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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51화 (마지막 회) (151/151)

151화 마지막 회

“강유라? 어쩐 일이야?”

“섭섭하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보챌 때는 언제고, 그렇게 차갑게 대하면 나 상처받아.”

강유라가 생글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필웅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저기, 나 지금은 약속이 있는데….”

“내가 그걸 신경 쓰는 것 같아? 앉아.”

필웅은 뭐라 하려다가, 별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고 한숨을 푹 쉬면서 자리에 앉았다.

“짧게 끝내줬으면 좋겠군. 삼영의 예비 회장님.”

“오호호! 사람 기분 좋게 할 줄 아네? 뭐, 좋아. 기분이다. 특별히 짧게 끝내 주지.”

강유라는 말을 꺼내 놓고도 한동안 그저 싱글싱글 웃으며 필웅을 바라보기만 했다.

필웅은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다가, 시계를 바라보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할 거 있으면 빨리 해. 나 배고파.”

“조필웅.”

갑자기 강유라가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도왔으니, 너도 당연히 내게 대가를 치러야겠지?”

“무슨 소리야?”

“멍청이. 설마 내가 정말로 네 알량한 정의론에 넘어가서 그냥 아무 대가 없이 널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강유라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가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럼?”

“내가 날 도왔듯이, 너도 날 도와줘야지. 그게 ‘정의’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음… 뭐.”

강유라는 대강 대답하더니,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결심했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옷 벗어.”

필웅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 지금? 여기서?”

강유라는 뭔 소리냐는 듯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순간 얼굴을 붉히며 손에 잡힌 종이컵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이 미친 변태 새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옷을 벗으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럼.”

필웅은 종이컵에 물이 들어있지 않다는 데 내심 안도하면서 종이컵을 집어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 왜. 아니, 옷을 벗으라고 하면, 어? 당연히 그게 그런 뜻이라고는….”

“검사를 그만두라는 얘기야?”

필웅이 비로소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강유라는 잠시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지고는 다시 예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맞아.”

“왜?”

“왜냐니?”

“아니… 내가 왜 검사를 그만둬야 하냐고.”

“내 빚, 안 갚을 거야?”

필웅은 한숨을 쉬고는 두 손을 올려 보였다.

“네가 도와준 건 당연히 감사하고 있고, 기회가 되면 갚을 거야.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아? 검사를 그만두면 난 뭘 먹고 살라고? 네가 먹여 살릴 것도 아니면서…”

“내가 먹여 살려 줄게.”

강유라가 필웅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필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강유라. 물론 내가 매력적인 남편감이긴 하지만 그런 식의 갑작스럽고 무드 없는 고백은 곤란해. 적어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에서….”

강유라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가, 어이없어하면서 옆에 놓인 재떨이를 만지작거렸다.

담배도 피지 않는 시연이 그냥 예쁘다며 사 온 재떨이였다.

필웅은 강유라가 그 재떨이를 자신에게 집어 던지는 것과 아끼는 공예품(?)이 깨져 길길이 날뛸 시연의 모습 중 어느 쪽이 더 공포스러운지 잠시 고민했다.

“후. 머리통을 깨버리려다가 재떨이가 예뻐서 참았다. 그게 아니고. 내 밑에서 일해.”

“싫어.”

“삼영의 법무팀장으로 와 달라는 거야. 바보야! 왜 싫어?”

“네 따까리나 하라는 거잖아? 아직 난 검사로서 할 일이 많아. 거절하겠어.”

“돈 많이 줄 건데?”

“필요 없어.”

“내가 억지로 끌고 가면?”

“파업할 거야.”

“후. 좋아.”

강유라는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강유라를 필웅은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강유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왜?”

“아니… 더 안 잡아?”

“잡혀 줄 거야?”

“아니. 더 멋진 거절의 말을 들려주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강유라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푹푹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억지로 끌고 간다고 네가 열심히 일할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니야. 네가 흔들릴 때 언제든 와서 뒤흔들어 놓을 거야.”

“유감이군. 그럴 일은 없는데.”

“너무 확신하지 말라고.”

강유라는 차갑게 웃으며 사무실을 떠났다.

필웅은 잠시 앉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 곱씹어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 장경 일행이 모여 있는 고기집으로 향했다.

* * *

“취한다.”

“먹은 것도 없으면서 무슨.”

“야, 네가 오기 전까지 내가 얼마나 마신 줄 알아?”

“겨우 10분 늦은 거거든…”

“10분이면, 어? 소주를! 몇 잔을!”

“됐고. 조용히 좀 해봐. 경치 감상 좀 하게.”

“경치?”

졸린 듯 필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시연이 피식 웃으며 필웅이 바라보고 있는 ‘경치’를 바라보았다.

이미 모두 헐린 집들 뿐이었다.

거의 괴기스러울 정도로 스산한 광경이었다.

술에 취한 필웅이 다짜고짜 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시연은 필웅을 무작정 따라왔다.

그런 필웅이 향한 곳은 이미 재건축으로 다 헐려 뼈대만 남은 동네였다.

술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필웅과 시연은 예전 필웅이 살던 집에 와 있었다.

이미 그것은 집이라고 하기도 뭐한, 기둥과 벽만 남은 어떤 구조물이었다.

“이런 곳도 금방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북적이겠지.”

“그렇겠지.”

“이럴 때 집 사놔.”

“집값 떨어진다던데?”

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진난만하게 묻자, 필웅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거다.”

“뭐래. 아무튼 오랜만에 와보니 좋네. 오. 저기가 서춘주가 총 쏜 곳이지?”

“그러게.”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그지?”

“응.”

필웅은 짧게 대답하고는 걸터앉은 돌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형사님이랑 다혜 씨는?”

“애 어머님한테 맡기고 나와서 일찍 들어가셔야 한대. 그러고 보니 지찬 씨 되게 기운이 없어 보이더라.”

“그, 글쎄? 왜 그럴까….”

“희주는 잘 들어갔을까?”

“우리보다 더 똑똑한 애야. 잘 들어갔겠지. 들어가면 문자 준다고 했어.”

“그렇구나….”

시연도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다시 필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필웅아.”

“응?”

“무슨 생각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그건 내가 한 말이잖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필웅은 처음 그가 필웅으로 다시 태어난 날을 되새기고 있었다.

처음 필웅이 된 날, 그의 정신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변호사 나영전이었다.

그러던 그가 돌고 돌아 이 자리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겉으로도 그리고 속으로도 검사 조필웅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필웅은, 예전의 자신이 완전히 쓸려 내려갔다는 데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절대로 예전의 나영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강유라의 제의를 물리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녀의 밑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건 당연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삼영그룹을 통솔하는 법무팀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만약 예전의 나영전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수락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나영전이 아니었다.

‘나는 검사, 조필웅이지.’

그리고 검사 조필웅은 아직 할 일이 많았다.

강무완과 강중민은 법정구속되었다.

그렇지만 이영규, 이규필 그리고 4원로를 비롯한 교단의 잔당들까지 아직도 법의 철퇴를 피해 사회의 음지에서 약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들이 이 사회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들에게 모두 정당한 대가가 돌아갈 때까지 필웅은 쉬지 않을 생각이었다.

“필웅아.”

“응?”

“같이 하자.”

필웅은 순간 시연이 독심술이라도 쓴 건가 하고 놀라 시연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시연은 여전히 필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기에, 둘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시연은 놀라 그의 어깨에서 얼굴을 뗐다.

필웅도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크흠, 어… 강유라 만났지?”

필웅이 다시 놀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아까 나올 때 사실 강유라 봤어. 가로막을까 했는데… 어쨌든 이번 재판에서 많이 도와줬잖아. 얘기 한마디는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 뭐, 사실 내가 뜯어말린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애도 아니고.”

필웅은 속으로 만약 강유라가 시연이 아끼던 재떨이를 깨 먹을 뻔했다는 걸 알면 시연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잠시 상상했다.

“강유라가 그냥 놀러 온 건 아닐 거고. 뭔가 제안을 했겠지.”

“맞아.”

“그리고 넌 어떻게든 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고 있을 거고.”

“그것도 맞아.”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함께하자.”

시연이 배시시 웃으며 힘있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네가 결정한 거라면, 나도 도울게. 네가 뭘 하든 그냥 따라가겠다는 게 아니야. 난 그냥… 앞으로도 네가 가는 길을 돕고 싶어.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너를 따라왔었지. 이번에는 아니야. 네가 옳은 결정을 내렸다면 함께 하겠지만, 네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면 옆에서 널 뜯어 말릴 거야. 그게 내가 생각하는 ‘함께’야.”

시연이 자기의 말에 쑥스러운 듯 점점 목소리를 줄여갔다.

필웅은 그녀의 말에, 아무 말 없이 크게 미소를 지었다.

겸연쩍어하던 시연도, 필웅의 얼굴을 보고는 마주 미소 지어 주었다.

사방은 적막했다.

그들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고양이조차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라도 들려올 것만 같았다.

시연은 지루한지 발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낮은 돌담에 앉은 그녀의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필웅은 입을 열었다.

“시연아….”

“응.”

“고마워. 지금까지 함께해 줘서, 그리고 살아 있어 줘서.”

“무슨 소리야? 내가 죽기라도 했을 것처럼.”

시연이 볼멘소리를 하자, 필웅은 씩 웃었다.

“그렇네. 미안.”

“아무튼 그래서, 강유라가 뭐라고 했어?”

“옷 벗으래.”

“그래, 옷을… 뭐!?”

시연이 벌떡 일어서 눈을 크게 떴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녀의 눈에 선 핏발이 보일 지경이었다.

“옷을… 후. 옷을 벗었어? 그래서?!”

“진정해. 그런 뜻이 아니야. 그냥 자기가 먹여 살리겠대.”

“뭐?!”

시연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필웅은 크게 하하 웃었다.

그러자 시연은 더 길길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필웅은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조용한 공터에 시연이 화를 내는 소리와 필웅의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 * *

“삼영 계열사인 삼영증권에서 조직적으로 직원 사찰을 행해 왔다는 내역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익명의 관계자에 따르면, 삼영그룹은 전사적으로 소위 요주의 인물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회장 대행인 강유라는 일상적인 조직 관리 차원의 업무였을 뿐이라는 입장을 밝혀 더욱 논란을….”

필웅은 TV를 껐다.

그리고는 검사복을 챙겨 들었다.

오늘도 공소장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누군가를 죽여서, 어떤 이는 누군가를 속여서, 어떤 이는 누군가를 강간해서, 어떤 이는 누군가를 이유 없이 모욕해서….

죄의 종류는 천태만상이었지만, 필웅에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누군가가 진실을 밝혀내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한 발 내딛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

필웅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오로지 한 곳으로 향하는 기나긴 복도가,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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