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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4화 (4/605)

4화. 시장

4화. 시장

로벨은 당대 최강의 기사 중 하나를 도발하는 도트넘 자작이 어이없었다. 스스로 ‘최강’ 운운한 것이 부끄럽지만 거짓이 아니니 정정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로벨이 되묻자 도트넘 자작은 의기양양했다. 그랜드 챔피언을 굴복시켰다는 저열한 승리감이었다.

“피는 피로 갚는 것이 오랜 관례요. 이 두 놈 중 하나를 죽여야겠소.”

예상한 주장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로벨은 즉시 대답했다.

“그럴 수 없소.”

로벨이 고민조차 하지 않자 도트넘 자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듯했다.

“그렇다면 도트넘 가문의 명예를 위해 경을 무릎 꿇릴 것이오.”

“과연 할 수 있을까?”

“서 로벨 로드릭을 내 앞에 꿇려라!”

포차드를 꼬나쥔 병사들이 다가왔다. 로벨의 전투마가 피냄새를 맡았는지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주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로벨은 왼손으로 검집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롱소드를 뽑음과 동시에 겁 없이 간격 안에 들어온 병사를 베었다. 빠르기도 빠르지만, 그것보다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피가 솟구치고, 근육이 풀려 쓰러질 때까지, 누구도 병사가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목이 잘린 병사 본인조차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자가 감히! 감히!”

로벨은 고삐를 당겨 전투마를 투레질시켰다. 병사들은 말굽에 밟히지 않기 위해 다급히 좌우로 피했다. 그곳은 로벨의 간격 안이었다.

로벨은 말 위에서 유연하게 허리를 비틀며 좌우 병사를 쳐냈다. 슬쩍 친 것 같은데 창대가 부러지고, 투구가 쪼개지고, 뼈가 끊어졌다.

“말을 쓰러트려라! 그, 그래! 활을 쏴! 아처! 준비!”

로벨은 자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전투마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말에서 내렸다. 로벨과 가까이 있는 병사들에게 안 좋은 소식이었다. 두 발로 땅을 딛고, 두 손으로 롱소드를 휘두르자 두 배 쯤 더 빨라졌다.

병사들은 포차드의 긴 리치를 이용해 창을 찔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로벨은 몸을 비틀어 어깨 갑옷으로 창을 튕겨내고, 간격을 좁혀 머리를 두 쪽으로 쪼개주었다. 1대 19의 싸움이 숨 한번 크게 쉴 동안 1대 13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곧바로 4대 10이 되었다.

파앙-!

수풀이 들썩이나 싶더니, 나뭇잎 사이로 쿼럴이 날아와 화살을 재는 병사의 심장을 뚫었다.

“지금이다!”

“으라차차!”

펄프 대장은 온 몸을 던져 시위 당기는 병사에게 태클을 걸었고, 외팔이 더치는 과장 좀 보태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주먹으로 넋 나간 병사의 턱을 올려쳤다. 그리고 쓰러진 병사에게서 무기를 갈취해 소란을 일으켰다.

“용병밥 32년 차인데, 네 까짓 놈들한테 당할쏘냐!”

펄프 대장은 대거를 휙휙 소리 나게 휘두르며 병사들을 압박했다.

용병들도 대단하지만 로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로벨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굳건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창을 찌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창질하다가 머리통 쪼개진 동료가 벌써 셋이었다.

“그랜드 챔피언! 진짜 그랜드 챔피언이야!”

“우, 우리 상대가 아니잖아!”

기선제압과 돌발행동으로 승기를 잡았다. 전력비율이 4대 8까지 내려가자 2배의 전력임에도 항복했다. 병력의 절반이 죽거나 죽어가는 중이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로벨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롱소드를 늘어트리고 도트넘 자작에게 다가갔다.

“자작, 남길 유언은?”

“힉! 히익!”

도트넘 자작은 뒷걸음치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로벨은 동방비단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이 가슴 아팠다. 어린 집사가 좋아할 물건인데...

로벨은 롱소드를 허공에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 검집에 밀어 넣었다.

“농담이야.”

로벨은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를 힐끔 보았다. 워낙 강단 있는 사내들이라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생생했다.

“사, 살려줄 거요?”

“귀족을 죽이는 것은 명예롭지 않으니까.”

“그, 그렇지! 경은 명예로운 기사였지!”

“하지만 때리는 것은 괜찮겠지.”

로벨은 도트넘 자작의 턱을 걷어찼다. 머리가 90도로 들리면서 이빨과 코피가 솟구치는 것이 장관이었다. 부드러운 가죽구두라 망정이지, 징 박힌 서배튼(Sabbaton: 발 보호 갑옷)를 차고 있었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교훈이 되었기를 바래.”

로벨은 진심을 담아 충고했지만, 도트넘 자작은 혼절한 탓에 새겨듣지 못했다.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아까 쳐 웃은 거 너지? 아니라고? 어따 거짓말이야!’ 등으로 병사를 괴롭히는 펄프 대장을 불렀다.

“그만 가자.”

“이놈들은 어쩝니까?”

“그냥 둬.”

“그냥이라굽쇼? 이자들은 나리에게 창을 겨눴습니다요!”

외팔이 더치가 흥분해서 방방 뛰었다. 로벨은 전투마에 오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늑대를 잡으러 왔지, 사람을 잡으러 온 거 아니잖아.”

@

어린 집사는 가난하지만 위대한 주인에게 화를 냈다. 늑대를 많이 못 잡아서가 아니었다.

“도트넘 자작이라구요?!”

“그래.”

“농담이죠? 농담이라고 해주세요!”

“왜 그래?”

로벨은 피를 머금은 롱소드를 손질하며 되물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조지 도트넘 자작의 아버지가 강철성의 웨일 도트넘 백작이잖아요!”

“미망인 전쟁의 영웅?”

책하고 담을 쌓고 지낸 로벨이지만, 야사로 유명한 ‘미망인 전쟁’은 알고 있었다. 귀부인의 치정으로 시작해서 대영주간의 전쟁으로 발전한 사건이었다. 중재자 없는 자존심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끔찍한지 보여준 사례이기도 했다. 그리고 웨일 도트넘 백작은 당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기사였다.

“2년 전인가. 토너먼트에서 겨룬 적 있어.”

“아! 기억나요! 영주님이 한방에 꺼꾸러트렸죠?”

“한방 아니야. 3차전까지 가야했어.”

“아무튼 영주님이 이겼잖아요. 그리고 웨일 경은 은퇴를... 앗! 그거 때문이구나! 그 일로 앙심을 품은 거예요! 그거 말고 이유가 없어요!”

로벨은 품위 있는 웨일 도트넘 백작을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사람 속내는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백만 번 양보해서 웨일 경이 훌륭한 인격자라 해도, 그 자식까지 훌륭하단 보장이 없잖아요?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퇴물로 전락시킨 새파란 비렁뱅이 기사를 좋게 볼 리 없죠!”

“말이 좀 심한데...”

어린 집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튼 조심해요. 이번 일로 더욱 적개심을 가졌을 거예요. 소나기는 피해가고, 미친개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지혜죠!”

나이답지 않은 조언이었다. 로벨은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사냥 안 가도 돼?”

어린 집사는 좀 더 생각한 후 말했다.

“조심해서 사냥하란 뜻이었어요. 늑대 많이 많이 잡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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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사냥을 시작한 지 나흘이 지났다.

첫날 잡은 수컷 늑대를 포함해 총 7마리를 사살하고, 젖을 갓 뗀 새끼 2마리를 사로잡았다. 어린 집사와 마을 아이들은 꼬물거리는 새끼 늑대를 무척 귀여워했다.

“영주님. 영주님. 얘네들 키워도 될까요?”

“아니.”

로벨은 마구(馬具)를 정리하며 말했다. 영주의 성을 재미난 놀이터쯤으로 여기는 철부지 사내아이가 다시 물었다.

“왜요? 왜 안 돼요?”

“그건 강아지가 아니야. 지금은 얌전하지만 다 자라면 야성을 드러낼 거야.”

꼬질꼬질한 여자아이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반박했다.

“이쁘게 키우면 이쁘게 자라지 않을까요?”

외팔이 더치가 늑대 시체를 옮기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이쁘게 잡아먹겠지. 너 같은 말라깽이 꼬마는 뼈 채 씹어 먹을걸?”

인상 험악한 외팔이 더치가 겁을 주자 마을 아이들이 일제히 울먹이기 시작했다. 펄프 대장이 이마를 짚고 버럭! 소리쳤다.

“이놈들! 영주님 집이 너희집 마당인줄 알아? 썩 꺼져! 안 그러면 꽁꽁 묶어다 저 외팔이 아저씨 저녁밥으로 주겠다!”

“왜 또 나를 걸고넘어지우?”

외팔이 더치가 구시렁거렸다. 마을 아이들은 외팔이 더치를 힐끔 보고 비명 지르며 도망쳤다. 애꾸눈 볼포스가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영주님 집이 정말 마당인 어린 집사는 새끼 늑대를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너무 작아서 가죽도 안 나오겠네요. 내다 버릴까요?”

생각하는 것도 또래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로벨은 고생한 전투마를 마구간에 풀어놓고 삶은 콩을 넉넉히 주었다. 빗질 좀 시키고 싶지만, 펄프 대장의 뭐 마려운 표정을 보아 포상부터 해야 할 듯했다.

“가죽 한 필씩 가져가. 가죽이 필요 없으면 돈으로 줄게.”

용병들은 당연히 돈으로 받았다. 어린 집사는 악귀 같은 용병들을 상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시세를 운운하며 최대한 포상금을 깎았다.

로벨은 낑낑거리는 새끼 늑대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을 살 사람도 찾아봐.”

“누가 살까요? 이익! 이빨 빼가지 마요! 바지 까요! 까 봐요!”

로벨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마법사라면 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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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노스폴드 시티였다. 가깝다고 해도 도보로 한나절을 가야 하는 거리였고, 도시라고 해도 인구 4,000명 남짓의 소도시였다.

“그래도 정기시(定期市)가 열리는 ‘도시’라구요. 우리 영지와 비교가 안 되죠.”

“우리 영지가 어때서...”

로벨과 어린 집사는 삐그덕거리는 짐마차에 그동안 재여 둔 가죽, 포목, 콩, 귀리, 그리고 새끼 늑대를 실었다. 로벨은 짐말 노릇을 하게 된 전투마를 다독였다.

“미안해.”

사람으로 치면 기사라 할 수 있는 전투마를 짐말로 이용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말을 못 알아듣는 말은 아무 불만이 없었다. 무거운 안장에 무장한 기사를 태우나, 오래된 수레에 잡동사니를 싣나 말 입장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어린 집사는 빠진 것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핀 후 마부가 된 외팔이 더치를 다그쳤다.

“더치 씨, 영주님을 잘 보필하세요. 영주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어린 집사 딴에는 무시무시한 협박이지만, 외팔이 더치는 귓구멍을 후비고 한 귀로 흘렸다.

“기사 나리가 코흘리개 꼬마도 아니고 무슨 보필을 하라는 거요?”

“우리 영주님이 저래 보여도 섬세해서 손이 많이 간다고요!”

로벨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래 보여도...”

“아무튼 내일 점심때까지 돌아오세요! 안 그러면 영지민을 총동원해서 찾으러 갈 거예요!”

“그럴 것까지 있어?”

“도트넘 자작 일을 벌써 잊었어요?”

로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린 집사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까치발을 들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외팔이도 조심하세요. 성에 있을 때처럼 옷을 훌렁훌렁 벗으면 안 돼요. 잠을 잘 때 거리를 두세요. 아침에 일어나면 면도하는 시늉도 하세요. 남자들은 전부 늑대라서 영주님 정체를 알면...”

“그만! 그만해!”

로벨은 잔소리꾼을 쫓아내고 짐마차에 올랐다. 외팔이 더치는 한손으로도 능숙하게 마차를 몰았다.

“가자, 게으름뱅이야! 이럇!”

어린 집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누구보고 게으름뱅이래? 그 말이 더치 씨 몸값보다 20배 더 비싸거든요? 조심해서 몰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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