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습격
11화. 습격
로벨 일행은 삭막한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포클랜드와 프란시스 시티를 연결하는 볼탄 반도 동부대로에 들어섰다. 대로(大路)라 해도 포장된 관도(官道)가 아니라 조금 널찍한 흙길이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공작님이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가셔서 다행이에요.”
어린 집사가 물을 떠 오며 중얼거렸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나는 추운 날씨지만 다행히 물이 얼지는 않았다
로벨 일행은 이른 저녁이지만 야영준비에 들어갔다. 해가 짧아져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깜깜한 밤에 저녁식사를 해야 했다.
“이틀 안에만 도착하면 되니까.”
로벨은 옛날에 상단이 쓰던 지도를 살폈다. 군사지도만큼 지형과 도로가 상세하진 않지만, 눈대중으로 보아도 내일 오후면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어린 집사가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에릭 공자님이면, 옛날에 토너먼트 시합에서 보았죠?”
“응.”
“그럼 잘 아시겠네요? 우승 연회에도 참석했잖아요?”
“나쁜 사람은 아닌데... 잠깐 본 거라 몰라.”
애꾸눈 볼포스가 잡목을 한 아름 주워와서 쌓았다. 하지만 젖은 나무에 촉매제가 없어서 부싯돌로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가 어울리지 않게 거들먹거리며 다가왔다.
“에헴! 에헴! 비켜 보세요.”
그리고 지팡이를 흔들며 주문을 외웠다. 애꾸눈 볼포스는 마법에 대한 경외, 혹은 두려움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태양의 노래, 용암의 춤, 용의 잠꼬대, 살라만다의 한숨.”
화르륵-!
모닥불이 삽시간에 불타버렸다. 애꾸눈은 충분히 떨어졌음에도 두어 걸음 더 물러났고, 로벨과 어린 집사는 넋을 놓고 불꽃쇼를 구경했다. 화약을 묻어두고 불을 붙인 수준이었다. 작은 장작은 그대로 숯덩이가 되었고, 큰 장작도 초라하게 쪼그라졌다.
애꾸눈은 착잡한 얼굴로 마녀와 모닥불을 번갈아 보고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장작을 새로 구해 와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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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성에서 가져온 호밀빵을 뜨거운 물에 불려서 마시다시피 해치웠다. 맛은 별로지만 속은 든든했다.
아무거나 잘 먹는 인간들과 달리 아야와 이야카는 음식 타박이 심했다. 빵을 찢어줘도 무시하고, 콩을 쑤어줘도 외면했다. 누가 늑대 아니랄까봐 고기반찬만 찾았다.
“너희들은 늑대잖아? 자급자족 좀 해봐. 산에 가서 토끼라도 잡아오라고!”
어린 집사가 아야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렸지만 머리가 굵어진 늑대 아가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젖을 뗀 뒤로 밥 먹이는 것이 곤욕이었다. 로벨은 모닥불 근처에 담요를 깔며 말했다.
“그냥 놔둬. 배고프면 먹을 거야.”
“아주 상전 나섰어요. 고기 잡아다 바치라고 으름장이잖아요.”
“그만 자자. 불침번은 키르케, 볼포스, 나, 집사 순서야. 이의 있으면 말해.”
마녀 키르케가 호호 웃었다.
“기사님답게 여자와 아이를 배려하는군요! 처음과 마지막이 가장 좋은 거죠?”
로벨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담요 위에 누웠다. 마녀 키르케는 갑옷 때문에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로벨은 쇳덩이 잠옷이 익숙한 듯 금방 잠들었다.
“와아... 대단해요.”
“괜히 영주님이겠어요?”
어린 집사가 로벨 대신 콧대를 세웠다. 애꾸눈 볼포스는 대체 뭘 자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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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르릉... 크릉...”
이야카가 저음으로 울음을 토했다. 직업 특성상 잠귀가 밝은 어린 집사는 참지 못하고 깨어났다.
“왜 그래? 배고파? 그러기에 아까 줄 때 먹지 그랬어.”
“크르릉...”
“아, 진짜! 야박한 영주님한테 가서 졸라. 힘없는 집사를 괴롭히지 말고.”
야박한 영주님이 속삭였다.
“쉿.”
“어? 어엇! 영주님?”
로벨이 어린 집사 머리맡에 와있었다. 어린 집사는 얼굴을 붉혔다. 로벨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속삭였다.
“나 없을 때 험담을 많이 하는구나?”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어린 집사가 화급히 변명했다. 그러나 상황이 안 좋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머리를 꾹 누르고 롱소드를 뽑았다. 스르릉- 살을 에이는 소리에 솜털이 곤두섰다.
“M, My Lord?”
“쉿. 조용.”
어린 집사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지난날을 빠르게 재생했다. 너무 많아서 꼭 짚어 말할 수 없었다.
‘으앙! 잘못했어요! 앞으로 옷 더럽혔다고 타박하지 않을게요! 비싼 정향유 쓴다고 화내지도 않을게요! 갑옷을 침 발라서 닦지 않을게요옷!’
속으로 생각해서 다행이었다.
로벨과 늑대 남매가 노려보는 것은 어린 집사가 아니었다. 모닥불의 범위에서 벗어난 저 어둠 속이었다.
“누가 있어.”
“누, 누, 누구요? 짐승인가요?”
어린 집사의 질문에 어둠 속 상대가 행동으로 답했다. 뾰족한 금속조각이 불빛을 반사해서 반짝였다. 이어서 밤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피잉-!
로벨은 망토를 끌어올려 자신과 집사를 감쌌다. 방한용을 제작된 망토지만 가죽이 질기고 두꺼워서 어느 정도 방호력이 있었다. 화살은 가죽망토에 1차로 힘을 뺏기고, 사슬로 강화된 아밍 더블릿에 2차로 힘을 뺏겨 피해를 주지 못했다. 로벨은 망토자락을 걷고 용맹하게 뛰쳐나갔다.
“습격이야! 전투준비!”
하지만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돌격하는 것은 권장할만한 전술이 아니었다. 두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깜깜했다. 로벨은 왼쪽은 갑옷을 믿고, 오른쪽으로 롱소드를 휘저었다.
챙!
무작정 내찔렀는데 얻어걸렸다. 칼자루로 찌릿찌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누구냐!”
로벨은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고 장작 패듯이 휘둘렀다. 어둠 속 상대가 크게 물러났다. 몸놀림이 좋은 것이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 그때, 등 뒤에서 거센 충격이 전해졌다. 깡-!
짐작하건대, 도끼나 망치로 내리친 모양이다. 백 플레이트와 아밍 더블릿이 충격을 흡수했는데도 잠깐 동안 숨이 막혔다.
‘한두 명이 아니야.’
로벨은 몸을 비틀며 뒤로 롱소드를 휘둘렀다. 두 번째 습격자도 얼른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롱소드를 휘두른 원심력을 그대로 타고, 왼손으로 왼쪽 허리에 워 해머를 뽑아 휘둘렀다.
“훨윈드(Whirlwind)!”
네일 공국의 야성미 넘치는 바바리안이 종종 선보이는 회전공격이었다. 워 해머의 뾰족한 송곳이 어느 부위인지 모르지만 살이 찢고 뼈를 깎아냈다.
“크아악!”
얼굴에 뜨거운 피가 닿았다. 출혈량을 보아 치명상이 분명했다.
로벨이 등을 보이자 첫 번째 습격자인지, 또 다른 세 번째 습격자인지 알 수 없는 공격이 날아왔다.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믿고 머리만 방어했다.
“컹! 컹컹!”
위기의 순간, 로벨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아야와 이야카가 습격자를 덮쳤다. 습격자 하나가 땅으로 푹 꺼졌다. 늑대 남매는 무기를 든 오른손과 균형을 유지하는 왼쪽 발목을 꽉 물고 사냥본능에 따라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살점이 뜯겨져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개다! 개가 있다! 살려줘!”
“...늑대야.”
로벨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넷, 아니, 다섯인가?’
무장만 봐도 도적이 아니었다. 설령 도적질을 겸업해도 본업은 용병 내지 청부업자일 것이다. 워 해머에 맞아 쓰러진 남자와 아야와 이야카에게 물어뜯기는 남자 외에도 크로스보우를 가진 남자, 큼직한 펄션(Falchion:폭이 넓은 곡도)을 어깨에 걸친 남자, 짤막한 숏 스피어를 꼬나 쥔 남자가 더 있었다. 그리고 크로스보우를 가진 남자가 사라졌다.
팡-!
우렁찬 시위 소리와 함께 철제 쿼럴이 날아와 크로스보우의 주인을 뒤로 넘어트렸다. 애꾸눈 볼포스의 솜씨였다.
“제길! 쳐라!”
“로벨 로드릭만 죽이면 돼!”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만, 기습이 실패하고 수적 우위마저 무산되었는데 무작정 덤비는 자태가 한심했다. 로벨 로드릭의 명성을 알고 있다면 더욱 그러했다.
로벨은 숏 스피어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남자에게 워 해머를 집어 던졌다. 숏 스피어 남자는 창술에 일가견이 있는지 창대로 가뿐히 튕겨냈다. 하지만 막지 말고 피했어야 했다. 창날의 방향이 돌아가자 안 그래도 발이 빠른 로벨을 저지할 수단이 없었다. 로벨은 두 걸음 만에 간격을 좁혀 목젖에 롱소드를 꽂아 주었다.
“꾸르륵...”
기도가 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로벨은 칼날을 비틀어 쥐어뜯듯이 롱소드를 뽑았다. 목이 절반 정도 잘려져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어두운 밤이라 망정이지, 한낮이었으면 위장에 넣은 음식물을 재확인했을지도 모르겠다.
로벨은 쓰러지는 남자에게서 숏 스피어를 낚아채 마지막 남은 펄션 남자에게 다가갔다. 펄션 남자는 달려들던 자세에서 그대로 굳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아야와 이야카가 마침내 쓰러트린 작자의 목숨을 끊었다. 피에 젖은 주둥이로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어두운 달밤에 피로 물든 기사와 늑대가 어찌 보일지는 당사자만 알 수 있었다.
“늑대... 늑대의 기사...”
로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정신이 나갔다고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어깨를 뒤로 당기고, 다리와 허리와 팔의 힘을 전부 사용해서 창을 집어 던졌다. 숏 스피어는 시원스럽게 뻗어나가 홀로 남은 습격자를 먼저 간 친구들 곁으로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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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끝났지만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 로벨과 애꾸눈 볼포스는 습격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옷가지와 소지품을 뒤적였다.
어린 집사는 얼굴이 뜯겨나간 시체, 눈알에 쿼럴이 박힌 시체, 머리가 덜렁거리는 시체 등을 만지며 진저리쳤다.
“한 명 쯤 살려두지 그랬어요.”
“생각 못 했어. 미안.”
로벨도 시체를 만지는 것이 좋지 않았다. 억지로 조사를 마쳤지만 소득이 없었다. 무장수준과 다채로운 흉터들로 살인의 프로란 것만 짐작했다.
“대체 뭐하는 놈들일까요?”
“영주님의 이름을 거론했습니다. 청부업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조지 도트넘 자작이?”
“전쟁비용과 몸값 지불로 이만한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없을 텐데...”
“강철성의 기둥 몇 개 뽑았나보죠. 아니면 영지민을 쥐어짰거나.”
로벨 일행은 조지 도트넘 자작 소행이라고 잠정 결론 내렸다. 그자 말고는 원한을 가진 귀족도 없었다.
“그래도 전원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요 말썽쟁이들도 한몫 단단히 했고요. 이제야 밥값 좀 하네요.”
어린 집사가 긴 혓바닥으로 김을 내뿜는 늑대 남매를 쓰다듬어 주었다. 로벨은 ‘모두’에서 어쩐지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
‘어린 집사, 애꾸눈 볼포스, 아야와 이야카... 한 명이 비는데?’
그때 마녀 키르케가 야영지 구석진 곳에서 부스스 소리 내며 일어났다.
“으하아아암... 어라? 왜 다들 깨어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