드를 뒤집어썼다. 몸이 가뿐하니 살 것 같았다. 기사의 삶이 천직이라 해도 44파운드 무장이 편하지는 않았다.
“컹! 컹컹!”
어린 집사 일행이 도착했다. 로벨은 소드 벨트를 챙겨서 어깨에 걸고 메인 홀로 나갔다.
어린 집사가 쥐 몰듯이 펄프 대장을 몰아붙이고, 외팔이 더치가 애꾸눈 볼포스를 과하게 환영하고, 아야와 이야카가 뭣도 모르고 신나서 두 사람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광경을 보니 비로소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다만, 점심식사는 조금 늦어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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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 이하 가솔들은 짐을 풀고 식당에 모였다. 애꾸눈 볼포스가 마을에서 빵과 말린 과일을 가져왔지만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지난 닷새간의 일을 간단히 이야기해주었고,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소문이 진짜로군.”
“이거 빼도 박도 못하게 됐수다.”
로벨은 물 대신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집사,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여유 자금이 얼마나 돼?”
어린 집사가 돌연 감격했다.
“세상에! 세상에! ‘여유 자금’이라니! 제 생전에 그런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 흠흠! 춘경지 개간에 총 6,880페닝이 사용되었고, 내년 봄까지 지출될 성 관리비, 말먹이 비용 등등을 빼고 나면... 최대 5,000페닝 정도에요.”
외팔이 더치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이 낡은 성에 관리비가 뭐 그리 많이 들어가오?”
“당신들 급료가 얼마라고 생각해요?”
“아하! 우리 때문이구나!”
로벨은 맥주잔을 좌우로 흔들다가 탁! 소리 나게 놓았다.
“봄이 오면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될 거야. 우린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
“그치만, 5,000페닝으로는 용병단을 고용하기도 빠듯한데요...”
“영지민을 징집해서 훈련시키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건 안 돼. 봄 농사를 망치면 가을이 오기 전에 굶어 죽을 거야. 우리가 300명을 먹여 살릴 수 없잖아.”
“그럼 어떻게 준비해요...”
로벨은 프란시스 시티에서 만난 보커 남작의 사설 용병단을 떠올렸다. 로벨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용병단이 아니야. 소속 없는 용병을 한 명씩 찾아가 직접 고용해. 그러니까, 펄프 용병단의 규모를 키우는 거야.”
“저희 용병단을 말입니까?”
“그래. 실력과 장비를 보고 계약금을 조율할 수 있을 거야. 크로스보우맨(Crossbowmen)이나 아바레스터(Arbalester) 위주로 고용해. 한 스무 명 정도가 좋겠어.”
“가, 가능할까요?”
로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로벨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근래 들어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다. 어린 집사를 포함한 몇몇 측근이 덜컥했다.
“용병밥 30년 차잖아? 못 할 것이 있어?”
펄프 대장은 뒤통수를 퍽퍽 긁었다.
“정확히 32년 차입니다. 휴우... 일단 시도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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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예견한대로, 전쟁의 먹구름보다 겨울의 눈구름이 먼저 찾아왔다. 누가 계절을 물으면 단호하게 ‘겨울’이라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두 팔 걷고 거들어서 첫눈이 오기 전에 춘경지 개간을 끝냈다. 로벨은 한층 넓어진 논밭을 둘러보고 촌장을 불렀다.
“첫 작물은 콩이 좋습니다. 보리를 심기 전에 콩을 심으면 땅이 비옥해집니다.”
“언제 파종하지?”
“올해는 조금 늦었고, 땅이 녹는 초봄에 심을까 합니다. 작년에 휴경지로 돌린 땅도 비옥한 땅이라 내년은 풍족하게 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지분배에 불만은 없어?”
“땅을 내려주신 것만도 평생 감사할 일인데, 어디 감히 불만이 나오겠습니까?”
“그래도 모르는 거야. 싸움이 나지 않게 신경 써줘.”
“그리하겠습니다.”
겨울이 되자 가끔씩 찾아오던 행상인의 발길도 뚝 끊겼다. 어린 집사의 강압에 못 이겨 알현장을 열었지만, 사냥꾼 찰드가 덫에 걸린 사슴을 진상한 것 말고 아무 일도 없었다. 피와 고기를 맛본 아야와 이야카만 신났다.
그리고 마침내 첫눈이 내렸다.
사붓사붓 내린 눈이 하룻밤 지나자 발목을 젖힐 만큼 쌓였다. 마을 꼬마들은 추위를 모르고 눈싸움을 벌였고, 마을 강아지들도 덩달아 신나서 왈왈거리며 뛰어다녔다. 정신적으로 꼬마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아야와 이야카도 성내 연병장을 뒹굴며 회색 털을 하얗게 물들였다.
어린 집사가 얼음을 깨고 물을 길다가 손이 시려 발을 동동 굴렀다. 그 행동이 재미있는지 아야가 껑충껑충 뛰며 달려왔다. 어린 집사는 얼음조각을 집어 던지자 늑대 남매는 더욱 좋아했다.
“애도 아니고 뭐가 그리 신나?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너희들 애 맞아.”
로벨은 가죽망토를 여미고 입술을 모아 입김을 한 줄기 뿜었다. 포근하게 쌓여가는 눈과 달리 걱정이 많았다. 겨울나는 것도 힘든데, 전쟁까지 준비해야 했다.
“이 눈이 녹으면 핏물이 되어 흐르겠지.”
“갑자기 왜 무서운 말을 하고 그러세요.”
로벨의 시름이 깊어질 때, 노스폴드 시티로 떠난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가 용병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고참용병도 있고, 갓 성인이 된 신출내기 용병도 있었다. 어린 집사가 까치발을 들고 속닥였다.
“그래도 용케 구해왔네요?”
펄프 대장은 말구유통에 앉아 눈에 젖은 신발을 털었다.
“생각보다 쉬웠소. 로벨 로드릭 경의 용병단이라고 하니까 넙죽넙죽 찾아오더이다. 쉰 명 넘게 모았는데, 계약금을 듣고 몽땅 도망가서 저 친구들만 남았소.”
로벨은 롱소드를 비켜차고 용병들을 맞이했다. 어린 집사는 고용주와 용병들 사이의 흔한 알력다툼, 기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지난 전쟁 때 도트넘 자작군으로 싸운 용병이 한 명 있었다.
“저 사람이 로벨 로드릭 경이야.”
“뭐야, 계집처럼 생겼는데?”
“쉿! 쉿! 미쳤냐? 내가 한 얘기 벌써 잊었어?”
전 도트넘 자작군 소속 고참용병은 그 유명한 일기당천 전설을 떠벌였다. 연기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창질 한 번에 다섯 명씩 꿰뚫고, 칼질 한 번에 세 명씩 목이 날아가는 광경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의문이었다. 그 결과 신참내기 용병들은 옛 신을 배알한 것처럼 경외에 찬 눈길을 보냈다. 펄프 대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숫자가 제법 되니 단명(團名)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펄프 용병단이잖아?”
“그 이름은 어리숙한 시골 영주를 꼬드기려고 대충 지은... 크흠! 아무튼 새 이름이 필요합니다. 저 친구들의 대장은 제가 아니라 영주님입니다.”
예상치 못하게 문학적 소양이 시험대에 올랐다. 로벨은 그럴싸한 이름을 만들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장난꾸러기들을 발견했다.
“늑대.”
“늑대 말입니까?”
펄프 대장은 로벨의 시선을 쫓아 눈밭을 뒹구는 늑대 남매를 바라보았다.
“아주 훌륭한 마스코트군요.”
그렇게 로벨 로드릭의 울프 용병단이 탄생했다.
퇴물 용병과 외팔이 용병과 애꾸눈 용병과 허풍쟁이 용병과 신출내기 용병들로 구성된 전설의 용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