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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48화 (148/151)

148화 증거의 싸움

필웅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공판정에서 나왔다.

지금 막 강무완과 강중민의 공판기일이 종료된 참이었다.

오늘도 백산은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억지를 부렸다.

“정당행위라구요?”

“그렇습니다!”

백웅이 또다시 예의 그 연극적인 말투로 변론을 이어갔다.

“물론 피고인은 검찰 측이 주장하는 범죄사실에 대해 부인하고 있습니다…만! 설령 만에 하나 그러한 범죄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당행위이니 죄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대체 기업을 마음대로 조종해서 불법 약물을 수입하고 판매하는 게 어떻게 해서 정당행위가 되는지 알려 주겠습니까?”

필웅이 이를 갈면서 백산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건 명백히 시간 끌기 작전이었다.

시간을 끌면서 공판이 길어질수록 언론은 점점 더 사건에 흥미를 잃을 것이다.

백산의 연극적인 말투와 행동도 분명 불필요하게 말을 길게 끌기 위한 수단일 것이 분명했다.

“기업이란 복잡한 조직입니다. 무엇이 기업에 도움이 되는 결정인지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알기 어렵죠.

지금 언뜻 봐서는 교단과 업체들의 거래가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 총수의 입장에서는 이 복잡미묘한 거래의 결과가 눈에 보이는 법이죠.”

“삼영이 이런 사이비 단체를 지원하는 게 대체 그룹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까?”

“사이비 단체라뇨? 교단은 엄연히 종교단체로 등록된 조직입니다. 검찰 측은 이상한 편견을 갖고 있군요.”

필웅은 입술을 깨물었다.

교단은 실제로 어쨌든 종교단체로 등록은 되어 있었다. 즉, 교리가 아무리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종교단체인 셈이었다.

“아무튼, 요지는 그겁니다. 검찰 측에서 생각하는 것 같이 기업의 경영이라는 게 그렇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언뜻 봐서는 기업에게 도움될 게 없는 행위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그런 식으로 따지면 기업의 총수가 기업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든 나중에 기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다 괜찮다는 겁니까?”

“제 말은 제3자가 쉽게 판단할 영역이 아니라는 겁니다.”

필웅이 판사에게 항의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판사님, 이건 누가 봐도 억지입니다. 이건 변론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판사님 잠시 생각하다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피고인으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어수단을 주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검사, 주장이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판단합니다.”

백웅은 판사에게 무한한 감사의 눈빛을 보냈고, 판사는 크흠 하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필웅은 언제나 그랬듯 재판정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물론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명백히 증거가 있는데도 이를 판사가 아무 이유 없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사실상 변호인이 무슨 짓을 해도 판사는 제지할 것 같지 않았다.

변론에 도움이 된다고만 한다면 춤을 춰도 아랑곳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다음 기일에 속행하겠습니다.”

기일이 끝나고 필웅은 초조하게 복도를 걸어갔다.

아직 그의 근무지는 영산지청이었고 처음 사건이 시작된 곳도 영산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사건이 서울남부지방법원으로 옮겨져 와 있었다.

아마도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영산까지 왕복하기 어려워 수를 쓴 것처럼 보였지만, 필웅으로서도 딱히 불리한 일은 아니었다.

“엇, 검사님.”

복도 저편에서 장경이 나타났다.

“말씀하신 거… 확보했습니다.”

“정말입니까?”

“양이 많지는 않더군요. 그래도 몰아붙일 수 있는 증거로는 충분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필웅은 장경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이거면 해볼 만하겠어!’

필웅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장경이 내민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다음 기일에서 백산의 표정이 어떨지 기대되는군.’

“그런데 저, 재판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장경이 잠시 망설이다가 넌지시 물었다.

“재판이요? 생각처럼 쉽지는 않더군요.”

“그렇슴까? 제가 나가서 증언이라도 할까요?”

장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필웅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생각해 보죠. 물론 사건을 조사한 경찰의 증언을 증거로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경찰과 검찰은 한 팀이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점 때문에 의외의 반격을 허용할 수도 있구요.”

“아, 그렇습니까? 허 참, 재판이란 게 참 어렵네요. 아니 사건을 조사한 경찰이 제일 잘 알지 누가 사건을 더 잘 알 수 있단 말임까?”

금방 흥분해 버린 장경이 씩씩거리며 재판절차에 대한 평소의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필웅은 그를 잘 달래 일단 돌려보낸 후 다음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검사님.”

그때, 이번에는 복도 저편에서 강무완이 나타났다.

필웅은 짜증스러워하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가 서 있던 복도는 막다른 길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필웅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강무완 피고인.”

“오랜만이오.”

“뭐가 오랜만입니까? 재판 첫날에 봤잖아요.”

“이렇게 사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게 오랜만이란 말이오.”

필웅이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말씀 나와서 말인데, 피고인과 검사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전 이만.”

필웅은 그대로 그를 지나쳐서 그의 옆으로 지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옆으로 지나가려는 그의 필을 강무완이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삼영 본사를 압수수색하셨다고 들었소만.”

필웅은 그의 팔을 떨쳐내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소식은 빨라서 좋군요.”

강무완은 필웅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도발적으로 응수했다.

“무슨 사유인지 물어도 되겠소?”

“다음 기일 때 들으실 수 있으니 조금 기다리시죠.”

강무완의 바위 같은 얼굴에 미소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압수수색을 하고도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면 이번엔 정말로 그 옷을 벗어야 할거요.”

필웅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강무완은 그런 그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이내 수행원들과 함께 발을 돌렸다.

필웅은 복도에 서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 * *

다음 기일.

“자, 자! 조용히! 착석하세요!”

오늘 따라 공판정에 방청객들이 유난히 많았다. 법원 경위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지만,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필웅에게는 그런 소란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검찰 측, 새로 제출한 증거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판사가 나른하게 필웅을 불렀다.

워낙 끊임없이 재판이 이어지고 있었고, 매 재판이 끝날 때마다 끝없이 기사가 나오는 상황이어서 모두가 피곤한 상태였다.

필웅은 피고인석 쪽을 돌아보았다.

강무완과 강중민은 오늘도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형사재판은 피고인이 출석해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무완과 강중민은 오만 가지 불출석 사유서를 내면서 재판을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기 일쑤였다.

더욱 필웅을 화나게 하는 것은 재판부가 아무런 이의도 없이 그런 사유서를 모두 받아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편의란 편의는 다 봐주겠다 이거지. 뭐 좋아. 오늘 제출될 증거를 보고도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검찰은 삼영의 본사에서 소위 H라고 불리는 약품을 발견했습니다. 추가 제출 증거는 그에 관한 압수수색 결과입니다.”

필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청석이 크게 술렁였다.

필웅은 이미 여러 차례 교단과 삼영이 협조해서 약품 H를 제조해 왔다고 주장해 왔다.

물론 교단의 기도원 지하에서 약품 H를 발견한 증거는 이미 제출되었다. 하지만 강무완과 강중민은 끊임없이 그 약품은 교단이 삼영과 상의 없이 멋대로 개발한 약품이며, 삼영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전까지는 이를 입증할 증거가 딱히 없었다.

그러나 필웅은 이 사건이 개시되기 전 이미 장경에게 삼영 본사를 압수수색해서 그 증거를 확보해 달라고 요청해 둔 상태였다.

“이 물건이 삼영 본사에 있을 거라고요?”

필웅의 요청에 장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필웅은 말없이 교단 기도원 지하에서 발견한 쪽지를 내밀었다.

발신: 지도자

수신: 실험실장

H Proto Type은 본사로 이송할 것.

“이건…?”

“기도원 지하에서 발견한 지령문입니다. 서둘러 파기하고 떠나려고 했지만, 시간이 없어 제대로 파기가 안 된 것 같더군요.”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본사가 삼영 본사라는 겁니까?”

필웅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첫째로, 본사라는 명칭은 아무래도 교단의 본부를 가리키는 말로는 어색합니다. 교단은 어쨌든 회사는 아니니까요. 둘째, 교단의 본부는 다름 아닌 영산에 있는 기도원 그 자체입니다. 다른 곳으로 이송할 예정이라면 본사로 이송하라고 할 이유가 없어요.

셋째, 교단의 시설들이 사실상 모두 와해된 지금, 교단의 ‘유산’인 약품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교단을 부려오고 있던 삼영밖에 없습니다. 삼영 본사는 교단과 직접적인 커넥션이 없으니, 삼일유통같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회사를 사용하는 경우보다 훨씬 안전할 거구요.”

장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웅은 의기양양하게 백산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백산의 표정이 이상했다.

당황하거나, 적어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 백산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판사님.”

백산이 그답지 않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압수수색 절차를 제대로 준수하지 못한 압수수색 증거는 어떻게 됩니까?”

판사가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증거는 적법하게 수집되지 않은 증거이니, 재판에 쓰여서는 안 되겠죠.”

“그렇죠?”

‘무슨 소릴 하려는 거야?’

필웅은 분명 확실하게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고, 그에 따라 증거들을 확보했다.

다시 조서를 살펴보았지만, 압수수색 영장에 기재된 장소와 날짜는 모두 정확했다.

“저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검찰 측은 압수수색 영장을 해당 증거들이 보관되어 있던 창고관리자에게 제시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죠. 관리자에게 제시한 부분까지는 문제가 없지요. 다만.”

백산이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삼영의 창고는 5개의 구획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증거는 A 구획 담당자가 소지하고 있었죠. 그 담당자에게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했나요?”

“담당자라고요?”

“이런 이런. 법을 집행한다는 분들이 그것도 제대로 확인을 안 했단 말입니까?”

백산은 우아하게 필웅을 손으로 가리켰다.

“검사님, 대답해 보시지요! 압수수색 영장은 관리자가 아니라 그 물건을 개별적으로 소지한 사람에게 각각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압수수색 대상자 개인에게 영장이 제시되지 않았다면, 그 압수수색은 불법 아닌가요? 말씀해 보시지요!”

필웅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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