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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6화 (6/605)

6화. 절규

6화. 절규

마녀 키르케가 두 손을 모아 감탄했다.

“와! 철검으로 웨어울프를 해치웠어요?”

로벨은 생각보다 젊고, 아름답고, 방정맞은 마녀 키르케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초대해준 것은 고마운데, 앉아서 대화할 수 없을까?”

마녀의 집은 따스하고 아늑했다. 옛이야기와 달리 못생긴 고양이도 없고, 펄펄 끓는 가마솥도 없었다. 천장에 약재로 쓰이는 풀잎과 버섯이 매달려있을 뿐, 그 외에는 로드릭 영지의 평범한 가정집과 똑같았다.

“은(銀)으로도 상대하기 힘든 마수인데, 어떻게 쇠(鐵)로 해치웠죠? 기사님은 정말 대단한 기사님이군요?”

로벨은 겸양 따위 집어치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꾸준한 연습과 약간의 행운만 있으면 못 죽일 상대가 없어.”

“와아! 정말 훌륭한 말씀이에요!”

외팔이 더치는 어느 부분이 훌륭한지 묻고 싶었으나 마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이런 훌륭한 기사님이 보잘것없는 마녀의 집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나는...”

“아니! 잠깐만요! 제가 맞춰볼게요! 으음... 음... 사랑의 비약? 사랑의 비약이죠? 표정 보니까 딱 맞췄네! 어느 귀부인인가요? 혹시 주군의 아내? 소설 속 기사들은 항상 주인의 아내를 사랑하죠! 꺄아!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칼솜씨를 가진 기사님의 사랑을 받는 귀부인은...”

로벨은 어린 집사가 그리워졌다. 박빙의 승부를 펼칠 수 있을 텐데. 로벨은 간신히 허리를 자르고 목적을 밝혔다.

“이 녀석들을 팔고 싶은데.”

“어머나! 귀여운 강아지들이네요!”

“...늑대야.”

“으악! 늑대를 왜 우리 집에 데려와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마녀 아가씨였다. 로벨은 어깨 갑옷에 묻은 핏자국을 긁어내고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팔려고. 하지만 반응을 보니까 안 되겠네.”

새끼 늑대는 끼잉- 낑- 소리를 내며 로벨에게 달라붙었다. 마녀 키르케가 히죽 웃었다.

“사고 싶어도 안 되겠어요. 기사님을 어미로 여기는 것 같은데요?”

“이 녀석들의 가족은 내가 죽였어.”

“와아! 부모의 원수를 부모로 여기고 자란 늑대 남매의 이야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기사와 늑대의 모험담! 멋져!”

“...막말하는 것도 우리 집사와 똑같네.”

로벨은 품 안으로 파고드는 새끼 늑대를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마녀 키르케는 유심히 관찰하면서 물었다.

“밥은 먹였어요?”

“아침에 집사가 챙겨줬어.”

“아침이요? 이 새벽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고, 어제 아침이란 거죠?”

“그래.”

“이이익! 얘들을 굶겨 죽일 작정인가요? 잔인하다! 잔인해! 이리 주세요! 아이구, 우리 아가들 배고파서 울지도 못하네. 우유가 좀 남아있으려나.”

외팔이 더치가 아랫배를 감싸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새끼 늑대 때문은 아니었다.

“저기, 기사나리. 우리도 점심 이후 아무것도 못 먹었습니다요.”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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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마녀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 졌다. 외팔이 더치는 정체 모를 마녀하고 한 지붕에서 잘 수 없다며 집 밖으로 나갔는데, 초가을 쌀쌀한 밤바람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고집이었다.

로벨은 롱소드를 손질하다가 창문 덮개 사이로 스며들어온 햇살에 멈칫했다. 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마녀 키르케는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 아래로 한쪽 다리를 떨군 채 코를 골았다.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인 것치고 너무 무방비했다. 볼품없는 나무 상자에서 푹신한 바구니 집으로 옮겨간 새끼 늑대들도 새근새근 잠을 잤다. 그리고 집 밖 외팔이 더치도...

‘더치 따위 알게 뭐야.’

로벨은 롱소드를 햇살에 비춰보고 검집에 넣었다. 스르릉- 새끼 늑대 한 마리가 꿈틀거렸다.

“그래.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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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외팔이 더치를 불러 출발준비를 끝냈다. 짐이 없으니 사람도, 말도 홀가분했다.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를 뒤집어쓰고 말했다.

“며칠 더 머물러도 되는데...”

“늑대 안 산다며?”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그럼 이만.”

로벨은 뒤도 안 돌아보고 출발했다. 마녀 키르케는 아쉬운 듯 발을 동동 굴리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러지 말고 기사님이 사세요!”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늑대를?”

“저를 사세요!”

로벨은 할 말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외팔이 더치가 헛소리 말고 저리 가라며 손을 휙휙 저을 때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노예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가...”

“누가 노예가 되고 싶데요? 고용해달라는 뜻이잖아요! 몸종이 있으니까, 집도 있겠죠? 성이라고요? 성이면 더더욱 좋죠! 와아! 성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는데!”

로벨은 그냥 무시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더니 1분 만에 짐을 싸들고 나왔다.

“자! 가요!”

마녀 키르케의 얼굴이 꼭 피크닉 가는 꼬마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로벨은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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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낡아빠진 목재 성을 보고 대단히 실망했다.

“내가 상상한 성은 이런 게 아니야... 공주님을 가둘 탑이 없잖아...”

“공주님이 여길 왜 오냐? 아니, 그보다 왜 가둬야 하는데?”

그런 마녀를 본 어린 집사도 적잖이 실망했다.

“늑대를 팔러 가서 마녀를 사와요?”

“...요리사 필요하다며?”

“마녀가 만든 음식을 먹고 싶어요?”

“...아니.”

“으아앙! 골칫거리가 점점 늘어나는 느낌이야!”

사실 마녀가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잡다한 지식과 특별한 능력으로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마녀 키르케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린 집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선심 쓰듯 말했다.

“후우, 좋아요! 안 그래도 하녀가 필요했으니까. 일단 일을 시켜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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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로드릭 성이 북적거렸다. 물론, 주관적인 표현이었다. 명색이 성(Keep)인데 사람 하나와 늑대 두 마리가 늘었다고 북적일 만큼 작지 않았다. 하지만 마녀 키르케의 발랄한 성격과 새끼 늑대들의 끝없는 호기심 탓에 예전과 달리 활기가 넘쳤다.

로벨은 고심 끝에 늑대 이름을 ‘이야카’와 ‘아야’라고 지었다.

“태양의 신과 달의 여신이네요? 콩알만 한 털북숭이한테 과분한 이름... 아얏!”

태양의 신 ‘이야카’가 어린 집사의 발목을 물었다. 장난으로 깨물었지만 이빨이 날카로워서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이게! 먹이고 재워줬더니!”

어린 집사가 주먹을 치켜들자 장난꾸러기 새끼 늑대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펄프 대장이 성안으로 들어오다 새끼 늑대를 보고 고함쳤다. “훠이! 훠이! 저리가!” 그러자 마녀 키르케가 부엌에서 뛰쳐나와 마주 소리쳤다. “우리 아가들 괴롭히지 마요!” 로벨은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골치 아파.”

그렇게 정신없이 며칠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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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의 찬바람이 남해의 온화한 햇살을 시기하는 가을이었다. 여름내 살을 찌운 짐승들은 게으른 동작으로 숲 속을 어슬렁거렸고, 산고의 고통을 겪은 초목들은 빛바랜 얼굴이 부끄러워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로드릭 마을의 추수가 끝났다.

촌장은 올해 수확한 작물 중 가장 좋은 것만 골라 진상했다. 어린 집사는 굵은 밀알을 한 움큼 쥐며 제대로 된 빵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로벨은 관례대로 수확이 끝난 밀밭의 이삭줍기를 허락하고, 달이 차는 닷새 뒤에 추수제를 열 것을 공표했다. 촌장은 영주의 덕망을 칭송한 후 물러났다.

“매년 하는 요식행위잖아.”

“그런 말씀 마세요. 마을주민은 1년 내내 이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요.”

“추수제 준비는?”

“애꾸눈 볼포스가 멧돼지를 잡아 왔어요. 부족한 음식은 헨리 상단을 통해서 들여올 거예요.”

“헨리 상단?”

“그 왜 저번에 와서 맥주 싹 쓸어간 장사꾼이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 피터가 누군지 기억났다는 뜻이기도 하고, 추수제 준비를 전부 위임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 마녀 키르케가 메인 홀 구석에서 불쑥 나왔다.

“저어, 기사님(Sir)?”

어린 집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영주님(My Lord)이라고 부르라니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게 중요해요!”

어린 집사가 목청을 높였지만, 마녀 키르케는 마녀다운 음험함으로 무시했다.

“기사님, 성 밖에 기사님 손님이 왔어요.”

“손님?”

로벨과 어린 집사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로벨은 친구가 없었다.

‘지금의’ 로벨은 과거 12살까지 성 밖을 나간 적이 없어 귀족들은 물론이고, 로드릭 마을주민조차 존재를 잊고 있었다. ‘진짜’ 로벨은 16살까지 수도원에서 생활했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우울증 때문에 어린 집사의 조부인 늙은 집사 이외에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로벨이 진짜 로벨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어린 집사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하나요?”

“에... 나이가 50 넘은 할아버지인데... 이름이... 웨일... 웨일... 뭐드라?”

“웨일 도트넘 백작?!”

“아! 맞아요! 우리 이심전심이네요!”

“이심전심 같은 소리 하네! 그쪽이 머리가 나쁜 거잖아요!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린 집사는 손님을 접대할 생각하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로벨이 다급히 불러 세웠다.

“어디가?”

“어디긴요! 갑옷을 가져와야죠!”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와.”

로벨은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매를 조금 다듬은 후 마녀 키르케에게 말했다.

“모셔 와.”

마녀 키르케가 홀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펄프 대장과 웨일 백작이 나란히 들어왔다.

웨일 백작은 정수리에 서리가 내려앉은 장년의 나이지만, 허리가 꼿꼿하고, 어깨가 탄탄하니 청년 못지않게 기운이 넘쳤다.

웨일 백작은 오래된 목재 성을 신기한 듯 둘러보고, 홀 중앙에서 기다리는 로벨에게 다가갔다. 어색할 만큼 멀지도, 무례할 만큼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딱 멈춰 섰다. 로벨의 롱소드 간격에서 딱 한 치 밖이었다.

“로벨 경, 잘 지내셨소?”

“웨일 백작, 오랜만이오.”

로벨은 가볍게 묵례했다. 그리고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로벨의 가문은 프란시스 공작에게 충성맹세한 공작파고, 웨일 백작의 가문은 사트로 후작에게 충성맹세한 후작파라 계보가 달랐다. 공작과 후작이 정적관계인 것은 로드릭 마을 촌부도 알 정도였으니, 두 사람이 친분을 쌓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거 좀 어색하군. 평복차림으로 마주한 것이 처음이라 그런가?”

웨일 백작은 껄껄 웃었다. 칼을 놓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로벨은 소리 없이 웃었다. 두 사람이 웃자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도 미소 지었다. 하지만 오래 웃지는 못했다.

“내 아들 녀석 때문에 찾아왔소.”

로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린 집사는 두 뺨을 누르며 절규를 토했다. 그림으로 남기면 후대 명작이 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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