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화 (5/605)

5화. 마녀

5화. 마녀

시절은 이제 막 여름의 귀퉁이를 돌았으나 볼탄 반도 북쪽 끝자락은 이미 가을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로벨은 짐마차에 앉아 추수 중인 밀밭을 구경했다. 황금빛 호수에 낫질하는 사내들과 밀알 줍는 아낙들이 퍽 따스해 보였다. 물론, 본인들은 힘들어 죽을 지경이겠지만...

외팔이 더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푸근하게 말했다.

“풍작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겨울나기가 되겠습니다요.”

“그래. 다행이야.”

“이맘때면 고향 생각이 많이 납니다요. 우리 대장은 용병놈이 감상에 빠지면 일찍 죽는다고 잔소리하면서도 이 시기만 되면 징징거리며 고향집에 돈을 보냅지요.”

“펄프 대장이?”

로벨은 펄프 대장이 징징거리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군.”

로드릭 가문의 귀중한 짐마차는 마을 어귀를 지나 잡초가 무성한 관도로 접어들었다.

노상강도와 몬스터로 점철된 소설 속 여행과 달리, 현실은 고요함과 지루함뿐이었다.

로벨은 상자 속 새끼 늑대와 장난치다가 따사로운 햇살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졸았다. 외팔이 더치는 고용주가 잠든 것을 보고 좀 더 조심스레 마차를 몰았다.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관목이 줄어들고 길이 평탄해졌다. 사람 발길이 자주 닿은 곳이란 증거였다

로벨은 마차 속도가 줄어들자 눈을 떴다.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대신 롱소드를 움켜쥐었다. 바람직한 기사의 자세였다. 외팔이 더치가 재빨리 안심시켰다.

“노스폴드 시티 성문입니다요. 통행허가를 기다리는 중이굽쇼. 오늘따라 행인이 많습니다요.”

“오늘이 며칠이야?”

“가만있자... 어제가 그믐이었으니까, 211일입니다요.”

“그럼 장(場)이야.”

도시마다 다르지만, 노스폴드 시티는 끝자리가 1, 5, 9일 때 시장이 열렸다. 외팔이 더치가 감탄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우리가 장날에 맞춰서 온 거야.”

노스폴드 시티가드들은 로벨의 복장을 확인하고 그냥 통과시켰다. 딱 봐도 기사 티가 나니 검문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기사들은 수색 좀 하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칼부림하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성문을 지나자 도시 냄새가 물씬 났다. 도시민과 마을주민과 행상인이 어우러져 목청껏 소리 지르고, 말과 나귀가 길 한복판에 푸드덕- 푸드덕- 오물을 싸지르고, 돼지와 닭이 주인을 못 찾아 뀌엑! 뀌엑! 울부짖으며 몰려다녔다. 고기 굽는 냄새, 가죽 삭히는 냄새, 땀 냄새, 오물 냄새, 정체 모를 약냄새 등이 코끝을 아프게 했다.

“상인 길드로 가자.”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지만 허가 없이 장사할 수 없었다. 그전에 기사 체면상 장사할 수도 없었다. 상인 길드에서 사람을 소개 받아 싸게 넘길 작정이었다.

늑대가죽은 포목점 주인이, 늑대이빨과 발톱은 장신구를 취급하는 잡화상인이, 곡물 자루는 떠돌이 행상인들이 나눠갔다. 수요가 많은 상품이라 흥정하지 않아도 제값에 팔렸다. 그리고 딱 하나가 남았다. 기사님을 접대하기 나온 길드 마스터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좀... 취급하기가...”

“살 사람 없어?”

로벨이 버릇대로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걸치자 상인들은 제각각 바쁜 척하며 흩어졌다. 철없고 겁 없는 어린 도제들만 남아서 강아지 다루듯 새끼 늑대를 어루만졌다.

길드 마스터는 어린 도제들을 발로 차서 쫓아내고 싹싹하게 해명했다.

“늑대는 먹지도 못하고, 키워봐야 쓸모도 없고... 이놈들아! 저리 가!”

로벨도 강매할 생각은 없었다.

“혹시 마법사 있어?”

“마, 마법사요? 하긴, 마법사들은 해괴한 것을 좋아하니까... ”

길드 마스터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고 보니 마녀(hag)가 있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약초를 팔고 가죠.”

“마녀라...”

로벨은 탑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갓난아이를 납치해서 제물로 바친다니, 악마를 소환해서 추잡한 성교를 벌인다니, 안 좋은 소문이 많았다. 외팔이 더치가 질색하며 말했다.

“마녀라굽쇼! 마녀는 안 됩니다!”

길드 마스터는 화급히 손을 저었다.

“아이고, 경께서 생각하는 그런 마녀가 아닙니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위치(witch), 위치입니다.”

“헤그나 위치나 그게 그거잖소!”

로벨은 외팔이 더치의 어깨를 눌러 진정시켰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 후 말했다.

“어디 가면 볼 수 있어?”

@

외팔이 더치는 짐마차를 끌고 나오며 쉼 없이 투덜거렸다.

“기사 나리, 저깟 새끼 늑대들 팔아봐야 얼마나 받겠습니까요. 그냥 버리고 성으로 갑시다요.”

“안 돼.”

“진짜 마녀를 보러 갈 겁니까요? 마녀입니다! 마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릅니다요!”

“응.”

로벨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길드 마스터가 그려준 약도를 위아래로 뒤집어가며 살폈다. 길드 마스터의 그림 솜씨가 조악한 건지, 로벨의 지도 보는 능력이 모자란 건지 위치를 알기 힘들었다. 북쪽산의 계곡 어디라고 하니 일단 계곡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떠드는 외팔이 더치를 닥치게 했다.

“늑대보다 마녀한테 관심이 생겼어. 그러니까 입 다물고 출발해.”

로벨이 짜증을 비치자 외팔이 더치는 얼른 출발했다. 외팔이 더치가 보아온 서(Sir) 로벨 로드릭은 계집처럼 곱상하지만 오우거처럼 잔혹한 기사였다.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사람을 토막 내는 고용주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어휴... 빨리 돈 벌어서 고향 내려가야지.”

@

오후 늦게 출발한 탓에 북쪽 산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용감한 기사와 거친 용병이라도 밤에 산을 오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계곡 아래에서 야영하고, 날이 밝는 대로 마녀의 집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밤이 길어졌다.

“아우우우-”

“아우우-”

새끼 늑대가 돌연 울부짖었다. 외팔이 더치가 신기해했다.

“이 쪼끄만 것들이 꼴에 늑대라고 하울링하네?”

로벨은 새끼 늑대들의 필사적인 하울링에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늑대가 우는 이유가 뭐더라?’

“더치, 무기 챙겨.”

“예?”

로벨은 롱소드를 끌어당겼다. 챙! 금속음이 울려 퍼지고, 노을빛을 머금은 불타는 칼날이 드러났다. 외팔이 더치는 떨떠름하게 손도끼를 뽑았다.

어느 순간부터 새끼 늑대들이 울지 않았다. 상자 구석에 몸을 숨기고 부들부들 떨었다. 로벨은 산 그림자로 덮여가는 들판을 노려보다가 속삭였다.

“온다.”

그림자 속에서 크고 매서운 것이 뛰쳐나왔다. 로벨은 몸을 왼쪽으로 비틀며 롱소드를 거꾸로 세웠다. 깡! 칼날 위로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로벨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추고, 칼날 수평으로 눕혀 반격했다. 칼끝이 질기고 단단한 피부를 찢었다. 그런데 감촉이 인간이 아니다.

“몬스터?”

칼등 너머 어스름 속에서 흉직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짐승처럼 길 다란 주둥이와 누린내 나는 털가죽이 몬스터의 정체였다. 외팔이 더치가 좀 더 정확하게 소개했다.

“웨어울프(Werewolf)입니다요!”

“크르릉!”

웨어울프가 나이프 다섯 자루를 거꾸로 꽂아 놓은 듯한 손톱을 휘둘렀다. 로벨은 팔꿈치를 올려 카우터(Cowter:팔꿈치 보호대)로 손톱을 막고, 롱소드를 회전시켜 아래에서 위로 베어 올렸다.

지지직-!

속이 꽉 찬 가죽 자루를 찢는 느낌이었다. 근육을 억지로 자르고, 피를 힘겹게 짜냈다. 어렵게 낸 상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아물었다.

“웨어울프라... 은(銀)이 아니면 안 되는 건가?”

로벨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몸으로 밀어내고, 찌르고, 쳐내고, 다시 때렸다. 그러나 성과는 웨어울프를 당황하게 한 것이 전부였다. 도리어 로벨만 눈에 띄게 지쳤다.

그때, 기회를 엿보던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휘두르며 가세했다. 웨어울프 허리에 태클을 걸어 자빠트리고 얼굴을 마구 내리찍었다. 덩치에 걸맞은 힘이었다. 기술도 기교도 없지만 강력했다. 가죽이 찢어지고, 피와 뼛조각이 비산했다. 인간이라면 곧장 절명했을 치명상이지만, 밤의 마수 웨어울프는 달랐다. 외팔이 더치를 발로 차서 떨쳐내고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얼굴의 절반이 사라졌는데도 멀쩡했다. 아니, 눈알이 덜렁거리고 뇌수가 줄줄 흘러서 더 끔찍했다.

“흡!”

로벨은 롱소드를 끌어당겨서 온몸으로 찌르기를 시도했다. 웨어울프가 손을 뻗어 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손바닥을 뚫고, 심장을 뚫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벨은 뒤로 기울어지는 웨어울프 가슴을 발로 밟고, 체중을 실어 칼날을 더욱 밀어 넣었다. 칼날이 웨어울프의 등 뒤로 빠져나왔다.

쿵!

웨어울프가 쓰러지고, 그 심장에 철제 십자가가 세워졌다.

“하아아...”

로벨은 장탄식을 내뱉고 웨어울프 몸뚱이에서 내려왔다. 근래 들어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다.

“더치, 괜찮아?”

“으아아... 안 괜찮습니다!”

“엄살 부리지 마.”

“아뇨! 정말 안 괜찮습니다! 저기! 저기 좀 보십쇼!”

로벨은 덩치 값 못하는 외팔이 더치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원하는 대로 ‘저기’를 보았다. 그리고 성급한 인사평가를 반성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들판 위로 광기 어린 붉은 눈들이 꿈틀거렸다.

“...몇 마리지?”

“누, 눈깔 숫자가... 열, 열하나, 열둘...”

“여섯 마리인가?”

한 마리도 힘든데, 여섯 마리면 대책이 없다. 로벨은 웨어울프 시체에서 롱소드를 회수한 후 전투마를 힐끔 보았다. ‘두 사람을 태우고 도망칠 수 있을까?’ 하지만 도망칠 필요 없었다.

“랄라라... 거친 바람아 울지 마라. 잠든 불꽃이 깨어날라. 랄라라... 랄라라... 성난 짐승아 오지 마라. 시든 꽃잎이 떨어질라.”

“노래?”

“어어? 나리도 들립니까?”

젊은 여자의 노래였다. 자장가처럼 차분하고 나른한데 장소가 장소다 보니 소름이 돋았다. 외팔이 더치가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어느 정신 나간 여자가 노래를...!”

웨어울프 무리 반대쪽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부싯돌을 튕기는 듯했다. 로벨은 기사도를 발휘했다.

“위험해! 도망쳐!”

하지만 여자는 도망치지 않았다. 몇 차례 반복해서 횃불을 밝혔다. 로벨 일행과 웨어울프 무리가 드러났다.

“너희가 있을 곳이 아니란다. 집으로 돌아가렴.”

그리고 횃불 뒤로 ‘정신 나간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꼬리가 처진 고깔모자를 쓰고, 소매가 풍성한 꼬뜨(colte:로브의 전신)를 입고, 떡갈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자기소개가 따로 필요 없는 복장이었다.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휘두르며 고함쳤다.

“마, 마, 마녀닷!”

마녀가 지팡이를 마주 휘두르며 소리쳤다.

“마녀 아니거든요? 마법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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