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삼영의 공격
필웅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었다.
그저 압수가 당연히 잘 이뤄졌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의 실책이었다.
압수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자칫 조금만 절차가 잘못되어도 압수수색 절차가 불법이라고 판정될 수 있었다.
만약 담당자가 자리에 모두 있었다면 그들에게 영장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압수를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았던 장경의 말로는, 담당자들이 계속해서 자리를 바꾸면서 자리를 비우기도 해서 그들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제시를 하려고 해도 애초에 자리에 있지를 않았는데 이걸 가지고 트집을 잡다니….’
하지만 뒤늦게 그들의 속셈을 깨달아 봐도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담당자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담당자들은 점심시간 중이어서 잠시 자리를 비운 거고, 곧 자리로 복귀했다던데요? 재판장님, 첨부된 증거자료 10면을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날 창고 구역 담당자의 근무점검표입니다. 검찰 측은 그냥 증거를 얻기 위해서라면 잠시 기다리느니 불법으로 증거를 압수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지요?”
백산이 히죽히죽 웃으며 필웅을 돌아보았다.
필웅은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지만,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판사는 필웅이 제출한 압수수색 결과 보고서를 천천히 읽었다.
판사가 보고서를 다 읽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필웅은 50년은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필웅이 조바심을 내기 시작할 때쯤, 판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변호인 측이 제출한 증언과 증거대로, 아무래도 검찰 측에서 제출한 증거물을 보관하는 담당자는 따로 있었던 모양이군요.
변호인 측 말대로 불법인 압수수색으로 얻은 증거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증거는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판사님…!”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속행하겠습니다.”
판사는 건조하게 필웅의 말을 끊고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필웅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가장 중요한 증거가 부정되다니. 이걸 어떻게 만회해야 하지?’
정말 기초적인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재판이 턱없이 뒤집히는 것은 바로 그런 기초적인 실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증거를 조합해 말이 되는 주장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판은 어디까지나 절차였다.
그 절차를 위반하는 경우 아무리 핵심적인 증거를 찾아도 쓸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료를 정리해서 자리를 떠나려던 백산이,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말없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필웅의 모습을 발견했다.
백산은 미소를 띠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이런, 검사님.”
“?”
“사법연수원에서 공부를 열심히 안 하셨나 봅니다? 이건 정말 기초인 것을. 언제 저희 법무법인에서 개최하는 증거법 강연회라도 오시죠. 20년 경력의 전직 검사님들이 강연하시니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백산은 나가면서 필웅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까지 했다.
필웅은 반응할 기운도 없어 그냥 그를 무시해 버렸다.
백산은 껄껄 웃으며 재판정을 떠났다.
필웅이 현관으로 나서자, 기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검사님!”
“조필웅 검사님! 현재 재판 진행 경과를 말씀해 주시죠!”
“검사님, 오후에는 강무완 사장님도 출석할 예정이라는데, 사실입니까?”
필웅은 무시하고 지나가려다가 기자의 마지막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강무완 피고인이 온다고요?”
“예, 방금 삼영그룹에서 발표한 바로는, 오늘이 사실상 마지막 기일이어서 삼영 그룹의 총수 일가가 모두 출석할 예정이라던데요!”
필웅으로서는 들은 바가 없었기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답변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첫 번째 기일을 빼고는, 그동안 이어졌던 수많은 기일에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기일에 출석하겠다는 건지 필웅은 의아했다.
하지 않던 짓을 하는 걸 보니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뭐, 일단은 부딪혀 봐야지.’
필웅은 깊이 고민해 봤자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는 잡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오후.
재판정에는 정말로 강무완과 강중민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피고인의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필웅은 애써 그들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사실상 마지막 기일이라니, 무슨 뜻이지?’
아직 기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증거도 많았고, 검토될 논점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까의 기자는 삼영에서 ‘사실상 마지막 기일’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삼영에서는 이번 기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필웅으로서는 삼영이 어째서 그렇게 판단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기일 이어서 진행하시죠. 변호인 측, 추가 서면을 제출했던데요.”
판사가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일단 요지만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죠.”
“알겠습니다.”
백산이 위풍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웅은 그런 그를 보며 법정보다는 무대가 더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쇼맨십이 있는 변호인이 그렇지 않은 변호인보다 설득력이 있는 경우가 많기는 했다. 하지만 필웅으로서는 그러잖아도 만만찮은 상대인데 과도하게 쇼맨십을 보이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검찰 측은, 삼영이 교단과 함께 제조한 소위 약품 H를 통해 사람들을 현혹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슨 공상과학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게 과연 죄가 됩니까?”
필웅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연히 불법 약물을 사용한 것이니 약사법 위반이죠.”
“그런 마이너한 이슈는 잠시 접어 두고.”
필웅은 어이없어하며 혀를 쯧 찼다.
‘마이너한 이슈?’
어쨌든 벌금이나 과태료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면 그들에게는 ‘메이저’한 이슈가 아니었다. 그러니 저런 태도가 나올 수 있는 것이리라.
“그 약물의 효능이라는 게 결국 좀 강력한 안정제 같은 거 아닙니까? 뭐 약사법 위반일 수야 있다고 쳐도, 오히려 그런 훌륭한 효능을 가진 약품을 자체 기술로 개발했으니 오히려 사회에 기여한 게 아니냐는 겁니다.”
“좀 강력한 안정제라니, 마약도 좀 강력한 디저트 같은 거라는 말 같군요. 설령 그게 안정제라고 하더라도 그 약품을 어디 사회복지재단에라도 기부할 생각이라면 기꺼이 동의하겠습니다.”
필웅이 비웃음을 한껏 담아 대답했다.
그때, 백산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면 어쩔 겁니까?”
“예?”
“삼영은 이미 그 신약을 어떻게 이용하고 배포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 두었습니다. 이에 관한 증인을 신청해 두었습니다.”
“무슨…….”
백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이가 너무 부자연스럽게 하얘서, 필웅은 백산이 자기 치아의 색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잠시 떠올렸다.
필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산의 미소는 더욱 커졌다.
백산이 당당하게 책상을 탕 치면서 호쾌하게 말했다.
“피고인 측은 강무완 피고인의 딸, 강유라를 증인으로 신청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증인석으로 걸어 나오는 강유라에게 쏠렸다.
강유라가 담담하게 증인석으로 걸어가 섰다. 판사가 강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증인. 참고로 증인은 직업상 비밀에 속하는 사항일 경우에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강유라는 건조하게 대답하고는, 똑같이 건조한 목소리로 선서문을 낭독했다.
“증인은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피고인 측, 먼저 신문하세요.”
판사의 지시에 따라 백산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증인, 증인은 삼영그룹 강무완 부회장의 딸이자, 삼영의 경영에 깊게 관여한 사람이지요?”
“맞습니다.”
필웅은 불안한 눈길로 강유라와 백산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백산은 필웅의 불안한 모습에 더욱 힘을 얻은 듯, 힘찬 목소리로 신문을 이어갔다.
“증인은 최근 삼영그룹의 경영에서 물러나 잠시 모습을 숨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지요?”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했습니다.”
“그룹 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삼영을 떠나서도 여전히 삼영의 소식은 잘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한 것뿐이에요.”
강유라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백산의 질문에 술술 대답했다.
물론 아무리 피고인이 신청한 증인이라도, 증인과 피고인이 서로 짜고 문답을 맞추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증인과 피고인이 말을 맞춰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는 한 검사가 함부로 문답을 짜온 게 아니냐고 지적하기는 어려웠다.
필웅은 그저 묵묵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백산이 다시 예의 이를 드러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조필웅 검사와는 본래부터 알던 사이였습니까?”
순간 강유라의 눈썹이 꿈틀했다. 짜 놨던 질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강유라는 살짝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백산을 쏘아보았지만, 백산은 그저 싱글벙글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유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죠?”
“과거 사건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무슨 사건인가요?”
“삼영의 계열사들과 관련된 사건들이었습니다.”
필웅은 그제서야 백산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백산은 과거 필웅이 집요하게 삼영을 수사했던 것을 걸고넘어지려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검사가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필웅 검사가 삼영 관련 사건들을 많이 다뤘나 보군요?”
“예. 상당히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한민국에 다른 기업들도 많은데 왜 삼영만 그렇게 집요하게 조사한 거죠?”
백산은 필웅이 삼영에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고 믿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판사는 없겠지만, 이 재판은 이미 여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언론의 보도로 이미지가 많이 실추된 상황이었다. 여기에 사건을 진행 중인 검사가 사실은 삼영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으로 사건을 주도했다고 하면 이를 곱게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영의 영향을 받는 일부 언론이라면, 자극적으로 헤드라인을 쓰기 좋은 소재였다.
“그건…….”
강유라가 잠시 망설이며 필웅 쪽을 쳐다보았다.
백산은 그런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하듯 서서히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강유라가 마침내 결심한 듯 백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 생각에, 그건….”
모두가 정적에 잠겨 강유라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산은 유라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며 한껏 기대감에 부푼 미소를 띄고 있었다.
강유라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삼영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겠죠.”
백산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