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0화 (10/605)

10화. 여행

10화. 여행

‘양식 없는 손님’의 정체는 어린 종자였다. 몸에 딱 맞는 더블릿(Doublet)과 가죽부츠, 허리에 찬 화려한 대거, 그리고 근육은 있지만 앳된 얼굴로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로벨은 소드 벨트를 조금 끌어내리고,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살짝 걸쳤다. 기사 종자가 움찔해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난 로벨 로드릭이야.”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뵈었지요.”

로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기사 종자와 친분을 쌓을 만큼 사교적이지 않았다.

“그날 전장에서 뵈었습니다. 전 도트넘 자작을 수행하는 머를 브릭이라고 합니다.”

로벨은 기억을 더듬다가 “기억났어.” 라고 거짓말했다. 사실 종자 얼굴을 기억할 만큼 여유 있지 않았다.

머를 브릭은 기사 중에 기사 로벨 로드릭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떨며 기뻐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가 하품으로 감동을 깨트렸다.

“하아아암... 그거 말하려고 왔어요?”

머를 브릭은 기사와 종자의 대화에 끼어드는 시녀-이상한 모자를 쓰긴 했지만-가 어이없어서 노려보았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로벨이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머를 브릭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보통 사이가 아니라 오해했다. 연인, 정부, 혹은 그보다 가까운...

“그래. 무슨 일이야?”

머를 브릭은 정신 차리고 밤을 꼬박 새우며 달려온 목적을 밝혔다.

“웨일 도트넘 백작의 죽음 때문입니다.”

“내가 저지른 게 아니라고...”

“로벨 경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그의 아들인 조지 도트넘 자작의 소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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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콧등을 한번 찡그렸을 뿐 놀라지 않았다. 웨일 백작의 부고를 들을 때부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트로 후작은?”

조지 도트넘 자작이 죄를 지으면, 그의 주군인 사트로 후작이 처벌해야 마땅했다.

“그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왜?”

“강철성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백작 가문과 로드릭 가문의 차이점이었다. 도트넘 가문은 사트로 가문에게 충성하지만, 사트로 후작에게 봉토를 수여 받은 봉신(封臣)은 아니었다. 샘 포클 시대 이전부터 도트넘 백작령은 도트넘 일족의 땅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로벨은 기사 신분에 차마 욕할 수 없어서 뒷말을 삼켰다.

“낑... 끼잉...”

아야와 이야카가 잠이 깨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머를 브릭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늑대에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칼을 뽑지 않은 것은 로벨을 존중해서인지, 용기가 없어서인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로벨은 어리광부리는 새끼 늑대들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하필 나지?”

머를 브릭은 혹시 늑대처럼 생긴 개가 아닐까 의심하며 대답했다.

“이번 일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또 후작파와 연관이 없으니...”

“도트넘 자작을 고발해라?”

“그래 주셨으면 합니다.”

로벨은 쇼오스(Chausses:일종의 레깅스)에 침을 묻히는 아야와 소매를 물어뜯는 이야카 때문에 끄응- 소리를 내었다. 어린 탓인지 장난기가 심했다.

“넌 자작을 모시는 종자(Squire)야. 이러면 기사 서임이 어려울 텐데?”

“기사가 되지 못해도 명예를 지키고 싶습니다.”

로벨은 잠깐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가신들과 이야기해볼게. 강철성으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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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의 첫 번째 가신인 어린 집사가 격렬히 반대했다.

“안 돼요!”

“왜?”

“귀족을 고발하다니요? 그것도 최악의 죄목으로? 이건 두고두고 가문의 적을 만드는 일이에요!”

마녀 키르케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이미 적인 것 같은데?”

“아무튼 안돼요!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어서 좋을 게 없어요. 저번 같은 일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요!”

“기사님한테 누명을 씌웠잖아요? 그럼 남의 일이 아니잖아요?”

“말 그대로 누명이죠! 증거가 없으니까 무시하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귀족원에 고발하는 것은 달라요. 까닥하면 사트로 후작가와 전쟁이에요!”

로벨은 펄프 대장을 보았다. 펄프 대장은 퇴물 용병 흉내내며 시선을 회피했다. 외팔이 더치는 뭐가 문제인지 파악조차 못 한 듯하고, 애꾸눈 볼포스는 용병답게 수동적으로 일괄했다.

“저희는 영주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찬성 1표, 반대 1표, 기권 2표, 그리고 무효 1표였다. 로벨은 멍한 얼굴로 콧구멍을 후비는 외팔이 더치를 새삼 부럽게 쳐다본 후 말했다.

“좀 더 생각해보자.”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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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침훈련을 마치고 주방에서 빌려온 따뜻한 물로 씻었다. 귀족이라면 응당 침실에서 씻어야 하나, 로벨의 경우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지하창고에 숨어서 씻었다. 어린 집사는 주인이 씻는 동안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창고 앞을 지켰다.

“영주님? 아직 멀었어요?”

“재촉하지 마.”

어린 집사는 물 끼얹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을 벨벨 꼬았다. 어릴 때부터 해온 일인데 최근 들어서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연륜 있는 사람에게 물으면 어린 집사가 어른 집사로 성장하고 있다고 웃을 것이다. 하지만 남녀문제에 깜깜한 로벨과 어린 집사는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로벨은 미지근해진 물을 쏟아 붓고 더듬더듬 수건을 찾았다.

로벨은 키에 비해 마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부실하지는 않았다. 검술로 단련된 어깨와 등은 조각처럼 섬세하고, 마술(馬術)로 단련된 허벅지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길고 곧은 팔다리와 가늘지만 탄탄한 복근이 야만의 땅을 누비는 표범처럼 날렵하게 느껴졌다.

“저기, 영주님? 영주님?”

“기다리라니까.”

로벨은 머리를 거칠게 털어내고 우플랑드를 뒤집어 입었다. 여자일 때 입던 옷보다 남자의 옷이 자연스러웠다.

“그게 아니고, 위에서 영주님을 찾아요.”

“누가?”

“마녀도 찾고, 펄프 대장도 찾고, 아야랑 이야카도 찾는 거 같은데요?”

“...마지막 둘은 그냥 신나서 짖는 거야.”

로벨은 창고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리고, 이어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사고가 생긴 모양이다.

“예감이 안 좋아. 가보자.”

“앗! 바지 입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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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성의 모든 사용인이 로벨을 찾아다녔다. 감정표현을 잘 안하는 애꾸눈 볼포스와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는 외팔이 더치까지 조급하게 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로벨은 오만상을 쓰고 돌아다니는 외팔이 더치를 따라가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고 나발이고, 이놈의 기사 나리가 어디 숨었는지... 헉! 기사 나리?”

“이놈의 기사 나리?”

“아니, 그게 아니고, 대장! 대장! 영주님을 찾았수다!”

로벨은 외팔이 더치에게 관심을 거뒀지만, 어린 집사는 손가락 두 개로 자신의 눈과 외팔이 더치를 번갈아 가리켰다. 두고 보겠다는 뜻이었다. 외팔이 더치는 자신의 반밖에 안 되는 어린 집사에게 쩔쩔매었다.

펄프 대장이 바쁜 걸음으로 다가와 외팔이 더치를 구원했다.

“My Lord, 한참을 찾았습니다.”

“무슨 일이야?”

펄프 대장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피고 ?그래 봐야 볼 사람도 없지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프란시스 시티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이틀 전, 프란시스 공작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로벨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린 집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탄식했다.

“요즘 왜 이리 죽는 사람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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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프란시스 공작. 빈말로도 훌륭하다 말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국왕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프란시스 공작의 죽음은 포비아 왕국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에릭 프란시스 제1공자가 봉신들을 소집했습니다.”

로벨을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사망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공작의 봉신이면... 기사님도 포함되죠?”

“응.”

“왜 부르는 걸까요? 혹시 장례식에 일손이 모자란가?”

로벨과 어린 집사는 신기한 눈으로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어떤 때는 참 영리한데, 어떤 때는 한참 모자라 보였다.

“정말 몰라서 물어요? 충성서약 때문이잖아요.”

“아? 무릎 꿇고 앉으면 칼로 어깨 두드리는 그거요?”

“그건 기사 서임식이고... 에잇! 시끄럽고 짐 싸는 거나 도와줘요!”

어린 집사가 할 일이 많아졌다. 로드릭 성에서 프란시스 시티까지 약 이틀 거리였다. 먹을 것, 입을 것, 안전을 보장할 것 등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른 영주들한테 꿀리지 않을 것도요.”

춘경지 개간이 한참이라 많은 인원을 뺄 수 없었다.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를 남겨두고, 어린 집사, 애꾸눈 볼포스, 그리고 충성서약을 보고 싶다고 떼쓰는 마녀 키르케까지 세 사람이 동행하기로 했다.

“으... 꼴랑 셋이라니... 그것도 여자와 애꾸눈이라니... 너무 초라한데...”

“여자와 애꾸눈과 코흘리개 꼬마죠.”

마녀 키르케가 하나 더 추가해주었다. 어린 집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성이다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래! 아야랑 이야카도 데려가죠!”

“왜?”

“저래 봬도 늑대잖아요? 늑대를 거느린 영주님은 아마도 우리 영주님뿐일걸요?”

마녀 키르케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나이도 어린 것이 허영심만 가득해서...”

“허영이 아니라 위엄이요! 근데 요즘 은근히 막말하네요?”

“어머나! 대놓고 했는데! 은근히라니! 너무 좋아요!”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저 말썽쟁이들도 데려가요. 도적이나 몬스터를 쫓아내는데도 도움이 될 거에요.”

로벨은 먹는 것과 장난치는 것 말고 아무 생각도 없는 늑대들이 과연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어린 집사는 막무가내였다.

“시절이 수상하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쓸만한 건 몽땅 챙겨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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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밍 더블릿 위에 브레스트 플레이트(Breast plate:판금 흉갑)와 왼쪽 폴드런을 붙이고 두꺼운 가죽 망토를 둘렀다. 상시 차고 다니는 롱소드와 대거 외에도 워 해머(War hammer)를 추가로 챙겼다. 어지간한 도적떼는 단독으로 때려잡을 무장이었다.

어린 집사도 허리에 숏소드와 망고슈(Main gauche:왼손용 단검)를 찼다. 하지만 칼싸움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집어 던지고 로벨이나 애꾸눈 볼포스 뒤에 숨을 작정이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와 등짐을 양쪽 어깨에 쥐고 나왔다. 힘이 좋아서 세 사람 몫을 짊어지고도 거뜬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로벨은 먼 길을 가기 위해 콩과 귀리를 배불리 먹인 전투마에 올랐다.

“짧으면 닷새, 길어도 여드레 안에 올 거야. 그동안 영지를 부탁해.”

“걱정 마십시오, My Lord.”

“영주님 없다고 놀지 마세요! 영지민 괴롭히지도 말고요! 술통 숫자 확인해 뒀으니까 몰래 빼먹을 생각도 하지 마요!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말고...”

어린 집사가 열성적으로 잔소리했지만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벨은 혀를 차고 말했다.

“출발.”

로벨이 고삐를 당기자 아야와 이야카가 말 다리 사이로 먼저 뛰쳐나갔다. 그렇게 네 명과 세 마리로 이루어진 로벨 로드릭 일행이 프란시스 시티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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