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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화 (2/605)

2화. 기사

2화. 기사

로드릭 가문은 프란시스 공작가의 봉신가문이다.

로드릭 가문의 시조를 보자면 6대조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초대 로드릭 경은 위대한 정복왕 샘 포클의 12인 기사 중 한 명인 아몬드 프란시스 경의 충직한 가신이었다. 정복전쟁 이후 프란시스 경은 프란시스 공작이 되어 볼탄 반도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프란시스 공작의 가신이었던 초대 로드릭 경은 볼탄 반도 북부의 작은 농토를 하사받았다.

“My Lord, 올해부터 인두세를 낮춘다고 들었습니다.”

로드릭 영지의 로드릭 마을을 대표하는 늙은 촌장이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로벨은 어린 집사를 힐끔 보고 대답했다.

“그렇다.”

로벨이 긍정하자 늙은 촌장의 주름이 활짝 펴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하옵니다! 허나 영주님께 누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너희 세금보다 내 상금이 많아.”

“그, 그리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고작 삼백 명 남짓한 영지민이었다. 인두세, 토지세, 통행세, 결혼세 등등 다 걷어봐야 품위 유지비도 나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로벨의 친부이자 전(前) 영주인 필립 로드릭은 볼탄 반도 순회상단을 운영해서 예산을 충당했다. 현(現) 영주인 로벨 로드릭은 상재가 없으나 무재가 뛰어나 각종 토너먼트 우승상금으로 예산을 확보했다.

어린 집사는 늙은 촌장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다음!”

“My Lord, 인사드립니다. 헨리 상단의 헨리 피터입니다.”

로드릭 영지를 지나가는 상단주가 교역허가를 요청하며 작은 선물을 바쳤다. 여우가죽 한 필과 고급와인 한 병이었다. 로벨은 흔쾌히 그러라고 승인했다.

로드릭 영지가 유일하게 자랑하는 상품이 맥주였다. 보리와 홉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주세(酒稅)가 낮은 탓에 가격이 무척 저렴했다. 염가판매로 시장을 흔들면 견제가 들어올 법도 한데, 로드릭 영지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20배럴이 채 되지 않아 아무리 싸게 팔아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다음!”

“......”

“...이 없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열흘에 딱 한 번 하는 알현이지만, 알현요청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 보름에 한 번으로 줄여도 되지 않을까?”

“안 돼요! 뭐 먹고 살려고요? 세금도 내리고! 상단도 망하고! 진상품이라도 받아야죠!”

로벨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만뒀다. 힘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고, 말로 이길 수도 없었다. 세상천지에 어느 종복이 저럴까 싶기도 하지만...

“영주님? 어디 가세요?”

“...훈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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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게 ‘근력’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시를 외우고, 춤을 배우는 것은 부가적인 요소였다. 옛 기사 중에는 글을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이도 있었다. 글 배우는 시간도 아껴가며 몸을 단련했노라 말했다.

기사가 근육을 키울 때는 바위를 들어서 빙글빙글 돌리다가 멀리 던지는 방법을 사용한다. 로벨 역시 두 자릿수 바위를 깨트렸고, 그 숫자를 내심 뿌듯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로벨은 힘으로 ‘진짜 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무지렁이 농민이나 배불뚝이 상인은 두 명, 세 명이 덤벼도 상대할 자신이 있으나, 똑같은 시간, 똑같은 방법으로 훈련한 기사들은 이길 수 없었다.

“하아... 하아...”

로벨은 신체의 한계를 절감하고 근력보다 순발력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검술시합이든, 마상시합이든 승부를 가르는 것은 어차피 한 방이었다.

로벨은 왕복달리기 30회 후 쓰러졌다. 혀가 마르고, 입술이 갈라지고,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그러나 쉴 수 없었다. 심장이 진정되자 무기 거치대에서 롱소드(Langschwert)를 빼들었다.

‘상단세 짧게 자르기... 중단세 길게 찌르기...’

어느 기사나 기본적인 검술은 비슷하다. 지난 1,000년 동안 ‘잘 죽이기 위해’ 발전한 검술은 궁극적으로 유사한 형태가 되었다. 개인마다, 가문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지만, 제삼자가 볼 때는 어느 검술이나 비슷했다. 기본기가 똑같기 때문이다. 로벨 역시 포비아 왕국 검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포비아 왕국 검술은 롱소드(Langschwert Fechten), 메서(Messer Fechten), 소드&버클러(Schwert&Buckler Fechten) 세 가지 종류를 기본으로 하며, 상대와 상황에 따라 평복검술(Bloss Fechten), 갑주검술(Harnish Fechten), 마상검술(Ross Fechten) 세 가지 형태로 사용했다.

‘중단세 가드치기... 하단세 폼멜치기...’

로벨은 롱소드로 포비아 왕국 검술학파에서 공인하는 소드 마스터(Master of Longsword) 자격을 획득했다. 롱소드 이외에도 수준급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힘으로 몰아붙이는 메서와 한손으로 공격과 방어를 유지하는 소드&버클러는 힘이 부쳐서 오래 하지 못했다.

로벨은 롱소드 기본자세에서 공격동작을 세 번씩 반복하고, 다시 방어동작을 세 번씩 반복했다. 그렇게 총 30세트 실시한 후 롱소드를 내려놓았다.

“하여간 기사들이란!”

어린 집사가 수통과 수건을 챙겨서 쪼르르 달려왔다. 로벨은 수통마개를 어금니로 뽑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남은 물을 머리 위로 쏟아 부었다.

“아악! 그러지 말라고요!”

“...더워.”

옷이 몸에 달라붙으면서 굴곡이 드러났다. 왜소한 어깨, 소담한 가슴, 굴곡진 허리...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 로드릭 가문 젊은 영주, 로벨 로드릭의 진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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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삭막한 정원이 잘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앉아 롱소드를 손질했다. 수시로 갈아서 숫돌을 쓸 필요가 없었다. 값비싼 정향유(丁香油)로 광이 나게 닦아줄 뿐이었다. 어린 집사는 값싼 양털유를 쓰면 안 되냐고 넌지시 권했지만 로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목숨 값이 싸다면.”

주인의 목숨 값이라 하니 어린 집사도 할 말이 없었다.

어린 집사는 넙적한 주판을 꺼내놓고 회계업무를 시작했다.

“빌헬름 백작가 우승상금이 3,500페닝... 프리드리히 공작가 우승상금이 9,800페닝... 에잉! 이왕이면 1만 페닝으로 맞춰주지! 상반기 걷어 들인 주세, 통행세, 사망세를 합치면 1,205페닝... 성채 관리비랑 갑옷 수리비랑 용병 급료랑 식비랑 말먹이 비용이랑 기타 등등 빼고 나면... 5,702페닝하고 82로닝이나 남아요!”

“괜찮아?”

“그럼요! 작년보다 두 배나 남았어요!”

어린 집사는 손뼉 치며 좋아하다가 갑자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영주님? 이제 요리사랑 하인을 고용해도 되지 않을까요?”

“위험해.”

로벨이 말하는 위험은 의미가 남달랐다. 그러나 어린 집사도 할 말이 많았다.

“영주님이 조심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기왕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지금 꼬라지가 말이 아니에요. 성인지 던전(Dungeon)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라고요. 숨 한번 들이마시면 먼지로 배가 부를 걸요. 또 거미줄은 얼마나 많은지...”

“아, 알았어. 알았다고.”

어린 집사는 5,700페닝을 쪼개고 쪼개서 사용처를 나누기 시작했다. 5,700페닝이 작은 금액은 아니지만, 영주의 재산치고 큰돈도 아니었다. 인구가 1만 명이 넘는 대도시 주인은 한 해 세금으로 10만 페닝 씩 벌어들였다.

“요리사는 프란시스 시티에서 고용해야겠어요. 하인보다 하녀가 싸니까, 하녀가 좋겠는데... 아! 맞다! 존 씨네 첫째 딸이 14살이 되었다지요? 그 아이를 쓰면 되겠네요. 그리고 마구간지기도 고용해야겠어요. 영주님이 언제까지 말먹이를 신경 쓸 수 없잖아요.”

“내 말은 내가 관리해.”

“남들이 보면 비웃어요. 안 그래도 거지... 가난뱅이 영주라고 소문나서 부끄러운데요.”

로벨은 롱소드를 칼집에 꽂아 넣었다. 칼날이 칼집을 따라 미끄러지며 가슴 예리는 소리를 내었다. 스르릉-!

“...밥이나 먹자.”

@

로드릭 성(Castle)은 3~4세기 전에 만들어진 고성이었다. 흙을 쌓아서 언덕을 높이고, 통나무를 세워서 성벽을 만들고, 성내에 목재로 된 아성(Keep)과 마구간을 하나씩 두었다. 로벨의 조부가 되는 전전대 영주는 최신기술을 도입해서 석재 원형 성곽(Round Keep)으로 증축하고자 했지만, 인력과 자금이 부족해서 남쪽 일부만 겨우 공사할 수 있었다. 어린 집사는 차라리 안 한 만도 못하다며 투덜거렸다. 어쨌든, 로드릭 성은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솔직하게 말하면 가난뱅이 냄새가 났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10피트 남짓한 목책 성문을 지나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구불구불한 흙길을 따라가면 작고 허름한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로드릭 마을이 나타난다.

“영주님! 영주님이다!”

“아버지! 어머니! 영주님이 오셨어요!”

로벨을 본 영지민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느 지방 영주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로드릭 지방에서 영주는 존경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세금 낮추고, 수탈 안 부리고, 노역할 때마다 술과 음식을 챙겨주니까 미워할 수 없었다.

“빵.”

“또 빵이에요?”

로벨은 빵을 주문했다. 이번 주 식사담당인 중년 부인이 어린아이 몸통만 한 보리빵을 가져왔다. 보릿가루만 가지고 반죽한 빵이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농노의 빵’이었다.

“이것도 못 먹는 사람이 많아.”

로벨은 고개를 까닥이는 거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잉여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농민과 농노들은 밀이 없어도 보리와 귀리로 배를 채울 수 있지만, 도시 빈민 중에는 빵 한 조각 못 먹는 이가 수두룩했다. 곰팡이 핀 검은 빵이라도 하나 얻으면 죽으로 쑤어서 사흘 동안 아껴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건 빈민들이고요! 영주님은 체통이 있죠. 프란시스 공작님은 일 년 내내 구운 고기만 먹는다는데...”

어린 집사가 한숨을 푹 내쉬자 어린 집사 또래 아이가 ‘히히힛!’ 웃으며 소리쳤다.

“우리 아빠가 까마귀 잡았어요! 우린 까마귀 고기 먹어요!”

“야! 임마!”

로벨은 까마귀 고기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어린 집사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이상하네요? 사냥 허가한 적 없을 텐데요?”

“사, 사냥한 것이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저절로 잡힌 겁니다. 저, 정말입니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올리고 사냥꾼 찰드를 보았다.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는 버릇이지만 죄를 지은 영지민은 편하지 못했다.

“몇 마리?”

“두, 두 마리! 두 마리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로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마리뿐이면 차마 가져갈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집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당장 가져와요! 지금 당장!”

어린 집사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고압적으로 호통쳤다. 사냥꾼 찰드는 쏜살같이 집으로 뛰어가 까마귀 두 마리를 가져왔다. 벌써 피를 빼고 털을 뽑아두었다.

어린 집사는 보리빵 한 덩이와 까마귀 두 마리를 손에 넣고 히히낙락하며 성으로 돌아갔다. 로벨이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고 몽땅 가져오면 어떡해?”

“영주님도 차암! 저 아저씨가 진짜 두 마리만 잡았을 거 같아요? 혼날까봐 두 마리라고 거짓말한 거죠. 아무리 못해도 다섯 마리는 잡았을 걸요? 내기해도 좋아요!”

로벨은 설마, 싶었지만 어린 집사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영지민은 순박하지만, 순수하지는 않아요. 너무 믿지 마세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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