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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8화 (8/605)

8화. 전쟁

8화. 전쟁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와 사냥꾼 찰드 삼부자를 궁병(Archer)으로 분류해서 휘하의 랜스(Lance:기사를 중심으로 한 부대 단위)로 넣고,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를 소대장(Vintenar:이십인장) 삼아 보병(Foot man)의 지휘를 맡겼다. 총 3개 소대(Platoon)로 구성된 백인대(Centenar)였다.

“편제는 그럴 듯 한데...”

검술, 창술은 거론할 것도 없고, 기본적인 밀집과 산개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로벨은 앞뒤 자르고 질문했다.

“몇 명이면 될까?”

애꾸눈 볼포스가 성마르게 대답했다.

“전문 용병이면 열 명으로 충분합니다.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를 제압하는데 네 명, 오합지졸이 된 병사들을 쫓아내는데 다섯 명, 그리고 고용주에게 보고하러 갈 전령 한 명입니다.”

로벨은 침묵으로 동의했다. 용병을 동원할 것도 없이 로벨이 완전무장하면 혼자서도 이길 듯 했다. 종자 임무를 수행하는 어린 집사가 물었다.

“프란시스 공작님은 뭐라고 해요?”

“연락이 없어.”

“그 공작님 성품을 생각하면... 도움받기 힘들겠죠?”

“......”

샘 포클의 12기사 후예이자, 인구 1만 5천 명의 프란시스 시티 주인이며, 볼탄 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포비아 왕국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러나 세간의 평은 썩 좋지 않았다. 게으르고, 탐욕적이며, 여자관계가 특히 안 좋았다.

“그럼 믿을 것은 저 병사들뿐이네요.”

그때,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싸우고 싶지 않아 보이는데요?”

“나도 싸우기 싫어.”

“그럼 안 싸우면 되잖아요?”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거부권이 없기 때문이야. 어느 한쪽이 원하면, 다른 쪽은 거절할 수 없어.”

로벨은 설명을 마치고 한심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마녀 키르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럼 조지 도트넘 자작이란 기사만 못 싸우게 하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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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종이 위에 잉크를 덕지덕지 묻혀가며 설명했다.

“우리 성을 중심으로 그릴게요.”

언덕 위 로드릭 성, 언덕 아래 로드릭 마을, 추수가 끝난 추경지와 텅 빈 휴경지, 북쪽 숲과 동쪽으로 흐르는 실개천 등등. 마구잡이로 그리는데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제 이런 걸 조사한 거요?”

펄프 대장이 신기해서 물었다. 마녀 키르케는 콧대를 한번 세우고 말했다.

“성벽이 없어서 어디로든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에요.”

마녀 키르케는 동쪽 들판을 가리켰다. 어린 집사가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어째서요?”

“북쪽은 숲이 막고, 남쪽은 성이 막고, 의기양양한 사람들이 빙 돌아서 오지 않을 테니까요.”

“다시 말하면, 로드릭 마을을 가장 먼저 공격할 것이다?”

“그것도 엄청 빨리요!”

가을 추수가 한참인 시기였다. 로드릭 영지처럼 작고 가난한 곳에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할 영주는 없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리고 야심만만한 주변 영주들이 딴 생각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자 할 것이다. 로벨이 조지 도트넘 자작이라도 그럴 것이다.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등도 새삼스럽게 보았다.

‘이 아가씨 보기와 다른데?’

“사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사냥감이 언제 어디로 올지 알고 있으면, 참 쉬운 사냥이잖아요?”

“그 사냥감이 그리즐리 같은 놈이라 문제지.”

“도망치는 초식동물보다 쫓아오는 맹수가 더 쉬울 때도 있어요.”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유심히 보았다. 대단한 듯도 하고, 모자란 듯도 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말해봐.”

마녀 키르케는 배시시- 웃었다.

“수확하고 남은 밀짚이 많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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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조지 도트넘 자작의 군대가 도착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전력을 보고했다. 전문용병 50명과 징집병 300명이었다. 숫자만 봐도 3배 이상이었다. 무기와 훈련수준을 생각하면 5배, 아니, 10배 이상이었다. 로벨은 롱소드 폼멜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시작됐어.”

외팔이 더치가 흥분해서 방패를 두드렸다.

“올 테면 오라합쇼! 몽땅 담가줄 테니까!”

“진정해. 계획대로 움직인다.”

로벨은 여자와 아이들을 성 안으로 피신시키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성문 앞에 집결시켰다. 그래 봐야 100명이 채 안 되는 숫자였다.

“겁먹지 마. 아무도 죽지 않아. 적은 성벽을 넘지 못해.”

로벨은 공포와 불안으로 얼룩진 병사들을 다독였다. 마녀 키르케가 감동해서 속삭였다.

“기사님은 침착하네요? 경험 차이인가요?”

“나도 처음이야.”

로벨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혼자서 싸우는 토너먼트하고 달랐다. 긴장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런 로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집사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우리 영주님은 최강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얼굴 좀 펴요! 용기를 가지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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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토트넘 자작은 ‘아버지의 복수’를 부르짖은 것치고 여유로웠다. 프란시스 시티의 장인이 제작한 풀 플레이트 아머(Full plate armor)와 오베리아 산 거마(巨馬)가 자못 위압적이었다. 조지 토트넘 자작을 수행하는 종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My Lord, 로드릭 성입니다.”

조지 토트넘 자작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목재성을 구경했다. 수백 년 묵은 구닥다리 성이었다. 저런 낡은 성에서 영주라고 거들먹거리는 로벨 로드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거지새끼가...’

조지 토트넘 자작은 혀를 차고 좀 더 가까운 곳을 살폈다. 선두가 막 진입한 추경지에 짚더미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조지 토트넘 자작은 행군하는 며칠 사이 까칠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었다.

“추수를 못 한 건가?”

조지 토트넘 자작에게 고용된 용병대장이 사납게 말했다.

“겁먹고 성으로 도망친 모양입니다. 잘 됐습니다. 영지를 점령하면 고스란히 자작님의 것이 아닙니까? 아참, 백작님이지요?”

조지 토트넘 자작은 ‘백작’이란 호칭에 껄껄 웃었다.

“아직은 자작일세. 허나, 이 전쟁이 끝날 때쯤이면 백작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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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토트넘 군이 성 밖에 보이자 로벨은 핵심전력과 함께 성벽을 올랐다. 사냥꾼 찰드 삼부자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 여, 여, 영주님! 코, 코, 코앞까지 왔습니다!”

사냥꾼 찰드가 금단증상을 앓는 환자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로벨은 침착하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반면,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긴장감 없이 티격태격했다.

“작전대로 안 되면 어쩌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이 작전을 세운 게 키르케 씨잖아요!”

“에이,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로벨은 두 사람을 무시하고 애꾸눈 볼포스에게 명령했다.

“시작해.”

애꾸눈 볼포스는 아바레스트 대신 숏보우를 잡았다. 사냥꾼 찰드가 준비한 화살을 시위에 걸고 화살촉을 화톳불에 가져갔다. 기름에 젖은 헝겊이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외팔이 더치가 눈썹 위에 손 그늘을 만들고 ‘전장’을 살폈다.

“200야드가 넘는데? 할 수 있어?”

“바람이 좋으니까.”

그 말에 호응하듯 등 뒤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추위를 몰고 오는 북서풍이 오늘만큼은 큰 도움이 되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시위를 당기고 몸을 젖혔다. 좀 더, 그리고 좀 더 높이 겨냥했다. 외팔이 더치가 태양을 쏠 거냐고 따지려는 찰나, 화살이 자유를 노래했다.

핑-!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갔다. 푸른 가을 하늘을 완만하게 가로지른 후 들판을 장식한 짚더미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잠깐의 고요함이 흘렀다. 실패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될 때쯤 짚더미가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펄프 대장이 쾌재를 불렀다.

“좋아! 마녀의 계획대로 움직인다!”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요! 그리고 ‘젖은 밀짚 작전’이고요!”

마녀 키르케가 거세게 항의했으나 듣는 사람이 없었다.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는 소대지휘를 위해 흩어졌고, 애꾸눈 볼포스와 사냥꾼들은 불화살을 쉴 새 없이 쏘았다. 로벨은 헬멧을 쓰고 바이저를 내렸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눈구멍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키르케, 성 안으로 들어가.”

“왜요?”

“보기 흉한 것을 보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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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밀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자 연기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숨이 막힐 듯한 검은 연기였다. 가까이 가기도 싫은 연기가 북서풍을 타고 조지 토트넘 군을 덮쳤다.

“자작님! 함정입니다!”

“어디서 수작을!”

허나 연기가 전부가 아니었다. 눈이 가려진 상황에서 귀까지 어지러워졌다.

부우웅- 웅-!

꽹! 꽹꽹! 꽹! 꽹!

연기 너머에서 나팔소리, 북소리,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적군이 온다! 적군이 온다!”

“전군 밀집대형을 갖춰라! 자리를 지켜라!”

조지 도트넘 자작은 흥분한 전투마를 진정시키며 명령했다. 그러나 자작의 첫 번째 실수였다. 차라리 돌진을 명령했어야 했다. 실전경험 풍부한 용병대장이 가장 먼저 실수를 알아챘다.

“자작님! 이상합니다!”

“뭐가!”

“소리가... 소리가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꽹! 꽹! 꽹!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검은 연기가 뒤덮은 전장은 그림자 하나 없이 요란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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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은 성벽 위에서 징과 북을 두드렸다. 징이 없으면 냄비와 그릇을 두드렸고, 그것도 없으면 발을 굴리며 목청껏 소리 질렀다. 아무튼 소음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조지 토트넘 자작은 속았다는 수치심에 이를 갈았다.

“저 무지렁이 놈들이! 전진! 전진하라!”

“시야가 안 좋습니다! 일단 물러나서...”

“연기 좀 마신다고 안 죽어! 전진해라!”

용병대장과 소대장은 전진을 명령했다. 조지 토트넘 자작의 두 번째 실수였다. 시야가 좁은 탓에 대열이 엉망이었다.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벌어지고, 소대와 소대가 뒤죽박죽으로 얽혔다. 하지만 조지 토트넘 자작은 걱정하지 않았다. 적은 성벽 위에 있고,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강의 기사라 자부하는 로벨 로드릭을 우습게 보았다.

선두 병사가 연기 밖으로 빠져 나왔을 때였다. 한층 가까워진 목재성이 보이나 싶었는데, 늠름한 네 다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

선두 병사의 초라한 유언이었다. 로벨은 거세게 말을 몰아 병사의 머리를 짓밟고 지나갔다.

“이럇! 이랴앗!”

로벨은 전투마를 전력질주 시켰다. 눈 감고도 달릴 수 있는 로드릭 영지의 땅이었다. 연기 따위에 방해받지 않았다. 로벨을 알아본 용병들이 소리쳤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이다!”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이다!”

로벨은 단독으로 기마돌격을 강행했다. 외로운 돌격이지만 초라하지 않았다. 사람과 말과 창이 하나가 되어 땅을 갈랐다. 창끝이 날카롭게 빛났다. 토너먼트에서 사용하는 속 빈 버드나세(Bourdonasse)가 아니다. 적을 꿰뚫기 위해 고안된 진짜 랜스(Lance)였다.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안개처럼 낮게 깔린 연기가 잠시 틈을 내었다. 옛 신의 배려일까, 그 작은 틈새로 조지 도트넘 자작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로벨은 초 단위로 세기도 어려운 찰나에 한가로이 생각했다.

‘투구 좀 써라.’

랜스가 갑옷을 때렸다.

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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