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화 (1/605)

1화. Prologue

Prologue

“하아... 하아...”

바이저(Visor: 안면보호구) 안쪽에서 습기가 차올랐다. 4월 초 완연한 봄 날씨지만, 햇살과 체온으로 달궈진 아멧(Armet: 여닫이 투구) 안쪽은 땀과 입김으로 얼룩졌다. 컨틀렛 너머로 묵직한 마상시합용 랜스(Bourdonasse)의 촉감이 느껴진다.

“로드릭 가문의 젊은 영주! 성 마르틴의 가호를 받는 새까만 다크호스! 로벨 로드릭이 청코너에서 등장했습니다!”

푸르릉- 푸릉-

어릿광대의 말장난에 전 재산을 담보로 빌려온 오베리아 산 전투마가 콧김을 뿜으며 화를 냈다. 땀과 먼지로 푸석푸석해진 말갈기를 쓸어내렸다. ‘기다려. 아직이야.’ 그때 관중석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 와아아아!

“오오! 드디어 나왔습니다! 최강의 말! 최강의 창! 최강의 기사! 사트로 가문의 장자 볼프 사트로! 전 대회 챔피언이 홍코너에서 등장합니다!”

전 챔피언은 두 손을 흔들며 회답한다. 자신감 가득한 표정과 여유가 넘치는 퍼포먼스였다. 환호성이 잦아들자 어린 종자가 총총 걸음으로 다가와 창과 투구를 건네주었다.

“나의 용맹한 기사들이여!”

어린 국왕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옛 신에게 기도하고 축복을 받는 식순을 건너뛰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이 없었다. 기사도, 광대도, 관중도 침묵으로 경의를 표시했다.

“싸워라! 이겨라! 그리고 영광을 쟁취하라!”

북이 떨리고 나팔이 울부짖었다. 경험 많은 전투마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드디어 마지막 시합이 시작되었다.

“Ready!”

어릿광대는 단상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춘다. 북소리도, 나팔 소리도 멈췄다. 요란하게 흔들리던 깃발도 멈췄다. 아기 울음소리만이 유일하게 정적을 깨고 있었다.

“Fight!”

마상대회 깃발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싸울 시간이다.

랜스 손잡이를 끌어올려 갑옷 고리에 건다. 고삐를 느슨하게 풀고 박차를 살짝 움직인다. 첫걸음은 가벼운 것이 좋다. 긴장할 필요 없다. 이기고 싶고, 이겨야 하며, 이길 것이다.

두두... 두두두... 두두두두...!

정적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2차, 3차전을 고민하지 않는다. 한방이면 충분하다. 긴장과 흥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말이 땅을 박차고 다시 내딛는 짧은 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진다. 몸이 붕 뜨는 기분이다. 창끝을 감싼 헝겊 뭉치에서 실오라기 한 가닥이 보인다. 속도감에 수평으로 일어난다. 초점을 바꿔서 헝겊뭉치 너머를 바라본다. 창을 세우고 방패를 끌어올린 챔피언의 모습이 보인다. 헬름(Helm: 통짜 투구) 틈새로 빛나는 눈빛도 보인다.

랜스를 왼쪽으로 당긴다. 좀 더... 좀 더... 좋아. 이 정도면 된다. 이제... 충돌한다...

깡!

챔피언의 랜스를 어깨 보호구로 받아낸다. 묵직한 충격이 어깨에서 정수리까지 전달된다. 저항할 필요 없다. 충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 랜스에 집중한다. 챔피언의 방패가 위로 들리면서 틈이 드러났다. 창끝이 챔피언의 목 보호대를 정확히 찌르고 들어간다. 포플러나무로 만든 속 빈 버드나세(Bourdonasse: 시합용 랜스)가 창끝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부러진 창날이 튕겨 나가고, 산산조각이 난 나무파편이 쏟아져 내린다. 그 속에서 챔피언이 쓰러진다.

‘내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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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은 볼탄 반도 북부에 위치한 작은 영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큰 형과 작은 형이 있고, 아래로는 4살 터울 여동생이 있었다.

시골 영주가 대부분 그러하듯 첫째 아들은 기사수업을 받아 가문을 계승하고, 둘째 아들은 실무를 배워 영지관리와 상단운영을 맡았다. 셋째 아들인 로벨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동방원정을 떠나는 것이다.

어린 로벨은 책을 좋아하고 사색을 즐기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로벨의 친부이자 로드릭 가문의 당주인 필립 로드릭은 아무 말 없이 신학서를 쥐어주었다. 로벨은 신학이 싫지 않았다.

어린 로벨은 12살에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16살까지 목가적인 나날을 보냈다. 훗날 생각하면 어찌 참았는지 모를 만큼 갑갑한 생활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어린 로벨은 장차 목사가 되어 시골 교구에서 일생을 보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큰 형이 기사 종자로 참전한 첫 전투에서 전사하고, 이듬해 작은 형이 원인 모를 전염병을 앓다가 병사했다. 필립 당주는 비통함에 잠긴 채 셋째 아들을 불러들였다.

로벨은 16살 늦은 나이에 기사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독서와 사색을 좋아하는 어린 로벨은 의욕이 없었다. 수도 포클랜드에서 온 검술 선생조차 학자가 될 것을 권유했다. 결국 필립 당주는 기대를 접었다. 그리고 마상시합에서 사고 당해 눈을 감을 때까지 셋째 아들의 무재를 기대하지 않았다. 로벨의 나이 18살 때였다.

로벨은 초라한 장례식을 마치고 로드릭 가문과 영지를 계승했다. 로벨에게 주어진 것은 오래된 성과 삼백 명이 채 안 되는 영지민과 아버지의 찌그러진 갑옷이 전부였다.

로벨은 처음 생활고에 시달렸다. 징수관은 세금을 착복하고, 상단주는 수익을 빼돌렸다. 로벨은 요리사와 하인을 해고했다. 갑옷마저 팔기 위해 내놓았다. 늙은 집사가 필사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면 값비싼 컴포지트 아머(Composite Armor)가 고작 석 달 치 식량에 팔릴 뻔했다. 로벨이 평생 후회할 뻔한 사건이었다.

로벨이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늙은 집사가 병마에 쓰러졌을 때였다. 로벨에게는 마지막 남은 가족이자 하나뿐인 보호자였다. ‘부디 옛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보다 소중했던 집사의 유언이 갑옷을 꺼내 입게 만들었다. 그러나 로벨은 제대로 된 검술선생을 모셔올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몰락한 주정뱅이 기사를 고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재(武才)가 꽃피었다.

로벨은 석 달 만에 스승을 능가하였고, 이후 자기류(流)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적수가 없었다. 소심한 성격 속에 잠들어 있던 천재성이 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다.

로벨은 녹슨 검과 낡은 갑옷으로 프란시스 공작가 주최 토너먼트에서 당당히 우승했다. 이후 볼탄 반도를 순회하면서 연전연승의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22살이 되던 해, 국왕폐하가 지켜보는 그랜드 토너먼트에서 최종 우승하여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 직위를 차지했다.

“...그런 분이 뭐하는 겁니까!”

“으응?”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잘 다듬은 흑단처럼 윤이 나는 까만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무슨 까닭인지 귀밑에 겨우 닿을 만큼 짧게 잘려져 있었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공작부인 백작부인이 천금을 주고 사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꼴로 돌아다니면 어떡해요?”

“왜? 아무도 없잖아?”

소녀는 머리를 긁적이고 일어났다. 고운 얼굴과 달리 키가 대단히 컸다. 5.7피트? 5.8피트? 굽 있은 부츠를 신으면 6피트도 될 듯 했다. 셔츠 사이로 보이는 하복부와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가 눈길을 끌었다. 지방 한 점 없이 꽉 찬 근육이었다.

“오늘 점심에 알현행사가 있다고요! 들키면 어쩌려고요?”

“나도 알고 있어. 소리 좀 치지 마.”

소녀는 어린 집사 손에 이끌려서 침실로 돌아갔다. 잠시 뒤 품이 넉넉한 우플랑드(houppelande: 소매가 긴 귀족풍 외투)를 입고, 브레(Braies: 남성용 바지)와 쇼오스(Chausses: 종아리 위로 올라오는 긴 양말)를 착용하고, 주둥이가 뾰족한 가죽부츠를 신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뒤로 바짝 묶고 허리춤에 대거(dagger: 단검) 한 자루를 차자 그럴듯한 남자처럼 보였다. 어린 집사가 앞뒤로 돌아보고 만족했다.

“아주 좋아요! 누가 봐도 서(Sir) 로벨 로드릭이에요!”

“누가 안 봐도 난 로벨 로드릭이야.”

“아참! 그렇죠.”

무적의 챔피언 로벨 로드릭의 무용을 찬양하는 음유시인은 많았다. 그러나 로벨의 어린 여동생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은 아무도 없었다. 열여덟 살 소녀가 그랜드 챔피언이라는 이야기보다 칼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샌님 신학도가 그랜드 챔피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더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래전 잊혀진 로드릭 가문의 막내딸이 가난과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셋째 오라비 행세를 하며, 기사가 되고, 영주가 되고, 더 나아가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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