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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9화 (9/605)

9화. 소문

9화. 소문

풀 플레이트 아머는 걸어 다니는 철옹성이었다. 전력으로 찌른 랜스에도 뚫리지 않았다. 하지만 갑옷이 멀쩡하다고 착용자까지 멀쩡하진 않았다. 조지 도트넘 자작은 안장에서 튕겨 나가 한 마리의 새처럼 자유롭게 비행했다.

“끄아아악!”

새처럼 아름답게 지저귀지는 못했다.

로벨은 그랜드 챔피언답게 차칭 충격을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어디까지 기사 기준에서 부드럽다는 뜻이다. 로벨은 인상을 찌푸리고 땅바닥에 너부러진 조지 도트넘 자작에게 다가갔다.

“으아아... 으아...”

랜스에 맞아 늑골이 대여섯 개 부러지고, 낙마하면서 허리와 골반이 상했다. 기절하지 않은 것을 칭찬해야 할 부상이었다. 로벨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점잖게 항복을 권하고 싶었지만, 주위 병사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로벨은 창끝이 뭉개진 랜스를 아래로 내려 조지 도트넘 자작 목을 겨누었다. 조지 도트넘 자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금만 생각하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 테지만 고통과 혼란 탓에 침착하지 못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시각적인 효과가 대단했다. 검은 연기가 흩어지면서 말 위에서 고고하게 창을 겨눈 기사와 땅바닥에 쓰러져 창끝에 놓인 기사가 드러났다. 장님이 아닌 이상 누가 승자인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로벨은 바이저를 위로 올리고 말했다.

“자작, 이번이 두 번째야. 학습능력이 없어?”

“다, 닥쳐라! 끄으윽...! 아버지의 원수를...”

“난 웨일 도트넘 백작을 해치지 않았어. 해칠 이유가 없잖아.”

펄프 대장이 전 병력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왔다. 군인보다 피난민에 가까운 행색이나 사기만큼은 하늘을 찔렀다. 로벨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을 쓰러트리는 광경을 보았으니 피가 끓어오를 만했다.

조지 도트넘 자작의 용병들은 조금씩 물러났다. 충성심하고 가장 거리가 먼 것이 용병이었다. 고용주가 사로잡힌 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다. 농민병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지휘관이 없는 농민병은 농민이지 병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덤빌 용기도 없었다.

로벨은 뭉툭한 랜스로 조지 도트넘 자작의 고짓 플레이트(Gorget plate:목 보호대)를 꾹 눌러 바닥에 붙이고 아군과 적군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나 로벨 로드릭이 조지 도트넘 자작을 쓰러트렸다! 패잔병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리하면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다!”

로벨의 위세가 대단하니 ‘패잔병’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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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피아 대륙의 장구한 역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전쟁이었다. 양군 합쳐서 전사자 2명, 부상자 1명 전부였다.

로벨은 조지 도트넘 자작을 지하감옥에 가두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어린 집사는 마을로 내려가는 영지민을 보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태풍이 지나간 기분이에요.”

정확히는 15분 만에 지나간 태풍이었다.

로벨은 적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갑옷을 벗고 평복차림으로 지하감옥을 찾아갔다. 외팔이 더치가 하품을 쩍쩍하면서 옥사 앞을 지키고 있었다.

“자작은?”

“좀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쳤는데, 이제 좀 조용합니다요.”

로벨은 차디찬 맨바닥에 뻗어있는 조지 도트넘 자작을 힐끔 보고 외팔이 더치를 내보냈다.

“밥 먹고 와.”

외팔이 더치는 사양하지 않고 뛰쳐나갔다. 로벨은 의자를 끌어와 옥사 앞에 앉았다. 그리고 외팔이가 냉큼 나간 이유를 알았다. 땅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와 발가락이 시렸다. 몸이 성치 않은 조지 도트넘 자작이 조금 염려되었다.

“짚이라도 깔아줄 걸. 미안.”

“나를 어쩔 거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일전에도 말했듯 귀족을 죽이는 것은 명예롭지 못해.”

“몸값이 필요하오?”

“응.”

로벨은 거짓 없이 말했다. 조지 도트넘 자작은 침을 튀기면 웃었다. 하지만 갈비뼈가 아파서 오래 웃지 않았다.

“기사의 명예인지 나발인지 집어치우시오. 내가 경고하는데,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요.”

상대방을 씹어 뱉을 듯한 어조였다. 로벨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맥없이 말했다.

“열심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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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도트넘 자작의 어머니이자, 강철성의 안주인인 제시 도트넘 백작부인이 몸값협상을 타진해왔다. 로벨 역시 몸이 안 좋은 자작을 오래 가둬두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수용했다. 조지 도트넘 자작은 1만 5천 페닝으로 자유를 되찾았다.

어린 집사는 황금 자루를 끌어안고 까무러칠 듯 좋아했다.

“이히히힛! 조금만 약삭빠르면 3만 페닝 정도 받았을 텐데요.”

펄프 대장은 입맛을 다지고 말했다.

“그래도 상도덕이란 게 있잖소. 아, 기사도덕? 귀족도덕? 이런 말이 있나?”

로벨은 용병들에게 1천 페닝씩 포상하고, 사냥꾼 찰드 일가족에게 5백 페닝을 하사하고, 마녀 키르케에게...

“전 괜찮아요.”

“응?”

“싸운 것은 기사님인데 제가 왜 받아요?”

“그래도 공을 세웠는데.”

“정 그러면 일거리 좀 줄여주세요. 이 후진 성은 청소할 곳이 너무 많아요!”

“후진 성...”

여하튼 목돈이 들어온 것은 좋은 일이었다. 토너먼트 상금과 징수한 세금을 합치자 2만 2천 페닝의 거금이 되었다. 어린 집사는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 돈이면 춘경지를 늘릴 수 있어요! 아니다. 언제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용병단을 고용할까요? 으음... 유지비 때문에 안 되려나.”

전쟁으로 얻은 것은 재화만이 아니었다. 로벨 로드릭의 명성이 포비아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소문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몸집이 커졌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 창 한 자루로 천 명의 용병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 소문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고, 로벨과 어린 집사는 당장 할 일을 찾아 몰두했다.

“그러니까, 춘경지를 확대해서 농민들에게 나눠준다고요?”

“그래.”

“그 비용을 영주님이 전부 부담하고요?”

“그래.”

어린 집사는 시건방지게 식탁을 꽝! 두드렸다.

“아니, 왜요? 왜 그런 짓을 해요?”

로벨은 자꾸 반복되는 질문에 조금 짜증이 났다. 로벨이 얼굴을 찌푸리자 어린 집사는 너무 심했나 싶어 찔끔했다.

“난 농사 지을 줄 몰라.”

“영주님이 왜 농사를 지어요? 영주님의 직영지(直營地)로 두고 소작농을 부리면 되잖아요?”

“겨울이야.”

그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축약되어 있었다. 북부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가을에 수확한 작물로는 겨울을 나기도 빠듯했다. 자연히 봄이 올 때쯤이면 굶주리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춘경지에서 수확하는 보리, 귀리, 콩 등이었다.

로벨은 다독이듯 말했다.

“어차피 수확물의 절반은 우리꺼잖아?”

“절반보다 전부가 좋으니까 그렇죠.”

어린 집사는 결국 굴복했다. 영주님이 영지민을 보살피겠다는데 일개 집사가 막을 수 없었다. 로벨은 손가락을 튕기고 말했다.

“힘 좋은 농마(農馬)를 몇 마리 사자. 아, 쟁기도 필요하겠구나. 촌장과 이야기해서 필요한 농기구를 알아봐.”

“아앗! 내 돈이 이렇게 다 나가는구나!”

“...내 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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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영지 남동쪽 들판이 떠들썩해졌다.

소인지 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우람한 농마 두 마리가 쟁기를 끌고, 젊은 아낙들이 힘을 합쳐 나무뿌리와 잔돌을 골라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땀이 흘렀다.

“좋아! 당겨!”

“으샤! 으샤!”

로벨은 밧줄을 손에 감고 힘껏 당겼다. 검술과 마술(馬術)로 단련된 잔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런 로벨에게 지지 않기 위해 스무 명의 장정이 젖 먹던 힘까지 쏟아냈다. 수많은 인력이 모이자 200년 수령의 느티나무도 버티지 못했다. 펄프 대장이 삽으로 뿌리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조금 더! 조금 더!”

“우와악! 넘어간다!”

로벨은 밧줄이 헐거워지자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로벨만큼 재빠르지 못한 마을 청년들은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몸을 던졌다. 그 위로 춘경지 확장에 최종보스가 뿌리를 들고 쓰러졌다.

“우와! 해냈다!”

“지긋지긋한 놈! 땔감이나 되어라!”

나무를 뿌리째 뽑아낸 장정들이 얼싸안고 환호했다. 로벨도 땀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그러나 웃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My Lord,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어린 집사가 망토를 둘러주며 속삭였다. 옷이 젖어 속살이 비칠까 염려했다. 로벨은 얌전히 망토를 두르고 삽과 곡괭이로 무장한 펄프 대장 일행을 불렀다.

“오늘은 이쯤하고 쉬어. 술을 가져와서 나눠줘.”

“영주님께서 술을 하사하신다!”

“영주님 만세! 영주님 만세!”

로벨은 손을 흔들어주고 자리를 떴다. 개간 작업을 둘러보기 위해 내려왔다가 얼떨결에 나무를 뽑는데 하루를 보냈다. 그런 로벨 덕분에 마침 지나가던 펄프 대장 일행도 궂은 땀을 흘려야 했다. 어린 집사가 “영주님이 땀 흘리는데 구경만 할 거예요? 급료 깎이고 싶어요?” 등등 악을 써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으로 올라오자 이야카와 아야가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왔다. 두 마리 모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서 마을 개들은 눈도 못 마주칠 정도가 되었다.

“컹! 컹컹!”

“으르르...”

어린 집사가 새삼 신기해서 물었다.

“개도 아닌데 왜 개처럼 짖을까요?”

“교육환경 때문이죠.”

마녀 키르케가 앞치마를 입고 나오며 말했다. 고깔모자와 꼬트에 앞치마를 두르니 이상했다.

“어? 개들하고 친하게 지내나요?”

“아니요. 그 대신 집사하고 친하게 지내죠. 기사님, 저녁준비 끝났어요.”

“응.”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미소 짓고 식당으로 향했다. 어린 집사는 떨떠름해 하다가 뒤늦게 자신을 개 취급했음을 깨달았다.

“저 마귀할멈이 진짜! 도망가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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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창틀에 하얀 서리가 앉아있었다. 새벽녘에 어린 집사가 다녀간 듯 벽난로가 잠들지 않고 타닥- 타닥- 숨을 쉬었다.

로벨은 침대에서 일어나 사자 갈기처럼 곤두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신경 쓰지 않는 동안 꽤 자라서 뒷목을 덮었다.

‘자를까?’

어린 집사를 부를까하다가 곤히 자는 듯해서 그만두었다. 거치대에서 롱소드를 꺼내 침대맡에 앉았다. 아침식사 시간까지 여유가 있으니 무기와 갑옷을 정비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예정이 살짝 틀어졌다.

“기사님, 기사님, 일어나셨어요?”

가늘고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 로드릭 성에서 로벨을 제외한 여자는 마녀 키르케와 늑대 아야 뿐이었다. 아야는 사람 말을 할 줄 모르니 당연히 마녀 키르케였다. 로벨은 귀찮은 일이 생겼음을 예감하고 한숨을 쉬었다.

“일어났어.”

“와아! 잘 됐어요. 지금 손님이 왔으니까 나와 보세요.”

“이 시간에?”

손님 자체가 놀라운 일인데, 이른 시간이라 더욱 신기했다. 어린 집사가 옆에 있었으면 ‘거 참 양식 없는 손님이네요. 쫓아낼까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로벨은 차마 그럴 수 없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잠깐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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