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2화 (12/605)

12화. 충성서약

12화. 충성서약

프란시스 시티.

샘 포클의 12기사 중 한 명인 아몬드 프란시스 공작이 20년에 걸쳐 건설한 도시였다. 내해(內海)와 인접해서 물류가 활발하고, 동방원정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며 문화가 발전했다. 그 결과 볼탄 반도에서 가장 번화하고,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꼽혔다.

“우와!”

마녀 키르케가 입을 딱 벌렸다. 산골짜기 오두막에서 소도시 노스폴드만 보아왔으니, 대도시의 풍경이 장관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 참! 촌티 좀 내지 마요.”

“우와!”

“그런 거 하지 말라고요!”

“우와!”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죠?”

“앗! 들켰다!”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로벨도 처음 프란시스 시티에 왔을 때 비슷했다.

길바닥은 돌로 포장되어 있고, 길가에는 3층, 4층, 심지어 5층짜리 고층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키가 작고 까칠한 잉그비아 왕국인, 살결이 까무잡잡한 아이란드 왕국인, 머리와 수염이 붉은 네일 공국인 등등. 어느 곳을 둘러보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 새로운 공작님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저기.”

로벨은 크고 화려한 도시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건물을 가리켰다. 언덕길을 따라 화강암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그 꼭짓점마다 7층 높이 원형 탑이 세워져 있었다. 언덕이 치마를 두른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언덕 꼭대기에는 35피트 성벽이 여염집 담장으로 보일 만큼 웅장한 아성(Keep)이 솟아 있었다.

“프란시스 공작의 성. 혹은 장미의 성이라 불리기도 해. 성을 둘러싼 장미정원이 아주 아름다워.”

“장미정원이요? 그걸 볼 수 있나요?”

“지금은 못 봐. 가을이잖아.”

마녀 키르케는 ‘그럼 여름에 또 와요!’ 등의 한가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전투마를 몰아 언덕길을 올랐다.

시내가 혼잡한 것은 단순히 번화가여서가 아니었다. 얼마쯤 이동하자 하프 아머(Half Armor:가슴과 허벅지를 감싼 경갑옷)를 입고 번뜩이는 글레이브(Glaive:창날이 넓어 베기에 용이한 창)를 어깨에 거치한 무장집단이 나타났다. 무장이 통일된 것을 보아 귀족 산하의 사설 용병단이었다.

“저 깃발은... 보커 남작(Baron)이군.”

어린 집사는 열 명이 넘는 남작의 수행원을 보고 한숨 쉬었다. 고작(?) 남작이 저 정도라면, 오늘 참석할 자리가 얼마나 휘황찬란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집사의 성급한 판단이었다.

보커 남작은 말 위에서 거들먹거리다가 로벨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서 로벨! 서 로벨 로드릭이 아니오! 역시 경도 이쪽으로 왔구려!”

“오랜만이오, 남작.”

“으하하! 정말 반갑소!”

보커 남작은 고향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싹싹하게 행동했다. 로벨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지난 도트넘 자작과의 전쟁이 몇 배로 부풀려져서 퍼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경의 무용을 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거 참, 믿기지가 않을 일이오. 아, 장미성으로 가는 길이오?”

“그렇소.”

“그럼 동행해도 되겠소? 하핫! 경과 함께하니 참으로 영광이오.”

보커 남작은 로벨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았다. 로벨 로드릭과 친분을 과시했다. 어깨가 3인치 정도 올라가고, 턱이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아졌다. 일부 사람들은 호가호위 비슷한 단어들을 떠올렸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경도 참 대단하오. 이런 시국에 고작 몸종 몇 명만 데리고 오다니.”

고작 몸종들은 불쾌했지만, 고용주 체면 때문에 끼어들지 못했다.

“무슨 뜻이오?”

“아! 오해하지 마시오. 누가 뭐라고 해도 에릭 공자가 정당한 계승자 아니겠소? 다만, 사특한 자들이 사특한 말로 에릭 공자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으니, 혹여나 무슨 사단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중이오.”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로벨이 두 눈을 깜박이자 보커 남작이 도리어 놀랐다.

“설마,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오?”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오.”

보커 남작은 로벨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나직이 속삭였다.

“에릭 프란시스 제1공자가 사실은, 이거 입에 담기가 참 민망하오만, 사실은 시골 잡부와 공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공작가의 핏줄이 아니란 주장이 있소.”

“아...”

어지간해서 놀라지 않는 로벨이 진심으로 놀랐다. 만약 사실이라면, 로벨의 정체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류트 프란시스 제2공자가 앞장서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소. 랭스터 백작, 허드슨 자작 등이 동조하고 있으니, 오늘 서약식에 참석하지 않는 귀족들은 류트 공자 쪽에 가담했다 봐야 할 것이오. 참으로 참담한 일이오.”

로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릎 좀 꿇고, 손 한번 잡고, 앵무새 흉내나 내다가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예정과 다르게 돌아갔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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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성은 볼탄 반도에서 가장 큰 성이었다. 로드릭 성 정도는 가로로 눕혀서 다섯 개나 여섯 개쯤 수납할 수 있을 듯했다.

그 거대한 성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용, 사자, 독수리, 곰, 사슴 등등의 깃발을 든 병사들이 여기저기 무리 지어 소음을 자아내고, 수십, 수백 마리의 말들이 전날 먹은 여물을 뒤로 내보내며 악취를 뿜어냈다.

장미성의 고용인들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들로 귀족과 병사들을 수발했다. 충성서약이 무사히 끝나도 저 사람들의 일터는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로벨은 펄럭이는 깃발들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몇 명 안 왔어.”

“뭐라고요? 저렇게 많은데요?”

“병사야 많지만, 병사를 끌고 온 사람이 많지 않아.”

어린 집사는 까치발을 들고 가문을 확인했다. 로벨의 말대로 프란시스 공작가 봉신 중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에게 말고삐를 넘기고 어린 집사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고기와 와인이 산더미처럼 차려진 메인 홀에 지체 높은 귀족들이 친분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잠깐이지만 식탁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 체면만 아니면 몽땅 싸들고 가고 싶었다.

“로벨 경? 로벨 경이 도착했소!”

“본관이 말했잖소. 로벨 경은 명예로운 기사요. 간악한 랭스터 백작을 따라가거나 천박한 기회주의자 노릇을 할 리 없지.”

로벨과 어린 집사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런 사단이 일어난 것을 알았으면 안 왔을 것이다.

로벨은 안면이 있는-주로 토너먼트 시합에서 박살 낸- 봉신들과 인사 나누고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홀이 광장처럼 넓으니 기둥도 숲 속의 나무처럼 많았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에릭 공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에릭 윌리엄 폰 프란시스 제1공자 드십니다.”

점심 먹은 것이 꺼져갈 늦은 오후, 오늘의 주인공이자 장미성의 호스트인 에릭 공자가 등장했다. 정통성을 강조하는 의미심장한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그쪽으로 무관심한 로벨과 어린 집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충성서약을 위해 찾아온 봉신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얼마 전 20살이 된 젊은 공자는 봉신들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생각보다 숫자가 적은 탓이었다. 기둥 사이로 에릭 공자와 나이 많은 집사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들이 전부인가?”

“아직 도착 못 한 귀족도 있으나, 중요한 분들은 모두 참석했습니다. 페르젠 백작, 루카스 남작, 그리고 그랜드 챔피언인 로드릭 경도 공자님께 충성을...”

“어린애 구슬리는 말투하지 말게. 이놈들이, 기어이 반기를 들겠다는 말이지?”

에릭 공자가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화기애애한 서약식이 되지는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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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와 권력이 100%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개 작위가 높고 많을수록 땅도 넓고 군사력도 막강했다. 그런 이유로 충성서약은 작위가 높은 자들 우선으로 진행되었다. 명성은 높으나, 가진 것이라곤 작은 장원 하나뿐인 세습 기사의 차례는 저녁시간이 훌쩍 넘어서 찾아왔다.

“서 로벨 로드릭.”

로벨은 앞서 수십 명이 한 것처럼 홀 중앙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에릭 공자가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로벨은 두 손을 맞잡고 차례로 입을 맞췄다. 수십 명의 입술이 걸쳐간 곳이라 조금 찝찝했다.

“그대는 프란시스 가문의 정당한 계승자인 에릭 윌리엄 폰 프란시스 공작을 주군으로 받들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까?”

로벨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옛 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대에게 주어진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그대의 주군에게 누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까?”

“영주의 자격으로 맹세합니다.”

“그대의 주군이 그대의 검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찾아와 함께 싸울 것을 맹세합니까?”

“기사의 명예로 맹세합니다.”

옛 신의 성물에 손을 얹고 맹세를 반복했다. 어렵게 돌려 말하지만, 로벨 로드릭을 로드릭 영지의 정당한 주인으로 인정하니 세금 성실히 내고 전쟁 나면 따라와서 거들라는 내용이었다. 이상의 맹세를 주거니 받거니 한 후 옛 신의 사제에게 축복을 받았다.

로벨의 충성서약이 끝나고 몇 명 더 진행되었다. 어린 집사는 로벨보다 격(?)이 떨어지는 영주들이 있다는 것에 뿌듯해 했다.

성 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간신히 연회가 시작되었다.

“배고파 돌아갈 뻔했네요.”

예법에 따르면 성의 주인이나 장남, 그러니까 에릭 공자가 직접 고기를 썰어서 나눠주어야 하지만, 시간이 늦은 관계로 시종들이 미리 썰어놓은 고기와 술을 내왔다. 로벨과 어린 집사도 그쪽이 좋았다.

로벨은 최소한의 체통만 지키는 선에서 귀한 소고기와 해산물을 와구와구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문뜩 밖에서 떨고 있을 식구들이 생각났다.

“성 밖에...”

“왜요? 고기 모자라요?”

“아니, 아야랑 이야카 잘 있을까?”

어린 집사가 걱정 말라고 닭다리를 쥐여주었다.

“난 또 뭐라고요. 병사들을 굶기진 않을 테니 뭐라도 나눠주고 있겠죠.”

“그래도...”

로벨이 밖을 걱정하자, 밖에서 정말 소동이 일어났다. 병사들이 웅성거리고, 종자와 몸종이 슬그머니 성안으로 들어와 자신들 주인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귀띔을 받은 귀족들은 예외 없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어린 집사는 닭다리와 닭날개를 양손에 쥐고 번갈아 뜯으며 말했다.

“뭔 일이래요? 어라? 저 남작님은 밥 먹다 말고 어디 가지?”

은밀한 소동이 에릭 공자에게도 전해졌다. 억지로 웃으며 연회 분위기를 유지하던 에릭 공자가 사색이 되어서 일어났다.

로벨은 닭다리를 내려놓고 테이블 아래에 슬그머니 기름을 닦았다.

“심상치 않아.”

“누가 또 죽은 걸까요?”

마침 의문을 풀어줄 사람이 나타났다. 성안으로 들어오는 기사 종자 사이에 섞여서 애꾸눈 볼포스가 다가왔다.

“My Lord,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왜? 전쟁이라도 일어났어?”

“예. 전쟁입니다. 류트 프란시스 제2공자가 사트로 후작과 손을 잡고 버팅거 시티를 점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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