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카운터 펀치
“뭐라구요? 아니, 음. 어,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백산은 이번 재판 들어 처음으로 허둥대며 당황하고 있었다.
강유라의 표정이 도도하고 냉혹하게 바뀌었다.
“바로 앞에 서 있었으면서 집중을 안 하시나 보군요. 조필웅 검사는 삼영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고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유일한 사람입니다. 이 법정에 있는 어떤 사람들과는 다르게요.”
필웅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필웅은 강유라가 이영규를 만나게 해 주겠다며 전화를 걸어온 날을 떠올렸다.
필웅은 강유라가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목소리에서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필웅은 강유라를 꽤 오랜 시간 동안 봐왔고, 그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왜 갈등하는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고민 끝에 그냥 전화를 끊으려는 그녀를 필웅은 제지했다.
“잠깐만, 전화 끊지 말아봐.”
“뭔데?”
“이영규. 강무완이 만나게 해 준다고 하던가? 아니면 강중민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바보 취급하지 마. 넌 이미 삼영에 연줄이 다 끊어졌다고 했어. 그런데도 네가 이영규를 만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는 건 한 가지로밖에 해석이 안 되지. 네가 타협한 거야.”
“할아버지야.”
“너라면 그냥 날 잡아 드쇼~ 하고 걸어 들어가진 않았겠지. 넌 그 대가로 뭘 얻지?”
“삼영의 승계권.”
필웅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쥔 손을 고쳐잡았다.
“강유라.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강준수는 병신이야. 가능한 대안은 나밖에 없어.”
“정말 강무완이나 강중민이, 자기들이 바라지도 않는데 이미 자기들한테 반기를 든 너한테 후계를 맡길 거라고 생각해?
강준수가 마땅치 않다면 강무완은 차라리 자기가 마음에 드는 양자를 들이고 말걸. 혈육이라는 게 정말 그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기는 해? 혈육인 너를 잡아서 가둬두는 사람들인데?”
강유라는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필웅이 일부러 잠깐 뜸을 두고 무겁게 덧붙인 마지막 말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필웅은 잠시 침묵하고 있는 강유라에게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만약 네가 삼영을 지배하게 된다면, 강무완, 강중민과 그 똘마니들에게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 줄 생각이야?”
“아니.”
“그렇겠지. 나조차도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을 그 인간들이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해?”
“하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강유라가 마침내 긴 한숨과 함께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삼영으로 돌아가.”
“뭐?”
“삼영으로 돌아가라고. 돌아가서 그들의 곁에 서 있어. 그들은 아마 너를 재판에서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할 거야. 사실상 자기들이 아는 사람 중 나와 가장 붙어 있던 게 너라고 생각할 테니까. 너를 사용해서 내 신뢰도를 뒤흔들려고 하겠지. 증인으로 부르려나? 아무튼, 네가 그들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는 건 확실해.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 시점에 너와 거래를 시도하지는 않았겠지.”
강유라는 필웅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듣고 있어?”
“그래.”
“대답은?”
강유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에서조차 진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 나왔다. 필웅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쉽지 않아. 개 같은, 잘 생각해봐. 일개 검사 나부랭이와 대한민국 최대의 재벌이야. 정말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난 이길 거야.”
“어떻게 확신해?”
“정의는 승리하니까.”
강유라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결정됐네. 난 멍청이랑은 일 안 해.”
“왜 멍청이라는 거지?”
“지금 어린이 만화영화에 나올 것 같은 대사로 내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건 명대사 같은 게 아니야. 철학적이고 절대적인 명제지.”
“증명해 봐.”
“정의는 꺾이고 때로 부러지지. 하지만 사람들이 믿는 정의가 결과적으로 승리하지 않는다면, 이미 인간은 몇천 년 전에 멸망했을걸.
결과적으로 옳은 일이 승리한다는 믿음은 이 사회를 지탱해 주는 본질이야. 사회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념이 없다면 이 사회는 유지될 수 없어.”
“추상적인 이야기네.”
“현실적인 이야기야… 내가 경험한 거니까.”
“무슨 뜻이야?”
필웅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입술을 뗐다.
“나는 예전에 내 기술로 사람들을 등쳐먹던 악당이었어.”
“호오? 조필웅 검사님이?”
“그때의 나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었지. 하지만 어떤 계기로 나는 변했어. 예전의 나는 예전의 나 같은 사람이 사회를 굴리고 있다고 생각했어. 돈도 명예도 권력도 모두 탐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사회를 굴리는 건 지금 나 같은 사람이야. 말했잖아? 이 세계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 못한다면, 살아갈 희망도 이유도 없을 거야. 어차피 악이 승리할 건데 뭐하러 열심히 살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대신 강도짓을 하고, 뒷돈을 받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죽이면 되는데.”
“그래서, 네가 그 믿음을 지켜 주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삼영의 직원들도 속으로는 그 믿음을 안고 살걸?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강유라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생각 좀 해 보겠어.”
“좋아. 대신 네가 내 말을 믿는다면, 신호를 보내줘.”
강유라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물었다.
“어떻게?”
“내일 그 자리에 나와서, 내 뺨을 세게 쳐.”
“뭐?”
“일거양득이지. 확실히 내가 알 수 있는 신호이고, 나머지 인간들에게는 네가 나와 돌아섰다는 신호를 줄 수 있으니까.”
“좋아. 알았어.”
강유라는 필웅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후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고민의 순간들도 떠올렸다.
답은 사실 어렵지 않았다.
말 그대로 좌천당해 지방을 전전하는 일개 검사와 대한민국 최대의 재벌 사이에서 누굴 고를지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게 강유라로서는 너무나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상식적으로는 필웅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워섬길 때 코웃음을 치면서 전화를 끊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바로 끊어 버리는 대신, 이어진 필웅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밤새도록 고민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에 빠진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강준수도 안 할 병신 같은 고민을.’
강유라는 스스로에게 화도 내 보고, 필웅의 말을 잊으려고도 애써 보았다.
하지만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 필웅의 대책 없는 낙관론에 설득당했다는 사실을.
‘정의가 실현된다는 걸 믿어야 사회가 굴러간다고? 진짜 어이없네.’
강유라는 피식피식 웃으면서도, 왜 자신이 그 소릴 그냥 허튼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삼영을 지배하기 위해, 이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그녀가 해왔던 일들.
그저 처음엔 권좌에 복귀하고 싶다는 욕구 하나로 필웅과 협력했던 일.
영산을 떠나는 필웅 일행의 뒤를 쫓다가, 필웅 일행이 곤경에 처하자 자기도 모르게 트럭을 받아 버렸던 일.
수없이 위기에 빠지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스스로의 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필웅을 비웃으면서도 내심 혀를 내둘렀던 일.
강유라는 웃으며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을 모두에게 보여 주기로 했다.
삼영그룹의 후계자가 아닌 강유라로서의 결심을.
강유라는 품에서 숨겨 왔던 CD를 한 장 꺼냈다.
“이 자료는 삼영그룹 내부에서 신약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계획을 담은 비밀 이사회 회의록입니다. 강중민 피고인과 강무완 피고인이 한 발언도 모두 기록되어 있죠.
또한, 강중민 피고인은 과거 조필웅 검사와 만난 자리에서도 신약을 이용해 사람들을 멋대로 조종하겠다고 자기 입으로 밝힌 사실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이 자리에서 그 대화도 제가 다시 재연해 보이죠.”
어디선가 피가 끓는 듯한 크으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중민에게서 난 소리였다. 노인은 핏발 선 눈을 한 채 지팡이를 부숴버릴 듯 꽉 쥐고 있었다.
강유라는 그를 일별하고 백산이 제지할 틈도 없이 증언을 이어갔다.
“게다가 강중민 피고인과 강무완 피고인은 조직 경영에 있어 자신들의 불법적인 지시를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를 1개월 동안 감금한 사실도 있습니다. 감금죄라고 하나요? 아무튼 검찰 측에서 죄명을 하나 더 추가해 줬으면 좋겠네요.”
“이 개 같은 년이!”
“모욕죄도 추가해 주세요. 이상입니다.”
강중민은 거의 기절할 듯이 분노한 표정으로 일어섰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강유라는 그런 그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음. 검찰 측, 반대신문 하시죠.”
“이미 변호인 측에서 훌륭하게 신문을 해 주셔서 검찰 측은 신문할 사항이 없습니다.”
필웅이 대답하자 백산 역시 거의 눈을 뒤집을 듯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필웅은 감사의 뜻으로 백산이 그랬듯 과장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해 보였다.
증인석에서 강유라가 내려와 필웅을 스쳐 지나갔다. 필웅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고맙긴. 삼영은 이제 내 거야.”
필웅은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싱긋 웃으며 이미 재판정을 떠나고 있었다.
‘너만 이익 보는 거래를 하게 놔두진 않지.’
강유라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다는 표정으로 산뜻하게 재판정을 떠났다.
그 후 이어진 재판에서, 필웅은 연달아 증거와 증인을 제시했다.
때맞춰 도착한 지찬의 신약 효능에 대한 정확한 검사 결과.
희주가 생생한 기억력으로 듣고 기억해 낸, 교단이 벌인 염전 노예 행각과 다단계 사기 사건의 피해자들의 증언들.
모두가 필웅이 재판에 나가 있는 동안, 시연이 조직해 놓은 것들이었다.
꼼꼼한 시연은 아주 작은 증거, 필요 없어 보이는 증언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처음엔 자기와 관련이 없다고 빡빡 우기던 교단의 신도들도 시연의 끈질긴 신문 끝에 자신이 교단에 몸담았을 때 했던 일들을 자백했다. 시연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증언을 마치고 나오는 그들의 손에 그들을 피고인으로 적은 공소장을 들려주었다.
연달아 쏟아지는 증거와 증인 앞에 변호인인 백산도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마지막 기일이 되자 백산이 사임하게 해 달라며 애걸복걸했다는 후문이 들려왔지만, 진위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고기일.
결과는 전부 유죄였다.
만일 재판에 승리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모습이었다.
필웅은 완전히 석고상처럼 굳어 버린 강무완과 강중민의 표정을 보며 배부른 표정을 지었다.
‘이겼어…마침내!’
강준수의 마약 사건, 이시원의 부당해고 사건, 삼영백화점 사건, 그리고 마침내 교단과 삼영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음모까지.
어떤 것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의는 결과적으로 승리하는 법이지.’
필웅은 강유라를 설득하기 위해 그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시연이었다.
시연은 벌떡 일어서 그를 꼭 안으며 외쳤다.
“축하해!”
“축하는 무슨.”
필웅은 시연을 마주 안다가, 자리에 둘러선 다른 사람들을 보고 겸연쩍어하며 팔을 풀었다.
장경과 다혜, 학교를 땡땡이치고 온 듯한 희주, 그리고 뭔가 불편한 표정의 지찬이었다.
“어, 음. 다들 웬일이세요?”
“웬일이라뇨! 검사님, 오늘에야말로 거하게 삼겹살… 아니지! 소고기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님까!”
장경이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다가와 필웅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켁, 형사님, 숨, 숨 막혀요….”
“정말 다들 수고 많으셨슴다! 오늘은 검사님이 사실 테니 다들 가시죠!”
“예? 아니 그걸 왜 형사님이….”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맙시다! 좀생이도 아니고!”
“뭐요?!”
필웅의 벙찐 표정을 보며 장경은 허허 웃으며 다혜와 지찬을 재촉하며 사무실을 나갔다.
‘이거 뭔, 태풍 같구만.’
장경이 먼저 사람들을 이끌고 떠나자, 필웅은 허탈하게 웃으며 자료를 정리하고는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 채비를 했다.
-벌컥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아, 금방 따라갈게요.”
“어딜 따라와?”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에 필웅은 그제서야 비로소 놀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