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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42화 (142/151)

142화 살인자의 평온한 눈빛

필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턱도 없고 관심도 없는 4원로는 잔혹한 모습으로 서원주의 시체 위에 올라앉았다.

그가 당장 도망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필웅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도망칠 건가?”

“일단은.”

“여기에 온 목적은 뭐지?”

4원로는 필웅, 장경(정확히는 장경의 총) 그리고 엉덩이 밑의 서원주의 시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는 교단의 유산을 찾으러 여기에 왔다.”

“교단의 유산?”

필웅이 그와 거리를 좁히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그래. 교단의 유산. 교단이 남긴 물건이지.”

“교단의 재산을 말하는 건가?”

“물론 그것도 있지만 주목적은 아니다.”

예상외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4원로에게 필웅은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물었다.

“그럼 당신들이 찾던 교단의 유산이란 건 대체 뭐지?”

4원로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이거다.”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갈 뻔했지만, 이내 그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점을 깨닫고 멈칫했다.

“H 프토로타입인가?”

“잘 알고 있군.”

필웅이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겨우 그거 하나를….”

“겨우 이거 하나를 찾았다. 이 새끼가 말한 것과는 다르게.”

4원로는 말하며 서원주의 시체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이놈은 마치 교단에 H 프로토타입이 잔뜩 남은 것처럼 나를 꼬드겼다. 물건을 확인하고 바로 옮기려고 했는데, 들어와서 보니 물건은 이미 없었다. 남은 거라곤 이 병 하나뿐이었다.”

4원로는 약병을 들어 지루하게 흔들었다.

‘역시, 교단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필웅은 처음 서원주를 만났을 때 그의 순박했던 인상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순박도 뭣도 아니고 그저 뛰어난 연기일 뿐이었다.

4원로의 손에 든 약병 안에는 알약이 2-3개 정도 들어있었다. 반투명한 약병 안의 알약은 그가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서원주가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건 아닐 것이다. 굳이 4원로의 심기를 건드려서 서원주에게 득 될 게 없어. 아마 오랫동안 교단을 떠나 있었으니, 신약이 어디로 어떻게 옮겨졌는지 알 수 없었겠지. 교단에서 시키는 일들만 했던 4원로는 말할 것도 없고.’

필웅은 생각에 잠겨 어떻게 4원로의 손에서 H 프로토타입을 얻어낼 수 있을까 궁리했다.

‘총을 먼저 쏴야 하나?’

하지만 지금같이 4원로가 무방비하게 앉아 있는데 먼저 총을 쐈다간 운이 좋아 둘 다 무사히 탈출한다고 하더라도 장경도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 4원로도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장경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총을 쥔 손을 움찔움찔하고 있었지만 발포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4원로가 약병을 필웅에게 던졌다.

필웅은 예기치 못하게 약병이 날아오자 얼떨결에 간신히 그것을 잡았다. 필웅은 멍한 표정으로 4원로를 바라보았다.

“그것, 가져.”

4원로는 간식이라도 나눠준 것처럼 평온하게 말했다.

“뭐?”

“가지라고. 그것 하나로는 내게 아무 의미 없다.”

“하지만 이건 당신들이 불법 약품을 조제하고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텐데…?”

“불법 약품? 증거?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당신이 끈질기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4원로가 나이프를 무심하게 들어 필웅을 가리켰다. 딱히 던지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필웅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당신들을 다 죽이고 나갈 수도 있겠지만,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닌데다가 그다음에 나는 또다시 도망자가 된다. 교단의 지원도 없이 도망 다니는 것, 피곤한 일이다. 당신이 서원주를 죽인 것을 눈감아 주면 나는 얌전히 여기서 나가고, 그 약병도 그대로 넘기겠다.”

“약병은 이미 줬는데?”

“내가 다시 뺏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는 4원로의 눈빛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의 그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장경은 총을 쥐고 있음에도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좋아.”

필웅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좋아?”

“그래. 거래 성립이다.”

“상황 파악이 빠르다고도 들었다. 좋은 선택이다.”

4원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필웅과 장경의 사이를 지나쳐 입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잠깐!”

“?”

필웅이 부르자 4원로는 고개를 돌려 묻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디로 갈 거지?”

“무슨 상관? 약속을 어기고 날 체포하러 올 건가?”

“그렇진 않아. 물론 우연히 눈에 띄면 당연히 체포는 할 거다. 그것보다 혹시 교주의 행적을 알고 있는가 해서 물어본 거야.”

“교주?”

4원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내가 가는 곳과 교주가 연관이 있다는 거지?”

필웅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지? 너는 교단의 지원을 필요로 하잖아. 이제는 다른 원로도 없고, 도망친다면 교주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하는 것 아닌가?”

4원로가 잠시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필웅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에 필웅도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지? 내가 한 말이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건가?’

필웅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제 4원로가 기댈 곳은 교주밖에 없었다. 물론 서원주의 꾐에 빠진 것을 보니 교주를 찾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필웅은 그렇다고 교주에게 의탁하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선택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교단의 우두머리 아닌가? 교단의 고위층이 전부 사라지고 교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대체 교주를 찾아가지 않으면 누구에게 찾아갈 수 있는 거지?’

필웅은 모든 게 다 의문이었다.

“모르는 건가?”

“무슨 소리야?”

“교주는 없다.”

“뭐?”

4원로가 아예 돌아서서 팔짱을 끼고 또박또박 말했다.

“교단의 교주는 없다고.”

“어, 사라졌다는 뜻인가?”

4원로는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애초에 교주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린 채 입을 닫지 못했다.

장경도 어느새 총을 쥔 손을 내린 채 헤 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 음, 그게, 무슨 소리지? 다른 원로들은 모두 교주가 있다고 했어. 단지 만난 적이 없다고….”

“만난 적이 없는데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

4원로의 근본적이면서 일견 철학적이기까지 한 질문에 필웅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필웅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교단의 원로들은 적어도 교주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건 철벽처럼 믿고 있었어. 그런데 당신은 왜 교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들었으니까.”

“들었다고? 누구에게?”

“어떤 사람에게.”

질문한 것만 한 소절씩 대답하는 4원로의 화법에 필웅은 답답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사람? 원로들은 모두 교주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데, 누가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거야?”

4원로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봐라. 서비스는 끝이다. 그럼.”

필웅이 제지할 틈도 없이 4원로는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필웅이 장경을 돌아보니, 장경도 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저놈이 지금 뭔 소리를 한 겁니까? 그러니까 교주가….”

“교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군요.”

필웅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약병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만 있으면, 적어도 교단의 잔당들을 전부 기소해서 손발을 묶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교주의 정체는 여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게다가 교단의 원로는 교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떡하지?’

물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야 없었다. 4원로는 단지 교주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웅과 장경을 동요시킬 만한 말을 아무렇게나 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4원로가 한 말은 필웅이 예전부터 의심해온 것이기도 했다.

‘사실 교주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교단은 교주의 휘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세력이라기보다는, 큰 틀에서의 계획은 잡혀 있지만 원로들의 재량으로 움직이는 조직에 더 가까워 보였다.

만일 교주가 자주 모습을 드러내면서 원로들을 통제했다면 원로들이 뿔뿔이 흩어져 구속당하거나 죽음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교주를 본 사람이 없다는 점 또한 이상했다.

‘이런 교단은 교주의 카리스마로 움직이는 조직인데, 실제로 교주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것도 이상해!’

필웅도 의심하고 있던 찰나에 4원로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들으니 필웅으로서는 의심을 쉽게 거두기가 어려웠다.

“에이,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님까? 교주가 없는 교단이 어딨어요? 무슨 하청업체도 아니고….”

장경이 권총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구요?”

“예? 교주가 없는 교단이 어딨겠냐고….”

“아니, 그다음에.”

필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청업체요?”

필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교주가 없는 교단. 교단 자체적으로는 생산하기 어려운 약품의 생산. 삼영과의 긴밀한 협력관계. 삼영의 목적.’

이제까지 알아낸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줄지어 떠올랐다.

“하청업체….”

“예, 하청업체가 왜요?”

필웅은 장경의 물음에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여기서 나가죠.”

장경도 별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뭔가… 확인해 볼 게 있습니다.”

* * *

필웅은 시연이 갖고 온 서류들과 자신이 갖고 있던 서류들을 한데 모아 정신없이 넘겨 보았다.

“그래서, 4원로와 서원주를 만났다고?”

“응. 4원로는 도주했어.”

시연의 물음에 필웅은 서류를 넘겨 보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럼 서원주는?”

“4원로가 살해했어.”

“그리고 나서는 그냥 도주했다고?”

그 말에 장경은 약간 뜨끔한 표정으로 시연의 눈치를 살폈다.

필웅은 장경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했다.

“응. 경황이 없어서 막기 어려웠어.”

시연은 그런가 하는 표정이었지만, 필웅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어찌됐든 필웅은 4원로로부터 정보와 약품 H를 받아내기 위해 거래를 했다.

물론 필웅도 순순히 그를 앞으로도 그대로 놔줄 생각은 없었지만, 현행범인 범죄자를 놔주기로 하는 거래를 했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필웅은 일단 지금 보고 있는 서류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동안 교단의 원로들이나 신도들을 잡아들이면서 신문한 내용들이었다.

‘서춘주… 황대산… 오점순… 모두 없어!’

필웅은 조서를 한참 읽어보다가 내려놓았다.

조서는 따로 없지만 김영지가 한 말도 떠올렸다.

김영지도 교주를 본 적이 없다거나 본 지 오래됐다는 식으로 대답을 회피했고, 황대산은 먼발치에서 교주를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했지만 말단인 그가 다른 원로들조차 얼굴을 잘 알지 못하는 교주의 얼굴을 알 리가 없으니 다른 고위 원로를 착각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결국, 실제로 자신이 교주라고 칭하는 교주 본인을 만나 본 원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원로 중에 아무도 교주를 실제로 본 사람이 없어!’

필웅은 그 결론을 앞에 두고, 이 결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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