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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7화 (7/605)

7화. 추수제

7화. 추수제

어린 집사의 지레짐작과 달리, 명예, 복수, 결투 따위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내 아들이 무례를 범했다고 들었소. 못난 자식을 대신해서 사과하오.”

로벨은 ‘못난 자식인 것을 아니까 그나마 다행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기사답게 대답했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오.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하오.”

로벨이 사과를 받자 웨일 백작은 나이답지 않게 좋아했다. 어린 집사 역시 피를 보지 않아도 되어 안도했다. 그리고 어리기에 할 수 있는 진솔함을 발휘했다.

“설마 백작님이 사과하러 오실 줄은 몰랐어요.”

웨일 백작은 어른스럽게 웃었다.

“잘못을 했으면 응당 사과해야지. 그 상대가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경이라면 더욱 그리해야 하고. 본인은 일찍부터 로벨 경의 무용을 존경해 왔네.”

명망 높은 백작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는 극찬이었다. 로벨은 평소와 달리 겸손을 보여야 했다.

“나이 어린 세습 기사(Knight/Ritter)에게 과분한 칭찬이오.”

“전장에서 나이와 신분은 아무 의미가 없소. 오직 실력과 옛 신의 가호만이 있을 뿐이지. 인간의 몸으로 신의 뜻은 가늠할 수 없으니, 실력을 찬양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웨일 백작은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었다. 로벨은 그런 노(老) 기사가 싫지 않았다. 어린 집사에게 명령했다.

“키르케와 볼포스를 불러서 술과 고기를 준비해.”

“예? 아! 예!”

어린 집사는 성 밖으로 나가 몇 안 되는 고용인을 닦달했다. 천만 다행히 헨리 상단이 진상한 고급 와인과 추수제 준비로 잡아놓은 멧돼지 고기가 있었다. 웨일 백작은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불쑥 찾아온 퇴물 기사를 환영해주니 참으로 고맙소.”

“별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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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호스트(Host) 역할이 처음이지만, 그동안 토너먼트 연회에서 보아온 것이 있어 그럭저럭 흉내 낼 수 있었다. 잘 익은 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웨일 백작에 보내고, 와인잔을 높이 들었다.

“명예를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웨일 백작은 와인을 연거푸 비우고 몹시 즐거워했다.

겨울 토너먼트에서 다시 붙자고 큰소리치고, 혼기 찬 막내딸이 있으니 사위하라고 조르고, 강철성에 놀러오라고 권유하고, 프란시스 공작을 욕하다가 술이 깨서 머쓱하게 얼버무렸다.

“허허... 오늘 참 즐거웠네. 본인이 말을 너무 많이 했군.”

로벨은 부정하지 않았다. 웨일 백작은 시종 역할을 수행하는 펄프 대장에게 말을 준비시켰다. 어린 집사가 공손하게 권했다

“밤이 늦었어요. 성 안에서 주무시고...”

어린 집사는 입 발린 말을 하다가 백작을 모실만한 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꼬리를 흘렸다. 다행히 웨일 백작은 자고 갈 생각이 없었다.

“영주가 성을 비우면 안 되지. 자네처럼 영리한 집사가 있다면 또 모르지만! 으하핫!”

“더치와 볼포스를 불러와.”

로벨은 용병들을 호위로 붙였지만 웨일 백작은 한사코 거절했다.

“어둠을 두려워하면 어찌 기사라고 하겠소. 로벨 경은 걱정 말고 쉬시오.”

로벨은 어깨를 으쓱였다. 로드릭 영지에는 위험한 짐승이 없으니 괜찮을 듯했다.

“진작 경과 친구가 될 것을 그랬소.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못쓸 아들에게 감사해야겠군. 그럼 또 봅시다.”

웨일 백작은 손을 흔들고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로벨은 노(老) 기사가 사라지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더 크고 더 요란한 한숨들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와 로벨의 한숨이 묻혔다.

“정말 정신없는 저녁이네요.”

“귀족 하나 대접하는 것도 허리가 휘는데, 나중에 떼로 몰려오면 어떻게 감당하죠?”

“키르케 씨는 한 게 없잖아요!”

“아닌데요? 술 따라줬는데요? 저 흉악하게 생긴 용병 아저씨들은 못하는 건데요?”

“흉악? 흉악이라고!”

“제길! 화가 나지만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로벨은 늦은 밤에도 기운이 넘치는 고용인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만하고 가서 쉬어.”

“안 돼요! 뒷정리하고 자야죠! 지금 주방은 난리 났어요!”

어린 집사는 돼지떼를 몰듯이 고용인을 몰아붙였다. 로벨은 진저리치고 성 안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도트넘 가문과 마찰이 끝난 듯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한치 앞을 모르는 법이다. 웨일 백작의 방문은 더욱 큰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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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마을의 추수제가 시작되었다. 1년 중 가장 행복하고, 가장 풍요롭고, 가장 정신이 없는 날이었다.

로드릭 마을 한가운데 커다란 캠프파이어가 세워지고, 애꾸눈 볼포스가 사냥한 사슴, 토끼, 멧돼지와 어린 집사가 깎고 깎아서 최소금액으로 사들은 오리, 닭, 돼지가 노릇노릇 익어갔다.

로드릭 마을을 대표하는 늙은 촌장이 느릿느릿 추수감사문을 낭독했다.

“에... 한 해의 결실을 앞에 두고 기쁨을 만끽하자니, 에... 옛 신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영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고기를 구해준 용병님, 축제준비로 고생한 방앗간 장남 지미, 양조장 차남 데니, 숲지기 차남 닥스, 그리고...”

“우우! 우우우!”

마을주민이 술잔과 모자를 흔들며 항의했다. 늙은 촌장은 겸연쩍게 웃고 로벨의 눈치를 보았다. 로벨 역시 지겹기는 매한가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올해 추수제를 시작합니다. 지미 군, 불붙이게.”

방앗관 관리인네 장남 지미가 결연한 표정으로 횃불을 들었다. 지난 닷새간 바짝 말린 밀짚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에게서 손도끼를 받아 맥주통을 내리쳤다. 뚜껑이 깨지고 황금빛 물방울이 솟구쳤다. 캠프파이어 불빛을 머금고 보석처럼 빛났다. 로벨은 영주의 권한으로 선언했다.

“오늘 밤은 마음껏 먹고 마음껏 취해도 좋아.”

“와아아! 와아아아!”

“영주님 만세! 추수제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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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극단을 부르면 좋겠지만, 가난한 로드릭 영지에서는 언감생심 꿈이었다.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가난한 농민들은 술과 고기를 배터지게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최고의 날이었다.

고기 한 점, 빵 한 조각 삼키지 못할 만큼 배를 채운 젊은 남녀들은 적당하게 사그라진 캠프파이어 주위로 몰려나와 춤을 추었다. 술잔과 술통, 국자와 그릇이 악기가 되어 볼탄 반도의 유서 깊은 민요와 노동요를 불러재꼈다. 박자도 없고, 규칙도 없지만, 즐거움은 가득했다.

“와하하하핫!”

“이얏호!”

로벨은 술기운과 캠프파이어 열기로 귓불까지 붉어졌다. 웃고 떠들고 춤추는 사람들이 좋았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좋겠지.’

모두가 하하호호 웃는데, 한 사람, 아니, 두 사람이 행복하지 않았다. 마을 밖을 순찰한 애꾸눈 볼포스와 애꾸눈에게 보고를 받은 펄프 대장이었다. 펄프 대장은 얼굴을 굳히고 불행한 사람을 셋으로 늘렸다.

“My Lord, 웨일 도트넘 백작이 살해되었습니다.”

어쩌면 셋이 아니라 삼백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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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성으로 돌아와 측근들을 모았다. 어린 집사,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그리고 마녀 키르케였다.

“외팔이 더치는?”

“술에 취해서 완전히 뻗었습니다. 깨울까요?”

“...그냥 둬.”

로벨까지 총 다섯 명이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덤덤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웨일 도트넘 백작이 북쪽 숲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숲지기가 신원을 확인하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로벨은 사람 좋은 웨일 백작을 떠올리고 탄식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고, 영주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리 영지야?”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로드릭 영지와 가까운 곳이고, 웨일 백작이 마지막에 방문한 곳이 로드릭 성이란 점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로벨은 조지 도트넘 자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도트넘 자작(Viscount)이 도트넘 백작(Count)이 되겠네요.”

“강철성의 주인이 바뀌는 건가?”

“으으으... 웨일 백작 살해혐의가 걸리면...”

아무도 거론하진 않았으나 모두가 직감했다.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를 쓸어내렸다. 조만간 피를 볼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겠어.”

“만약이라고 하시면...”

“펄프 대장, 징집 가능한 영지민 숫자와 무장 상태를 확인해. 애꾸눈 볼포스는 마을식량을 성안으로 옮겨. 그리고 집사는 촌장과 협력해서 유사시 여자와 아이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난 프란시스 공작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중재를 부탁하겠어.”

지시를 받은 사람은 즉시 흩어졌다. 마녀 키르케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요? 전 뭘 할까요?”

로벨은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크게 기대하지 않는 일거리를 찾아주었다.

“전쟁을 막을 방법을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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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제가 끝난 다음 날. 로벨의 걱정이 현실로 드러났다. 도트넘 자작의 전령이 찾아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비열한, 더러운, 천인공노할 등의 수식어 끝에 ‘명예’와 ‘복수’가 등장했다.

“난 웨일 도트넘 백작의 죽음과 아무 연관이 없어. 옛 신의 이름으로 맹세해. 그래도 못 믿겠다면 결투로 무죄를 증명하겠어.”

로벨은 결투를 요구했지만, 도트넘 자작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랜드 챔피언하고 결투할 만큼 바보는 아닌가 보네요.”

“그때 당한 것이 있으니 몸을 사릴 겁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로벨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징집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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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사슬로 강화된 아밍 더블릿(Arming Doublet)을 받쳐 입고, 서배튼, 그리브(Greave:정강이 보호대), 퀴스(Cuisse:허벅지 보호대), 폴린(Poleyn:무릎 보호대)을 순서대로 착용했다. 그 사이 어린 집사가 플레이트(Plate)와 백 플레이트(Back Plate:몸통 방어구)를 가슴 앞뒤로 붙이고 가죽끈을 꽉 조였다. 본래 종자가 거들어야 할 일이지만, 로벨은 금전적인 이유와 신체적인 이유로 종자를 두지 못해 항상 어린 집사가 대신했다.

로벨은 컨틀렛(Gauntlet)을 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헬멧을 제외한 컴포지트 아머 풀 세팅이었다.

“영주님은 갑옷을 입었을 때가 가장 멋있어요!”

“저들도 그리 생각해야 할 텐데.”

로벨은 롱소드를 차고 성 밖으로 나아갔다. 펄프 대장의 고함소리가 쩔렁쩔렁 울리고 있었다. 정오 햇살에 앞이 하얘졌다가, 곧 잡초 무성한 연병장과 실효성면에서 잡초와 별반 차이 없어 보이는 징집병이 보였다.

펄프 대장 이하 용병들이 대열을 갖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 결과 그럭저럭 사열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14세부터 40세까지 총원 92명 징집 완료했습니다.”

제대로 된 갑옷은 기대하지 않았다. 쇠로 된 무기조차 찾기 힘들었다. 나무창과 나무방패가 대부분이고, 그조차도 없는 사람이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방앗간 관리인 아들 지미와 사냥꾼 찰드 부자 정도만 생가죽을 엮어 만든 하이드 아머(Hide Armor)와 물푸레나무로 만든 숏보우(Short Bow)를 차고 있었다.

어린 집사는 오합지졸 병사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항복할까요?”

“그건 안 되지.”

로벨은 영지민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마음까지 밝아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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