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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3화 (3/605)

3화. 늑대

3화. 늑대

까마귀는 먹을 만한 부위가 많지 않았다. 머리 잘라내고 다리 떼어내고 뼈와 내장 빼내고 나면 호두알보다 조금 큰 가슴살 두 개가 나올 뿐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고기였다. 어린 집사는 까마귀 고기를 스튜에 넣어 열심히 휘저었다.

“빨리 사냥철이 왔으면 좋겠다~”

“아직 멀었어.”

그때 누군가 메인 홀로 들어왔다. 징 박힌 가죽부츠가 딱딱한 마룻바닥을 두드렸다. 로드릭 영지에서 쇳소리를 내는 사람은 3명뿐이었다.

“영주님? 계시오?”

“펄프 대장?”

로드릭 가에서 고용하고 있는 펄프 용병단 대장이었다. 거창하게 ‘용병단’이라 자칭하지만, 인원은 고작 3명이었다. 그것도 전장에서 받아 주지 않는 중늙은이와 외팔이와 애꾸눈이었다. 그래도 바바리안 후예인 네일 공국 출신답게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했다.

펄프 대장은 머리와 수염이 희끈희끈한 50대 장년이었다. 용병일을 하면서 쉰 살까지 살아남은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나이 탓에 체력이 떨어지지만, 그 대신 노련함이 있었다. 치안 관리, 사냥터 관리, 징수관 호위 등등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외팔이 더치는 로벨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큰 거인이었다. 7년 전 더프타 성 전투에서 에르나 왕국 기사와 싸우다가 왼손을 잃었다. 비록 외팔이지만 오른손에 도끼, 왼손에 방패를 끼우고 싸우면 어지간한 용병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애꾸눈 볼포스는 숙련된 아바레스터Arbalester였다. 타고난 사냥꾼으로 전장에서 수차례 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높으신 분’의 사냥개를 쏘아 죽이는 ‘실수’를 범해서 한쪽 눈알이 뽑히는 형벌을 당했다.

펄프 대장은 영주와 집사가 식사 중인 것을 보고 곤욕스러운 얼굴로 보고했다.

“마을 사냥꾼이 불법으로 까마귀를 사냥했습니다. 영지법으로 처벌하려고 하니까 영주님께서 용서했다고 주장합니다.”

“찰드 씨? 그냥 내버려 둬.”

로벨이 인정하자 펄프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My Lord,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법을 어겼으면 응당 처벌해야지 않습니까?”

어린 집사가 국자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거 참! 영지민이 몇 명이나 된다고! 사람 좀 죽이지 말라고요!”

“난 죽인다고 안 했소, 작은 집사.”

“당신네가 하는 처벌이 뻔하지!”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조용하라고 눈짓하고 펄프 대장에게 말했다.

“내가 용서했어. 그러니까 그만해.”

“Yes, My Lord.”

로벨이 짜증을 비치자 펄프 대장은 즉시 수긍했다. 신분으로 보나, 고용관계로 보나, 직접적인 힘으로 보나 젊은 영주에게 반항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외팔이 더치가 겁 없이 덤볐다가 닷새간 걷지도 못할 만큼 두드려 맞았다. 일국의 그랜드 챔피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왕 온 거 먹고 가.”

“아? 그래도 됩니까?”

어린 집사가 쌍심지를 켰지만, 펄프 대장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빌붙었다.

어린 집사는 재빨리 고기를 건져서 로벨에게 주었다. 하지만 착한 영주는 콩알만 한 고기를 쪼개서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에게 나눠주었다. 자상하다고 해야 할지 궁상맞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펄프 대장은 귀한 고기를 한 입에 삼키고, 국물까지 후루룩 마신 후 빈 그릇을 치웠다.

“그나저나 영주님. 추수기에는 토너먼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이곳의 한 줌도 안 되는 작물 수확이야 촌장이 알아서 할 테고, 혹시 다른 일정이 있습니까?”

“훈련?”

“그건 아침저녁 식사 수준의 일과잖습니까?”

“그럼 딱히 없어.”

펄프 대장은 팔짱을 끼고 씨익- 웃었다.

“늑대 사냥 어떻습니까?”

“왜?”

“늑대무리가 기승을 부릴 때 아닙니까. 농민이 피해 입기 전에 손을 쓰는 것이 좋지요.”

“명분은 알겠고, 진짜 목적은?”

로벨이 까칠하게 묻자 펄프 대장은 뒤통수를 퍽퍽 긁었다.

“우리 애들이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영주님이 허락하시면 열심히 잡아다 바칠 겁니다. 그리고 늑대사냥은 실전감각을 키우는데 아주 좋지요.”

로벨은 그릇을 놓고 곰곰이 생각했다.

추수가 끝나면 늑대와 여우를 사냥했다. 겨울이 되면 굶주림을 못 참고 마을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늑대가죽, 발톱, 여우모피 등은 짭짤한 수익이었다.

어린 집사도 부수입을 떠올리고 ‘이히힛!’ 웃었다. 로벨은 측근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좋아. 내일 아침 출발하지.”

@

로벨은 사냥을 나가거나 순시를 돌 때 왼쪽 팔과 왼쪽 어깨에만 갑옷을 입었다. 좀 이상하긴 해도 완전무장보다 가볍고 비무장보다는 실용적이었다. 물론, 전장에서는 완전무장이 좋았다. 컴포지트 아머를 풀 세트로 갖추면 일반무기로는 손톱만큼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대포나 투석기를 동원하면 모를까.

소드 벨트 왼쪽에 롱소드를 비켜차고, 오른쪽에 대거를 꽂았다. 반쪽짜리 갑옷과 마찬가지로 반쪽짜리 무장이었다. 전장에 나갈 때는 마상용 랜스, 워 해머, 크로스보우와 쿼럴 상자 등등을 준비해야 했다.

“칼로 늑대를 잡을 생각입니까?”

“아니.”

“사냥꾼한테서 활이라도 빌려올까요?”

“괜찮아. 내 활은 저기 있으니까.”

로벨은 안대를 만지작거리는 애꾸눈 볼포스를 가리켰다. 애꾸눈은 등 뒤에 아바레스트를 매고 허리 양옆에 쿼럴이 담긴 가죽 주머니와 짤막한 헌팅 나이프를 차고 있었다.

“아주 현명하십니다.”

펄프 대장은 건성으로 아부하고 외팔이 더치를 찾았다. 외팔이는 사냥에 필요한 도구들을 싸들고 성에서 가장 좋은 전투마를 끌고 왔다. 말 고르는 안목을 의심할 필요 없었다. 로드릭 가문의 말은 한 필뿐이었다.

로벨은 직접 안장을 점검하고, 사뿐히 올라탔다. 펄프 용병단은 자연스럽게 꽁무니를 따라갔다. 어린 집사가 성문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비싼 늑대로 잡아오세요!”

로벨은 손을 흔들고 펄프 대장을 배려해 느릿느릿 말을 몰았다.

@

로드릭 영지 북쪽에는 구태여 이름을 붙일 필요성을 못 느껴 그냥 '숲'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다. 전설이 잠들어 있는 곳도 아니고, 흉포한 괴물이 사는 곳도 아니었다. 어둡고, 습하고, 풀냄새 물씬 나는 평범한 숲이었다.

“동쪽으로 간다! 동쪽”

“아, 알았다! 가고 있다!”

“이 멍청아! 동쪽이라고! 그쪽은 남쪽이잖아!”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가 횃대를 휘두르며 늑대를 몰아붙였다. 간혹 사나운 놈이 으르렁거리며 덤빌 듯 굴었지만, 불과 장대로 위협하면 금방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펄프 대장은 집채만 한 늑대가 도망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쫓아갔다. 늑대가 포식동물이긴 해도, 아주 굶주린 경우가 아니면 인간을 공격하지 않았다.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용병들과 늑대들로 요동치는 숲을 관찰했다. 울음소리와 누린내가 점점 가까워졌다.

“...온다.”

애꾸눈 볼포스는 쿼럴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아바레스트 몸체에 올렸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My Lord, 첫 사냥감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수풀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팡-! 로벨은 조급한 사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쿼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수풀 속에서 커다란 수컷 늑대가 튀어나왔다. 늑대하고 사전에 합의라도 한 것처럼 절묘했다.

깨갱! 깽!

철제 쿼럴이 수컷 늑대의 상완골을 박살냈다. 수컷 늑대는 앞다리가 풀려 앞으로 나뒹굴었다.

“훌륭해.”

“과찬의 말씀입니다.”

애꾸눈 볼포스는 윈드라스를 꺼내 아바레스트에 장착하고 손잡이를 감았다. 늑대들은 수컷 주위를 맴돌며 우왕좌왕했다. 수컷 늑대가 우두머리였던 모양이다.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인가?’

로벨은 죽어가는 수컷 늑대를 착잡하게 지켜보았다. 그 사이 애꾸눈 볼포스가 재장전을 마치고 쿼럴을 꺼냈다. 한 마리 더 잡으면 반대방향으로 도주할 것이다. 그 다음은 펄프 대장에게 맡기면 된다.

“으아아아악!”

“음마아앗!”

파앙-!

쿼럴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숲이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 탓에 손이 미끄러진 것이다. 애꾸눈 볼포스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대장?”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의 목소리였다. 로벨은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돌렸다.

“잠깐 쉬자.”

“예?”

애꾸눈 볼포스를 내버려두고 숲으로 말을 몰았다. 뭐라고 소리쳤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애꾸눈 성격상 욕을 하진 않았을 테고 ‘위험하다’나 ‘같이 가자’일 것이다.

이 숲에는 늑대 이외에 위협이 되는 짐승이나 몬스터가 없었다. 사납고 무서운 용병이라 자부하는 펄프 대장이 소리를 질렀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히얏! 히야앗!”

로벨은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롱소드를 뽑았다. 거추장스러울 만큼 길다란 칼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매끄럽게 뽑혔다. 로벨은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베어냈다. 캔터(Canter:시속 약 20km)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상하좌우 자유자재로 칼질하며 길을 여는 모습이 실로 예술적이었다. 그렇게 속도 한번 줄이지 않고 펄프 대장이 비명 지른 곳에 도착했다.

“와씨! 넌 또 뭐야?”

수령이 오래된 떡갈나무 주위의 작은 공터였다. 숏보우와 파이크로 무장한 병사들이 펄프 대장 일행을 포위하고 있었다. 무력충돌이 있었는지 펄프 대장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그래도 그냥 당하진 않은 듯 병사 하나가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기절해 있었다.

“저분이, 저분이 우리 영주님이십니다! 무기를 거둬주십시오!”

로벨은 지휘관을 찾았다. 귀한 동방비단을 칭칭 감고 있어 어렵지 않았다. 상대방 역시 로벨을 훑어보았다. 잘 손질된 롱소드, 윤이 나는 폴드런(Pauldron: 어깨 방어구), 건장한 전투마까지 의심할 여지 없는 기사였다. 지휘관은 용병들을 대할 때와 달리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도트넘 가문의 장자 조지 도트넘 자작(Viscount)이오. 경의 수하인 줄 모르고 무례를 범했소. 생긴 것과 하는 짓이 영락없는 도적이라.”

토트넘 사병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로벨은 롱소드를 꽂아 넣고 목례했다.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 로드릭? 그러면 경이 바로...”

도트넘 자작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 당혹, 의심, 경계, 그리고 비웃음이었다.

“경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그런데 아랫사람 교육은 칼솜씨를 못 따라가나 보오?”

도트넘 자작은 외팔이 더치를 발로 툭툭 쳤다. 로벨은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이곳은 로드릭 가문의 사유지요. 허락 없이 들어온 자작이 잘못이 더 크오.”

“으하핫! 시골 영지를 지날 때마다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어느 세월에 수도 포클랜드를 찾아가겠소?”

로벨은 칼자루를 쓰다듬으며 응수했다.

“자작은 부디 말조심하시오. 가진 것이 명예뿐인 시골 기사가 결투를 신청할 수 있으니.”

도트넘 자작은 찔끔해서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한 명 줄어서 열아홉 명 남은 사병들을 돌아보았다. 소드 마스터라도 이만한 숫자를 당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로벨도 싸울 생각은 없었다.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에게 미안하지만, 고위 귀족과 싸워서 좋을 것이 없었다.

“용무가 많은 듯하니 피해 주겠소. 내 사람을 풀어주시오.”

로벨은 한발 물러나 타협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적의를 잘못 읽었다.

“그럴 수 없소이다. 내 부하가 상했으니 대가를 받아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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