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소름끼치는 흑막
필웅은 임시로 살고 있는 여관방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예전 차량 사고 당시 망가진 핸드폰은 약간 수리를 거치고 나니 정상적으로 잘 작동했다. 필웅은 오히려 스마트폰처럼 복잡한 기능을 가진 도구가 아니다 보니 상대적으로 더 수리가 쉬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참 핸드폰을 어루만지던 필웅은, 결심한 듯 단축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어. 무슨 일이야?”
여전한 강유라의 툭 던지는 듯한 말투에 필웅은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참 한결같단 말이야….’
필웅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안부를 물었다.
“건강은 좀 어때?”
“그냥 그래. 뭔가 더 알아낸 게 있어?”
“서춘주가 피라미드 사기를 벌이고 있었어.”
“서춘주? 아… 그 교단의 원로?”
“응. 그리고… 김영지가 죽었어.”
“뭐? 왜?”
필웅은 김영지가 서춘주를 습격하고, 그를 납치했다가 오히려 그에게 살해당한 일을 간략하게 강유라에게 들려주었다.
강유라는 이야기를 듣고 소화하려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강유라의 목소리가 수화기 맞은 편에서 들려왔다.
“굉장하네. 그래서, 서춘주는 체포했어?”
“응. 살인 혐의와 사기 혐의로 조사 중이야.”
“그냥 조사 중이야?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 것 치곤 진도가 조금 지지부진하지 않아?”
“이봐, 좀 봐 줘. 우리도 죽을 뻔했다고.”
“어디서 약한 척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필웅은 잠자코 수긍했다.
“서울로 올 거야?”
“뭐? 아니.”
“그래. 계속 거기에 있는 게 덜 위험하겠지. 그리고 진도 얘기를 꺼낸 김에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강유라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
“혹시 이영규 당대표라고 알아?”
“이영규? 자유민족당의?”
“응, 맞아.”
“그 인간은 왜?”
차기 대통령후보 2위인 이영규조차도 그 인간이라고 호칭해 버리는 강유라의 자유분방함에 필웅은 피식 웃어버렸다.
“알긴 아나 보네.”
“신인이었을 시절부터 우리 할배가 키워낸 삼영 장학생 같은 사람이거든. 몇 번 봤지. 그 인간은 왜 찾는 건데?”
“그 사람이 서춘주와 강준수를 만나는 걸 봤어.”
“뭐? 흠, 강준수랑 만나는 거야 놀랍지 않지만, 거기에 서춘주가 있었단 말이야?”
“맞아. 처음 김영지가 서춘주를 습격한 장소도 서춘주, 강준수, 이영규가 회동하던 자리였어.”
“그래서 이영규를 찾는 거야? 설마 만나 보려고?”
“가능하다면.”
수화기 너머에서 강유라의 어이없어하는 실소가 들렸다.
“삼영의 ‘현’ 경영진이라면 모를까, 아무나 그냥 전화 걸어서 언제 방문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방문한다고 받아 주는 사람이 아닌 건 알지?”
“알지. 그런 건 기대도 안 해. 하지만 일단 네가 개인적으로 안다면 어떤 식으로든 접촉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좋아, 일단 생각은 해 볼게.”
“알았어. 뭣 좀 알아내면 연락 줘.”
필웅은 전화를 끊고 누워 생각에 잠겼다.
교단은 신약을 개발했고, 이미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삼영은 그 과정에서 자금을 제공했고, 아마도 그 대가로 개발된 신약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협의했을 것이다. 강준수와 서춘주, 이영규 당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볼 때 정치권도 여기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이걸 언제, 어떻게 쓰느냐인데….’
서춘주가 원로들에게 그랬듯 개별적인 투입대상들에게 일일이 신약을 몰래 투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투약대상이 많아질 경우 관리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혹은 유력 정치인을 하나 골라서 그에게 신약을 먹인 뒤, 그로 하여금 다른 정치인들에게 전파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에 미친 필웅은 소름이 끼쳐 오는 것을 느꼈다.
‘이거야 피와 살덩이만 안 보일 뿐 좀비 재난물이잖아.’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막아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영규와 만날 때 서춘주가 이미 손을 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차기 대통령 후보이자 당대표인 정치인이라면 인맥도 넓을 것이고, 그 인맥은 하나같이 고위직으로 연결될 것이 분명했다. 즉, 신약을 일종의 바이러스처럼 생각한다면, 이영규 당대표는 최고의 ‘숙주’ 중 하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이영규 당대표를 만나서 그가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가만, 그런데 약을 먹었다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오점순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신약을 투약당했다고 해서 평상시의 행동 자체가 이상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친한 지인 정도라면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필웅으로서는 그가 평상시와 묘하게 다른지 어떤지 외관상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필웅은 고민하다가 다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아, 지찬 씨. 저 기억하시죠? 조필웅 검사라고…”
“알아요.”
장경의 사촌 동생, 박지찬이었다. 필웅은 여전히 사회성 없는 말투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봐 주신 그 신약 말입니다.”
관심이 있는 주제이기는 한 듯, 지찬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네, 그거요. 그거 왜요?”
“혹시 그 약을 투약했을 경우 나타나는 증상 같은 게 있습니까?”
잠시 생각 중인 듯 지찬은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자신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처음 그 약을 봤을 때는 시험 단계였어서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건 알기 어려워요. 다만….”
“다만?”
조금 흥분한 듯 지찬의 말이 빨라졌다.
“실제로 완성된 약을 찾아서 제가 실험해 보면 뭔가 알게 될 수도 있어요. 일단 제 생각에는 투약 직후엔 트랜스 상태에 빠지게 되니 평소보다 몽롱하거나 정신이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을 것 같구요. 특정 단어나 행동에 특이반응을 보일 수 있어요.”
“특이반응이라면?”
“뭐 갑자기 흥분한다거나, 부자연스럽게 특정 언행을 반복한다거나, 아니면 오히려 거부한다거나 그런 거죠.”
필웅은 바로 오점순의 사건을 떠올렸다.
오점순은 계속해서 필웅이 교단에 대해 캐묻자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왕국이 내린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했었다. 아마도 교단의 고위급 원로들에게는 교단의 정보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특정한 언행을 거부하도록 최면을 걸었을 수도 있었다. 황대산의 경우 원로 중에서도 잡무를 도맡아 하는 지위에 불과해 별다른 최면이 걸리지 않은 듯했다.
‘황대산이야 실제로 아는 것도 별로 없었으니….’
“그러면 혹시 신약을 입수하게 되면, 실험을 의뢰해 봐도 됩니까?”
“그럼요!”
박지찬은 오히려 언제 물을지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대답했다.
필웅은 지찬의 신변 보호를 위해 몇 가지 사항을 이야기해 주고 전화를 끊었다.
‘신약의 원재료와 입수 루트까지는 전부 파악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디서 생산되고 있는 걸까?’
교단의 주요 원로들 중 아직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것은 4원로와 6원로 뿐이었다.
김영지의 말에 의하면 4원로는 뛰어난 킬러라고 했다. 그러니 아마도 전면에 나서서 행동하는 타입은 아닐 것이라고 필웅은 생각했다.
‘서춘주에게 동생이 있다고 했지.’
교단은 사업체지만, 서춘주가 다른 원로들을 믿지 않았듯 서로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단체는 아니었다. 따라서 서춘주로서는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교단의 원로들의 상태는 썩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최고원로인 김영지와 5원로인 이원필은 죽었고, 2원로인 서춘주와 3원로인 오점순은 모두 구속된 상태였다. 7원로인 황대산은 필웅과의 협상을 통해 잠시 풀려난 상태지만,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실질적으로 활동이 가능한 것은 4원로와 6원로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아직 필웅 등이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만약 누군가 교단의 대업을 이어나가야 한다면, 그건 서춘주의 동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교단이 신약을 통해 어떤 계획을 추진 중이라면, 실질적으로 활동이 가능한 것은 4원로와 6원로밖에 없었고, 만일 서춘주의 동생이 서춘주의 심복이라면 그 역시 원로일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그는 4원로 아니면 6원로일 것이었다.
‘4원로는 최근에 교단에 합류했다고 했고, 6원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가 없군.’
만일 4원로나 6원로 중 하나가 서춘주의 동생인 것을 김영지가 알았다면 그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을 거라는 생각도 떠올랐지만, 김영지가 실제로는 다른 원로들과의 사이에서 겉도는 쪽이었다는 점을 기억해 낸 필웅은 조심스럽게 그 생각을 배제했다.
‘일단 단서라고는 서춘주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과 그 동생의 대략적인 인상착의 정도인가?’
그때 장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필웅은 이미 핸드폰 번호를 장경과 시연에게는 알려준 상태였다.
“형사님?”
“검사님. 서춘주에게 서원주라는 동생이 하나 있는데, 현재 주소가 서춘주와는 다른 것 같군요.”
“그래요? 어디죠?”
“어… 주소를 불러드리겠슴다.”
필웅은 가족관계증명서에 나타난 주소를 받아 적었다.
“제가 한 번 가보도록 하죠. 여기에 나타난 주소에 살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형사님은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다른 단서를 모아 주세요.”
“예, 알겠슴다.”
필웅은 장경이 알려 준 주소로 이동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 * *
필웅은 장경이 일러 준 주소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임대아파트였다.
주위의 공사현장 소음도 심했고, 보도블럭이나 가로등의 관리 상태도 심각했다.
‘이런 곳에 서춘주의 동생이 산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교단의 주요 인사가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물론 위장일 수도 있으니 필웅은 방심하지 않았다.
‘겉보기엔 임대아파트지만 사실은 건물 전부를 쓰고 있다든가….’
필웅은 주소에 쓰인 호실을 찾아가 벨을 울렸다.
그러나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고장인 듯했다. 필웅은 슬슬 이게 위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웅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5분이 지났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답답해진 필웅이 다시 팔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뉘슈?”
컬컬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아, 저… 서원주 씨 계십니까?”
“뉘시냐고!?”
안의 목소리가 짜증스럽게 다시 물었다.
필웅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서춘주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만일 순순히 신분을 밝혔다가 서원주가 어디로든 도주할까 봐 필웅은 일단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려서 필웅은 하마터면 철문에 머리를 찧을 뻔했다.
“서춘주라고!?”
노기등등한 목소리와 함께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필웅이 기대했던 40대의 남자가 아니라 한 노파였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와?!”
다짜고짜 나타난 노파가 필웅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자 필웅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저기, 어머니! 이것 좀 놓고 말씀하세요!”
“너희들은 말로 했냐, 이놈들아! 너희들은 아주 혼쭐이 나야…!”
“어머니, 그만두세요!”
정신없이 필웅이 휘둘리고 있을 때 아파트 안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듯 심하게 절고 있는 사내였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황급히 노인을 필웅에게서 떼어내고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조금 거치셔서….”
필웅은 간신히 구겨진 옷을 바로잡고 대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필웅이 물으며 의혹 어린 눈길로 남자를 슥 훑어보았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은 서춘주와 닮은 정도가 아니었다. 다리 한쪽을 절고 있는 것만 빼고는, 남자의 얼굴은 서춘주 본인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필웅이 충격에 빠져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서원주라고 합니다.”